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면도도 아주 가끔씩 하고, 머리는 절대 안빗는다. 내가 게으른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꾸민다고 좀 낫냐?"는 자포자기가 더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런 내가 향수를 뿌린다니 의외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거다. 하지만 난 출근하는 날엔 늘 향수를 뿌린다. 내방 책상 위에는 파란색 향수가 도도하게 서있다. 면도나 머리빗기에 비해 향수를 뿌리는 건 아주 쉬운 일이며, 전날 샤워하는 걸 까먹은 경우 그 효과는 증폭된다.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느라 샤워하는 걸 까먹은 오늘, 열심히 향수를 뿌리고 있었다. 아는 친구가 묻는다. "그거 어디 꺼니?"
이건 사실 내 첫 향수인데, 지금은 멀리 떠난 조교로부터 선물을 받았었다. 그러고보니 그 향수가 어느회사 건지 한번도 눈여겨 본 적이 없었다. 난 향수병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그랬더니 이런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EAU DE TOILETTE"

순간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불어에 문외한이긴 해도, "TOILETTE"가 '화장실'을 뜻한다는 건 안다. 아니 어떻게 화장실용 향수를 내게 선물할 수가? 하지만 친구의 말에 의해 내 분노는 가라앉았다.
"아, 그거? 원액이 50%라는 뜻이야. 한번 뿌리면 4-5시간은 가겠군"

그 글귀 어디에 '50'이란 뜻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이나마 그 미녀조교를 미워했던 내가 부끄럽다. 이런 식으로 무식은 상대의 선의를 오해하게끔 만들며, 우리가 계속 배우고 때로 익혀야 하는 건 바로 그때문이다.

그런데 이 향수는 어느 회사 걸까. 병 위에 필기체로 날려쓴 글자를 읽으보니 이렇게 써있다. "Davidoff Cool Water"
참 희한한 회사다. "데비도프 냉수회사?' 그러니까 생수 회사에서 향수를 만든 걸까? 향수를 만드는 곳은 '샤넬'이나 '크리스챤 디오르'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 회사 것이면 어떤가. 냄새만 좋으면 되지. 오늘은 꼭 샤워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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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7-14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르르르르 내가 기가 허해진걸까 글이 잼난걸까...
 

 

 

 

잘생긴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보니 그의 이빨에 고추가루가 끼어 있다. 이걸 말해 말아 잠깐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잘생긴 얘에 대한 복수 차원이 아니라 내가 그 말을 하면 걔가 민망할까봐서다. 물론 내가 말을 해주면 더 큰 민망함을 막을 수 있지만,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는 걸 콕 집어 지적을 하는 건 영 미안한 일이다. 하여튼 그런 친구를 볼 때마다 내 이를 거울에 비춰보게 되는데, 역시 식사 후에는 꼭 양치질을 해야 한다. 특히 점심 때.

비단 고추가루 뿐이 아니다. 내 친구 P는 유난히 코털이 긴데, 같이 밥먹기가 거북할만큼 코털이 삐져나온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코털 좀 잘라"라고 할 수가 없는 게, 걔가 민망할까봐도 그렇지만 코털을 자를 가위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해봤자 뭐하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말을 하다 상대에게 침이 튀는 것도 우리가 흔히 겪는 민망함 중 하나다. 상대가 눈치를 못채면 다행이지만, 손등에 튄 침을 닦는다든지 하면 굉장히 민망하다. 나처럼 혀가 짧은, 그러면서도 말이 많은 사람이라면 침튀는 걸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하면 밥을 먹다가 튀는 일이 생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민망한 건 코딱지다. 평소 신경을 많이 쓰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언젠가 교실에서 개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마침 코딱지가 코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나본데, 모여있는 애들이 차마 말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중 한 여자얘가 '티코'라는 말로 이행시를 짓겠단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코딱지가 태산이구나!" "죽고싶다"란 말 이외에 그 어떤 말로 그당시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없다. 거울이 있다지만 거울을 보는 그 순간 이외에는 뭐가 묻었는지 도통 알수가 없기 마련,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갈등이 있더라도 서로 비비고 살아야 한다. 코딱지를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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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7-14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겠다. 그만좀 웃겨주시길!
 

