내 머릿속의 개들 - 제11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이 땅에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문학상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문학동네 작가상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초대 수상자인 김영하 때문이다. 그가 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나를 읽는내내 몽환적이고도 미스테리한 분위기로 이끌었는데, 그 이후에도 문학동네 작가상은 박형욱과 박민규 같은 괜찮은 작가를 내게 소개해 줬다. <내 머릿속의 개들>이라는 작품을 읽게 된 건 그게 제11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어서는 아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문학동네 작가상에 더욱 신뢰를 갖게 됐다.


실업자인 고달수는 대학 때 친구인 마동수로부터 전화를 받는데, 이유인즉슨 자기 아내와 이혼하게 도와 달라는 거다. 마동수는 설치미술을 전공하는데, 그의 아내는 마동수에게 "너 유명해지면 나같은 거 버릴 거지?"라며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기 일쑤였고, 그 불안감을 설탕 먹는 걸로 푸느라 살이 엄청나게 쪄버린 인물이었다.

"마동수의 어마어마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숨막히고 처참하게 뚱뚱한 아내 장말희였습니다 (25쪽)."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스토리가 아니었다. 작가가 풀어놓는 말들은 하나같이 재기발랄해, 난 시종일관 웃음을 참아가며 책장을 넘겼다. 굳이 웃음을 참은 이유는 내가 책을 읽은 장소가 대부분 공공장소였기 때문인데, 이런 문구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웃음을 참았는지 스스로가 대견하다.

"세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에너지의 끝없는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책의 핵심적인 구절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가 여전히 모르는 척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마동수의 전시회 제목

"저의 은사이자 떠나간 애인의 아버지이고 동료 철학도이면서 인생 선배인 김팔봉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이 김팔봉 씨는 계속 나오는데, 늘 그럴 듯하면서 남는 거 없는 말만 한다.


책날개에 있는 사진에서 그가 만만치 않게 살아왔음을 느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저자는 8년간의 시간강사 생활을 경험했단다. 아내가 출근하고 자신은 살림을 하며 글을 쓰는 생활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저자는 위트와 유머를 잃어버리기는커녕 더 날카롭게 벼려 온 것 같다.

"강사 생활을 접고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게 십년 전이다. 십만 독자를 기대했건만, 역시 커뮤니케이션이란 지독하게 어려운 것임을 절감했다."

작가님, 커뮤니케이션이 어렵긴 하지만 일단 말이 통하면 그때부터는 고속도로 아니겠어요? 저는 이제 작가님 팬이 되었습니다. 힘내시고, '사기'를 주제로 한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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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발명품 2008-07-1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몇 구절만 보더라도 상당히 재치있고 유머가 넘치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서울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한 책은 <공중그네>라고 한다. 나 또한 그 책을 통해 오쿠다 히데오를 알았고, 뭐 재미있는 책이 없냐고 묻는 이들에게 <공중그네>를 추천했다. 그 책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어서, 재미와 더불어 내 삶을 한번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책이 너무 갑자기 쏟아지면서, 이젠 슬슬 질리는 느낌이다. 어떤 작가든지 여러 권 읽다보면 식상할 수 있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경우엔 그게 좀 빨리 온 듯하다. <공중그네> 이후 읽은 어떤 책에서도 첫 책만큼의 포스를 느낀 적이 없고, 요즘엔 그의 책을 읽는 게 지겹기까지 하니 말이다.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는 그가 마흔의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한 첫 번째 작품으로, 한국에서 그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서둘러 번역된 듯하다. 여기서 팝스타 존은 오노 요코와 결혼한 존 레논인데, 참고로 말하면 존은 1980년 활동을 재개하기 전 4년간을 은둔 상태에서 보낸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작동하는 건 이 대목으로, 저자는 그 4년간 존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나름대로 재미있게 구성해 낸다.


