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말이라는 게 머리보다는 입술에서 나온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 천연덕스럽게 말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내가 내 말이 웃겨서 웃는 건 바로 그럴 때다.

이번 학기 첫 수업을 마치고 나서 애들한테 질문있으면 하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사실 질문이 나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답변을 못하는 어려운 질문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다른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모른다는 말을 하기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할 듯한 자세를 취하는 거다. 난 잽싸게 마이크에 입을 갖다댔다. 내가 했던 말을 여기다 옮긴다.

[질문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바로 현학적 질문이죠. 즉, '난 이런 것도 안다. 넌 모르지?'라는 식의 질문을 말하지요. 두번째가 공격용 질문인데, '너 한번 죽어봐라'는 식으로 상대의 사소한 실수나 약점을 파고들어갑니다. 세번째가 궁금형으로,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칠판에 '기타'라고 썼다. [네번째가 바로 이겁니다. 즉, 연자의 발표내용에 무관하게 주변적인 걸 묻는 거죠. 예를 들면 "자네 부모님은 안녕하신가?"라고 묻는다든지]

애들이 굉장히 감동한 것 같아 난 말을 계속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자들의 61%가 현학적 질문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즉, 잘난체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거죠. 공격용 질문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질문이란 서로의 학문세계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걸 의미하며, 따라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어야 하는 거죠. 세번째 유형, 즉 궁금형이야말로 질문의 꽃입니다. 하지만 이건 '나만 모르는 게 아닐까? 섣불리 했다가 무식하다고 놀리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때문에 실제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학회에 입문한지 십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번도 질문을 하지 못한 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의 조사라는 건 사실 뻥이다. 그런 여론조사 기관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네번째 유형의 경우는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저 아무 말이나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섣불리 그런 질문을 했다간 작살납니다. 그런 건 최소한 50세가 넘어야 할 수 있답니다. 저도 그런 질문을 하려면 15년을 기다려야 하지요]

애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어 필기를 하는 애도 있었다. 내 얘기를 적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질문 하세요. 단, 질문을 할 때 어떤 유형인지 미리 밝히고 해주시길 바랍니다"
단 한명도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난 내친김에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해 줬다.

[어떤 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강의만 끝나면 열나게 뛰어가냐고. 그땐 허허 웃으면서 운동삼아서 그런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질문을 할까봐 그렇습니다. 내가 잘 모른다고 하면 그학생이 '실력없다!'고 소문낼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은 제가 강의 후 열심히 뛰는데 한 학생이 따라오는 겁니다. 겁이 났지요. 그래서 더 빨리 뛰었지만 결국 따라잡히고 말았습니다. 모든 게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그학생이 숨을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레이져 포인터 놓고 가셨어요"]

첫 수업을 이렇게 마쳤을 때,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후 종강을 할 때까지, 내게 질문을 한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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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7-14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