 

 

 

외국에서 일년간 있다온 친구를 만났다. 뭐가 제일 먹고 싶었냐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질문을 했더니 아주 진지하게 "떡볶이"라고 한다. 난 짜장면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하기사, 떡볶이도 한국인들, 특히 나같은 30대에게 옛날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식이니만큼 그렇게 대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떡볶이는 겨울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여름이라고 떡볶이를 안먹는 건 아니지만, 뭐니뭐니해도 떡볶이는 추울 때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먹어야 제맛이 난다. 거기에 오뎅국물까지 곁들이면 정말 환상적이다. 어느 음식이나 다 그렇지만, 떡볶이는 맛있는 데서 먹어야 한다. 맵기만 한 떡볶이, 설탕을 많이 쳐 달디단 떡볶이는 먹고나서 기분만 나쁘다. 이 땅에서 36년간 살아오면서 나역시 많은 떡볶이를 먹었고, 거기에 얽힌 추억도 만만치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떡볶이집 3곳을 소개한다.

1. 초등학교 때 그곳
초등학교에서 집에 가다보면 나무로 된 가건물이 있었고, 거기서 엄청나게 맛있는 떡볶이를 팔았다. 그집은 하교길에 떡볶이를 먹는 얘들로 늘 바글바글했는데, 당시 용돈이란 걸 받지 않았던, 그러면서도 얻어먹을 친구도 없었던 난 밖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 가끔, 별로 안친한 친구가 같이 먹자고 불러준 때가 있기도 했다. 그때의 환상적인 맛을 어디다 비교할까. 추억이란 건 약간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그집 떡볶이의 맛을 점수로 평가하자면 10점 만점에 10점을 주련다.

2. 스케이트장
지금 얘들은 롤러블레이드를 타지만, 내가 어릴 적엔 스케이트가 유행이었다. 내가 살던 곳 근처에 공터가 있었는데, 겨울이면 물을 채워 얼린 후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했다. 스케이트를 재미있게 탔다는 기억보다 거기서 먹은 오뎅과 떡볶이의 기억이 훨씬 더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맛이 일품이었는데, 아마도 운동을 하는 와중에 먹은 것이라서 웬만큼만 되면 무조건 맛있었을 거다. 점수를 따지자면 10점 만점에 9.5.

3. 홍대앞 극동방송국 옆
극동방송국 삼거리에서 조금만 가다보면 기업형 포장마차가 하나 나온다. 새벽 한시건 두시건 사람들이 빙 둘러 떡볶이를 먹는 모습은 장관이다. 내가 홍대앞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그곳은 말이 포장마차지 종업원 두명을 거느린 대형 떡볶이집이다. 늘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고 서있을 자리조차 없지만, 한번 가본 사람은 반드시 그곳을 다시 찾는다. 술을 먹고 집에 가기 전에 먹으면 최고다. 주인이 워낙 바빠서 사람들이 뭘 얼마나 먹었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손님들이 먹었다고 하는 만큼만 돈을 받는데, 맛이 워낙 탁월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지?). 강남에서도 그걸 먹으러 온다는 소문도 있고, 포장도 많이 해간다.

앞의 두곳이 추억에 의해 과장되었고, 뭘 먹어도 맛있는 성장기였던 이점이 있기에, 진정한 떡볶이의 지존은 바로 이곳이다. 10점 만점에 11점. 게다가 앞의 두곳과 달리 이집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먹을 수 있는, 즉 현실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게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처음 그곳을 갔을 때, 난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2차로 맥주를 마신 뒤였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무슨 떡볶이냐면서 끌려갔는데, 처음에 오뎅을 한개 먹어보고 기절할 뻔했다. 그러고나서 오뎅을 연속으로 7개나 먹었으니,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만하다. 입에서 녹는 떡볶이를 봤는가? 그집이 바로 그렇다. 거기 다녀온 후 난 한동안 입맛을 잃고 방황하기까지 했다.

홍대 근처에 누가 놀러오면 난 꼭 그집에 데려가고, 백이면 백 칭찬을 들었다. 그집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왕창 먹게끔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이건 관계없는 얘기지만 물도 좋아, 늘씬한 미녀들과 부딪혀 가며 떡볶이를 먹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옛날 돈을 많이 벌어서 <낙산가든>이나 꽃등심으로 유명한 청담동 <무등산>을 인수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 떡볶이집을 인수하고 싶다. 그집만 인수한다면 여느 갈비집이 부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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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7-14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도 기억이 나네요. 떡뽁이 먹고 잡다ㅠ.ㅠ
 

 

 

 