이 책이 아주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아쉬운 건,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게 <공중그네>류의 재미였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분신인 이라부가 나오지 않을까, 혹시 마유미짱은 나오나 이런 걸 기대했지만, 소설은 내 기대를 저버린 채 끝나 버린다. 이런 걸 보고 네이버에서는 '낚였다'는 표현을 쓴다. 맞다. 난 낚였다. 그런 정도의 상상력을 보기 위해 이 책을 고른 건 아니니까. 그러고보면 이 책은 나같은 사람을 낚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오쿠다 히데오 장편소설'이라는 걸 붉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썼고, 원제인 <우람바나의 숲> 대신 <수상한 휴가>라는 걸 제목으로 붙였다. '수상한 휴가', 왠지 이라부 의사가 존을 괴롭히는 장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뭐, 그럭저럭 읽을만은 했으니 '낚였다'는 표현은 심한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존 레논이 일찍 죽은 게 아쉽다. 그가 죽었을 때, 그리고 많은 여성 팬들이 따라 죽었을 때, 난 "존 레논이 대체 누군데 그래?"라고 했으니 말이다. 리뷰를 쓰면서 네이버에서 그의 노래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imagine'을 계속 들었다. 들을수록 명작이다, 이매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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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8-07-0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레논이 죽었다는 얘기는 언감생심, 아니, 금시초문인데요? 어제 우리 동네 화상경마 성인오락실에서 우연히 마주쳐가지고 싸인까지 받았는데.

인터라겐 2008-07-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오쿠다 히데오를 버렸어요.. ㅋㅋㅋ 잘 지내고 계시지요...

참이슬 후레쉬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다락방 2008-07-0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걸]을 읽으면서부터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멈췄어요. 왜 인기있다 싶으면 그렇게 와장창 쏟아져 나오는건지.


저는 요즘 처음처럼을 마십니다.

최상의발명품 2008-07-0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공중그네를 읽었어요.ㅎㅎ
책 많이 안 읽는 제가 읽은 책이름이 나와서 무지 반갑네요.
이라부도 반갑구!
팝스타존의 수상한 휴가라는 제목이 참 끌리긴 하는데요.
저는 이상하게 일본 작가들은 빨리 질리는 거 같아요.
오랜만에 뉴가 뜨니 참 반가워요 마태님!

순오기 2008-07-03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쿠다 히데오 '남쪽으로 튀어!'까지는 괜찮았죠?ㅎㅎ

무스탕 2008-07-0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공중그네'만' 읽었어요..
더 이상 손이 안뻗치더라구요..

진/우맘 2008-07-0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다 읽었는데...ㅎㅎㅎ
그래도 이 책 속 의사는 어쩐지 이라부의 전신이 아닐까 싶어서 정겹게 느껴지던걸요?
청초한 아테나 간호사도 그렇고...

오랜만입니다~^^ 저는 종종 마태님 생각을 하는데, 마태님은 까맣게 절 잊고 사십죠?

비로그인 2008-07-0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를테면 이런 제목 있죠, 탐 크루즈의 ***, 내지는 존 트라볼타의 ***, 이런 영화는 보지 않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한 배우의 유명세에 의존해서 영화 하나 팔아보려는 의도가 다분하고, 정작 그 배우는 단역으로 출연하든지, 혹은 영화 전체도 그 배우의 얼굴 잠시 나오는 것 제외하고는 볼 게 없다든지, 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든요.
출판계에서도 종종 이런 경우가 있나 봐요.

다락방 2008-07-03 23:19   좋아요 0 | URL
아 십년도 훨씬 전에요, Jude님.

탐크루즈와 브룩쉴즈의 영원한 사랑, 이라고 광고를 하길래 얼씨구나 봤어요. 당연히 탐크루즈랑 브룩쉴즈가 사랑하는 연인사이일 줄 알았지요. 영원한 사랑을 하는 연인이요. 그런데 탐크루즈는 브룩쉴즈의 오빠더군요. 영원한 사랑을 하는 남자주인공은 따로 있고! 윽.

비로그인 2008-07-05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관한 이야기말고 오늘은 그냥 인사할게요.
안녕하세요?

2008-07-12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8-07-13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안녕하셨어요?
비밀글님/어...사정이 많이 어려웠어요. 나중에 전화드릴께요
주드님/어..맞습니다. 특정 배우를 내세우는 영화는 대개 서사가 없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런 제목을 붙이는 거겠지요.
진우맘님/어...안녕하세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어요 사실 진우맘님 생각 많이 하는데요, 저희를 버리신 건 진우맘님이잖아요!!!! 그렇게 돌아오라고 해도 외면하셔놓고선!!!
무스탕님/잘하신 것 같습니다..
순오기님/어...저 그거 안읽었는데요 남쪽으로 한번 가봐야겠군요^^
최상의발명품님/안녕하셨어요 답변이 너무 늦었지요? 일본 작가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울나라에 소개되는 작가들 중 좀 가벼운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요시모토 바나나랄지....
다락방님/어..처음처럼을 드시는군요! 일행 중 한명만 처음처럼을 마시면, 결국 모두가 처음처럼을 마시게 되지요^^ 어 근데 전 <걸>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리뷰 쓰려고 해요 지금.
인터라겐님/앗 미모의 인터라겐님이닷! 그간 안녕하셨나요? 흐음, 님은 진작에 오쿠다 히데오를 버리셨군요. 전 아직도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는...
백설기리더탱님/안녕하세요. 역시나 님의 촌철살인은...^^ 너무 오랜만이라 가슴이 다 뛰네요^^ 반갑습니다!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
아툴 가완디 지음, 곽미경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전에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이라는 책을 읽었다. 기생충만 만지며 살긴 하지만, 출신이 출신인지라 의학 쪽 책이 나오면 관심을 갖게 된다. 아톨 가완디가 쓴 그 책은 그리 인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읽을만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가 낸 두 번째 책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가 나온 걸 알았을 때, 의무감에서 장바구니에 담긴 했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중간 부분을 넘어서면서는 "이거 진짜 재밌다!"고 격찬을 하게 되었다. 글을 계속 쓰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책을 낼수록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아톨 가완디는 '진정한 글쟁이'라 할만하다.


이 책은 의료에 관한 여러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여자 환자를 진찰해야 할 때의 고민이랄지, 사형집행에 있어서 의사가 관여하는 경우, 그리고 의료소송에 관한 글들은 저자의 고뇌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소생 가능성을 예측해 주는 지표가 '아프가 스코어'인데, 그걸 처음으로 고안한 '아프가'가 소아과나 산부인과가 아닌, 마취과 의사라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바로 이거였다.

"헬스그레이즈라는 인터넷 회사가 있다. 17달러 95센트만 내면 어떤 의사를 고르든간에 그에 대한 평가기록을 보내준다."


지금까지 의사의 진료 수준을 측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헬스그레이즈에서 제공하는 정보도 의사의 인적사항과 징계 여부 등,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낭성섬유증'이란 병의 치료에 대해 각 병원의 순위가 매겨진 걸 보면서, 미래에는 각 의사의 진료 수준이 점수화되어 환자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행위가 평가받고 등급화된다는 것에 대해 의사들은 반발하겠지만, 모든 부문이 경쟁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의사들이라고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으로써 의사 생활을 하는 게 더 피곤한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책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이 책을 의사가 될 사람들이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쟁점들은 그네들이 현실세계로 뛰어든 후 몸으로 겪어 내야 할 것들이고, 책을 읽으면서 미리 한번 생각해 본다면 대처가 용이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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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발명품 2008-07-03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희 엄마가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었어요.
내장에 손상을 입어서 수술을 해야될지도 모른다는 거에요.
우리 가족은 누가 수술한 번 안해봐서
칼로 배를 찢어서 연다는 게 너무 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선생님 우리 엄마 어떡해요 ㅠㅠ 이러면서
불치병 걸린 것처럼 오버를 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수술 안해도 될지도 모른다고.
그럴 확률이 더 크다고 따뜻하게 얘기해주시더라구요.

저 같은 (당시) 어린애도 잘 다독여주시던 의사 선생님
지금 생각해도 무척 고맙네요.
엄마는 수술하지 않으시고 한 일주일만에 무사히 퇴원했구요.

그리고 그 병원 새로 지어서 무지무지 깨끗했어요.
동국대 일산병원인데요.
혹시 마태님 아시는 분이 거기 근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제 기억 속에는 좋은 병원으로 남아있습니다.

마태우스 2008-07-13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상의발명품님/어..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동국대일산병원 이비인후과에 제 친구가 있어요. 과를 보니 그 친구는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완쾌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얼마 전 저희 병원에 오신 울학교 교수님이 전공의들이 불친절해 기분이 나빴다는데, 그 얘길 들으니까 참 부끄럽더라구요. 아파서 온 사람들한테는 친절한 말 한마디가 참 중요한데, 제가 잘 못가르쳤구나 싶어서요....
 