"내가 고등학교 때는 말을 안듣는 얘들보고 양손으로 전선을 잡게 한 뒤 전기충격을 주기도 했어"
선배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난 정말 놀랐다. 어떻게 그런 선생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전기충격이란 게 처음 듣는 소재기에 섬뜩했을 뿐이지, 그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한 폭력은 나 스스로도 수없이 목격했던 터였으니까. 각목이 부러질 때까지 두들겨 패거나, 맞아서 넘어진 학생을 발로 짓밟는 행위가 전기충격보다 덜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출석부의 각진 부분으로 머리를 맞아 피가 나거나 따귀를 맞다가 고막이 상하는 일은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문학평론가 박철화의 말이다. "나는 유소년기에 있어서 체벌 지지자이다. 나는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어린이들의 체벌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한 적이 있다. 물론 처벌이 꼭 구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체벌은, 유감스럽게도 언제나 구타를 의미했다. 난 부모든 선생이든 누군가를 때릴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긴 해도 하나의 인간인 이상, 존중받아야 마땅한 게 아닐까. 교육이란 건, 지식의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지식을 매개로 시혜자(전달자?)와 수용자간에 소통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전달자와 수용자는 서로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한 건 물론 아니며, 둘 사이에 폭력이 개입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아는 학교 선생님 한분의 말이다. "체벌이 없다면 학생들의 통제가 되지 않는다"
교육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타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피치 못하게 구타를 하는 경우라도 구타가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좀더 나은 대안이 없는지를 연구해야 하겠지만, 구타를 하는 선생님들로부터 그에 관한 고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너무도 안일하게 폭력의 유혹에 굴복해 왔고, 그건 우리가 '선생님들'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 모든 부정적인 해악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효과가 있다면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은 단기적이고 미미한 효과만 거둘 수 있을 뿐이다. 수십년간 폭력이 용인되었던 결과가 오늘날의 '교실붕괴'라면, 이제 그 방법은 용도폐기되어야 하지 않는가?

미숙한 상태에서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는 폭력을 스스로에게 내면화시키게 되고, 폭력에 둔감해진다. 나아가서는 자신이 별다른 죄의식 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얼마전 살인 피의자가 검찰 조사 중 사망한 사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물들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토록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폭력의 도움 없이는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은 교사 스스로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없다. "체벌을 금지하니 교실붕괴가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체벌이 그렇게 좋으면 니 자식이나 x나게 두들겨 패 훌륭한 사람 만들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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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감. 최근에 체벌 금지법 생기니까 무슨 학교가 붕괴될듯이 호들갑 떠는거 웃기더군요.
 

 

 

 

조교선생 하나가 내방에 왔다. 냉장고에서 식혜를 꺼내줬더니 심심하다며 놀아달란다. 잠시 생각하다 엊그제 쓴 <당신의 고환이 흔들리고 있다>를 니맬며 내가 쓴 글인데 어떤가 읽어봐 달라고 했다.

다 읽고 난 그녀: 유치한데요?
나: 이런 식으로 여러 개 써서 책으로 낼건데, 그럼 안팔릴까?
그녀: 당연하죠.

그녀는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얘기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 역시 입에 발린 찬사가 아닌, 그런 솔직한 대답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거였다.
"뭐냐? 유치하다고 비난이나 하고. 그 책이 뜨기만 해봐라. 너랑 절대로 아는 척 안할거야"

20대 때까지만 해도 난 솔직한 친구를 좋아했다. 술을 얼떨떨하게 마시고는 "넌 정말 나쁜 놈이야!"라고 말해주는 그런 친구.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난 그 친구는 참 좋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진지하게 날 추궁하는 친구가 어렵게 느껴진다. 날 볼 때마다 히히 웃기나 하고, 우스개 소리나 찬사를 늘어놓는 그런 친구를 만나고 싶다. 높아진 사회적 지위 탓인지, 30을 훌쩍 넘겨버린 나이 때문인지 날 비난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픈 맘이 별로 없다.

'유치하다'는 조교선생의 말은 사실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 게 난 싫다. 30대 중반에 일개 선생에 불과한 내가 이럴진대 나보다 나이가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어떨까.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우리 나라 대통령들이 인의 장막에 갇힌 채 실정을 일삼은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내 안에 있는 이런 권위주의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교 때 그랬던 것처럼 "난 인간이 아니다. 인간 이하다"라고 자기 최면을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걸까. 청바지를 입고 아이들과 어울려 신세대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권위주의가 극복되는 건 아닐게다. 권위주의라는 게 어차피 극복될 수 없는 거라면, 그걸 이용해서 어떤 좋은 일에 응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겠다. 그런 게 과연 뭐가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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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7-14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씁쓸해지네요ㅠ.ㅠ 그나저나 당신의 고환이 흔들리고 있다. 크하하하

3 2011-05-2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ㅋㅋ 공감 저도 한번 공포소설 비슷한거 쓴거 보여줬더니 "시시하다 이건 킬링타임용으로도 안될거 같다."그러길래 "니가 무슨 평론가냐?"하면서 싸닥션 날릴뻔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