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1억원의 상금이 걸린 세계문학상 수상작, 그리고 지하철 벽에까지 붙어 있는 요란한 광고. 이 정도면 과연 어떤 책인지 궁금해질만하다. 내가 이 책을 주문한 것도 그놈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2006년에 등단한 신인작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지만, 재미 면에서 볼 때 <스타일>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소설가들이 보통 자신의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다는 점에서 패션지에서 일한 경험을 소설로 승화시킨 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의 잔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시점에서 나온 소설인만큼, 웬만큼 잘쓰지 않는다면 그 소설의 아류작으로 분류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스타일>은 '웬만큼 잘쓴 소설'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 쿨하고 발랄하게 보이도록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소설의 스토리가 계속 나랑 겉도는 느낌을 줬는데, 특히나 마지막 대목이 실망스러웠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주인공 여자에게 큰 잘못을 범했고, 그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계속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는데, 알고보니 그 남자는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사랑해 왔고, 그걸 깨달은 그녀는 힘차게 남자의 품에 안긴다.]

이건 내가 중학교 때 누나랑 같이 읽던 하이틴로맨스에서 한결같이 추구하는 줄거리 아닌가. 박우진이 계속 그녀를 사랑해 왔다면 그날의 실수는 어쩔 수 없다해도 왜 7년간이나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게일'을 게이로 잘못 듣고 '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대목도 전혀 현실에서 일어남직하지 않아 헛웃음이 나왔고, '닥터 레스토랑'의 실체가 밝혀지는 대목은 작가가 극적 반전을 통한 소설의 재미만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리얼리티가 살아있고 그래서인지 소설에 생동감이 있다는 게 큰 장점인 듯하고, 독자에게 한국 패션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1억원의 상금에 걸맞은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미실>을 시작으로 4번의 세계문학상 수상이 있었는데, 어찌 된 것이 갈수록 심사 기준이 뭔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아내의 말처럼, "나도 1억원을 꿈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려는 것일까?

*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심한 말을 잘 못하겠다. 리뷰 쓸 때는 좋았는데 막상 올리려니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여러번 망설였다. 나 또한 내 책에 달린 리뷰를 떨리는 마음으로 읽을 때가 있었는데, 이 리뷰가 저자에게 읽히지 않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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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발명품 2008-06-23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금이 1억원이라니 ㅠㅠ 저도 침이 나오면서 무지 부러워지네요.
그런 상을 타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ㅠㅠ
솔직한 리뷰 좋은 걸요. 작가가 본다면 상처 받을 수도 있지만
책을 읽은 사람이 백 퍼센트 다 좋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좋은 한 주의 시작 되시길요. ^^

무해한모리군 2008-06-23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한말 하시면 어떻습니다. 과찬의 말들이 넘치는데 ^^

2008-06-23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08-06-2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실도 별로였어요..;;;

다락방 2008-06-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이책을 안읽었지만 위의 꼬마요정님 말씀처럼 미실도 별로였어요. --;;

마태우스 2008-06-2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아내가 결혼했다는 좀 괜찮았던 것 같구, 작년에 슬롯인가 하는 건 그냥 그렇더군요. 하지만 이번 거보단 더 나은 듯...
꼬마요정님/그렇죠 역시? 1억원의 상금 때문에 관심을 갖게되는데, 그 기대치에 못미치니 욕을 하게 되죠. 돈을 제가 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속삭님/캬...님의 배려에 존경심이 무럭무럭 생깁니다. 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특히 다섯번째 줄....
자진모리님/어 과찬의 말이 넘치나요? 그, 그렇군요^^
발명품님, 아니 도봉구 지부장님/님 덕분에좋은 한주가 될 것 같습니다^^ 리뷰 좋다고 해주셔서 감사. 1억원은 많이 큰 돈이죠. 로또를 150주 연속 산 거 같은데 2등도 안맞더군요^^

두괴즐 2008-06-2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감상이 비슷하네요. 너무 뻔한 스토리와 억지스런 우연의 연발, 과도하게 확장한 회상거리들. 물론 현 시대 젊은 여성의 욕망을 잘 그려냈고 독자로 하여금 몰입의 정도를 양호하게 이끌어 낸 것은 사실이지만 큰 그림으로 볼 때는 썩 잘 그려내지 못한 작품인듯 합니다.

마태우스 2008-07-0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isiwing님/요즘 통 알라딘에 못들어왔어요 너무 답변이 늦었죠? 그래요, 스토리는 뻔하고 억지스런 우연이 많이 나와요. 그런 건 드라마에서도 숱하게 보는 건데, 여러가지로 아쉬운 작품이어요. 그나저나 첨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여기 좀 읽어보세요. 재밌지 않아요?"

연구원 선생님이 나랑 가까이 살아 기차로 출퇴근을 같이 한다. 그전엔 기차에서 책만 읽었는데, 지금은 그분과 얘기도 해야 하니 진도가 느리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음 장면이 너무도 궁금했으니까. 창문만 보시는 연구원 선생님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책의 초반부 하이라이트를 읽어 드렸다.


전날 무리한 탓일까. 책을 읽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평택을 지나갈 무렵 겨우 눈을 떴는데, 책이 없어졌다. 좌우로 눈을 돌리다 보니 연구원 선생님이 내 책을 읽고 계시다. 노안이라 기차에서 책을 잘 안보시던데, 역시 선생님도 이 책이 재밌나보다. 마저 읽으시라고 난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기차가 영등포에 도착할 무렵 눈을 떴더니, 연구원 선생님은 아쉽다는 듯이 책을 돌려준다. 물론 이 말은 잊지 않았다.

"서박(그분은 날 이렇게 부른다), 다 읽으면 나 좀 빌려줘."


심윤경 작가가 쓴 <서라벌 사람들>을 읽는 동안 그 책을 탐낸 사람은 연구원 선생님만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책을 좋아하는 아내가 그 책을 빼앗아 읽더니만, 자신이 먼저 읽겠다고 우기기도 했다.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게 재미라고 한다면, <서라벌 사람들>은 좋은 소설의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달의 제단>에서 고전에 대한 녹녹한 솜씨를 보여주었던 작가는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소재를 찾아 (작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선데이 서라벌'을 썼다. 이 책이 심상치 않음을 안 것은 지증황제의 그것이 '한자 다섯치'라며 다른 사람의 것이 '귀이개'로 묘사된 초반부인데, 그 심상치 않음은 다행히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되어, 원효대사가 바가지를 쓰고 비보이들이 추는 뱅글뱅글 도는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끝이 난다. 심윤경 작가를 강의에 모셨을 때 그의 유머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작가가 자신의 유머를 마음껏 발휘한 건 이 책이 처음이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면, 신라 시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무척이나 관대했던 것 같다. 그러던 게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고 우리 문화가 야만으로 취급되면서, 공적인 자리에서 성은 발설조차 안되는 엄숙한 무엇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그 엄숙함 아래 도사린 수많은 일탈과 불륜을 생각하면, 공적인 자리에서도 거리낌없이 성을 이야기하던 그때가 더 좋은 사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 작가의 팬이라는 건, 책을 읽는 며칠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그 작가의 책을 기다리며 보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책을 읽었으니 당분간은 기다림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어디선가 촛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겠지. 나무아미타불 (이 책을 읽고나면 저절로 이 단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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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발명품 2008-06-2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심윤경 작가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아요. 작가님은 어쩜 그리 유머가 넘치시고 지적이실 수 있을까요. 정말 정말 정말 멋진 심윤경 작가님. 정말 정말 좋아요 ㅠㅠㅠㅠㅠㅠ

2008-06-20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8-06-2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새 책이 나왔군요!

마냐 2008-06-2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반가워요. 저 '심빠'라고 커밍아웃 했는데...팬클럽 지부장 하심 제가 도와드릴께요. ㅎ 이번 작품은 특히나...컨셉 맘에 들고, 표현 수위 좋슴다. 야한건 즐겁다는 거...진짜 좋은 작품이니까 이게 되더라구요. 으하하...제가 서재 들락거리기 시작한 딸래미 눈치 보여서, 이 좋은 맘 다 표현못하고 검열했다니까여. ㅋ

마태우스 2008-06-2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안녕하세요 마냐님도 심빠시군요!! 전 팬클럽 지부장이 아니라 회장할 겁니다^^ 저도 이번 작품의 수위, 컨셉 다 맘에 들었어요. 으하하. 글구 따님에게 서재를 알려주셨군요!! 이거이거 검열이 많이되겠네요 가족 얘기는 전혀 못쓰시겠군요!
주드님/네... 이 책이 재미 면에서는 단연 최고입니다
속삭님/어마 오랜만이어요. 요즘 저한테 적이 많아져서요 제 서재 안오심 그런가보다 합니다. 근데 이렇게 아름다운 댓글을 남겨주시다니요!! 5년 후에나 오신다니, 그동안 조신하게 님을 기다리렵니다^^ 청량제같다고 해주셔서 감사!
최상의발명품님/이곳엔 유난히 심작가님 팬이 많은 것 같군요 팬클럽 회장은 접니다!!^^ 님은 지부장 맡겨드릴께요!

최상의발명품 2008-06-2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도봉구 지부장으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