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라는 소녀가 쓴 일기로 구성된 <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를 읽다보면 드레퓌스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프랑스 공화국의 기틀을 만들었던 그 사건이 귀족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줄리의 일기다.

[드레퓌스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요즘은 어디서나 이 사건이 화제가 되어 시끄럽다. 만일 그 남자-드레퓌스-가 무죄임에도 벌을 받는다면 매우 무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152쪽)]

20세의 소녀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까닭은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반유대 정서에 빠져있던 당시의 언론들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신문이라고 해서 얼토당토 않게 반유대 감정을 조장하지는 않는 법,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반유대정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유명한 화가였던 르느와르의 말이다.
"(유대인들이) 여러 나라에서 쫓겨난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니까. 그들이 프랑스에서 어떠한 지위도 가지지 못하도록 해야 해. 드레퓌스 재판을 백일하에 드러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개할 수 없는 경우도 많고,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157쪽)"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측에서 재판결과를 밝히라고 요구한 건,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증거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명백한 진실에 귀를 막고, 이렇게 말한다.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다시 줄리의 일기다. [르느와르 아저씨는 유대인의 특성은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그렇다(168쪽)]
스무살짜리 여자애가 이런 잘못된 편견에 빠져있는 건, 우리나라에서 호남인에
대해 갖고있는 편견을 연상케 한다. 그런 편견은 확대재생산되어 움직일 수 없 는 사실이 되며, 그 사실은 다시금 호남 사람들을 옥죈다. 내 친구의 말이다.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돈을 안주더라. 그래서 알아봤더니 호남사람이야. 이런 경험이 꽤 많아"
호남 차별론자들의 한정된 경험은 기존의 편견을 고착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던 광주항쟁도 그들의 눈에는 "공산집단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반란" 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 루베-프랑스 대통령으로 드레퓌스파다-가 달걀세례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국가원수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에 대해 반발하기 시작했다. 드레퓌스파 신문은 '귀족계급의 봉기, 왕당파의 음모'라고 썼다. 이런 식으로 얼토당토 않은 사실을....어쩌고.... 공화국 대통령이 이런 모욕을 당했다니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루베는 유대인 동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결코 사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 모욕에 사임을 할 사람이라면, 당선 한시간도 지나기 전에 그만두었을 것이다(222쪽)]

유대인을 옹호하는 대통령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 대통령에게 그러는 것처럼. 잘난 보수 층으로서는 대학도 안나온, 그리고 말투가 천박한 대통령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집권한 지 불과 몇개월이 지났지만 벌써 이런 말들이 나온다.
"군사 쿠테타를 해야 한다" "임기를 못채우고 물러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그들의 희망 사항이다. 도대체 왜 그들은 노무현이 못마땅한 걸까. 조선희에 따르면 디제이 정권 5년은 3김 청산도 하고, 그간 독재 때 당한 애들이 한풀이를 하는 기간이라고 넘어갔지만, 당연히 자기들 것이 되어야 할 정권이 또다시, 그것도 품위라곤 없는 노무현에게 패배를 하자 인내의 한계에 달한 거란다. 그래서 그들은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를 물고 늘어지며, 국가 위기를 부채질한다. 정권이 몰락하기만 한다면 나라야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그들의 결의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드레퓌스 사건 때 프랑스 언론들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듯, 지금의 언론들은 북핵 위기를 고조시키고, 경제위기설을 퍼뜨려 경제 침체를 더더욱 부채질한다. 100년 전의 프랑스와 2003년의 한국은 너무도 똑같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지식인의 위상을 새로  정립했던 에밀 졸라가 있었던 반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미 보수언론의 품안에서  허우적대며 자신의 학문적 양심에 반하는 글들을 써재낀다. 드레퓌스가 결국 무죄를 선고받으며 프랑스에 정의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 준 쾌거를 우리나라에서 재현할 것 같지 않다는 게 바로 그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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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교보 사이트에 가 봤다. 내가 교보를 배신하고 알라딘에 갈 때와 똑같이 인터넷교보는
여전히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듯했다. 교보에도 인터넷교보라는 팀이 꾸려져 있지만,
교보라는 곳이 원래 오프라인 서점으로 출발한 탓에 인터넷에서는 알라딘의 적수가 되기는
어려운 걸까? 오프라인의 우세를 온라인으로 확장시키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지금이야 교보가 최강이지만, 인터넷서점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는 걸 교보는
모르는 듯하다.

모니터요원을 하면서 난 독자서평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같은 모니터요원 한명이
"독자서평이 뭐가 중요하냐"고 했지만, 난 인터넷에 자기 이름으로 된 서평을 남기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심리를 십분 이해한다. 서평들이 정리가 전혀 안되어 있는 교보에 비해, 알라딘의 서평
시스템은 정말 기가 막히다. 서평을 쓴 사람의 이름을 클릭하면 그 사람이 썼던 서평이 몽땅
나오는데, 최근에는 아예 '나의 서재'가 만들어져 그가 알라딘에서 한 모든 것들을 담을 수 있다.
그 서재를 통해 독자들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광경은 서점이 사회적 소통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옛날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알라딘은 최근 서재에다
게시판의 기능까지 추가해, 소통 기능을 훨씬 업그레이드했다.

교보가 아무 것도 안한 건 아니다. 쥐꼬리만한 예산을 투자해 교보가 준비한 것은
'쩜책 이벤트'다. 인터넷 URL에다 '박완서.책'이라고 한글로 쳐 넣으면, 바로 교보 사이트로
연결되며 박완서의 책이 몽땅 불려진다. 매우 획기적으로 생각되는 이 서비스를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모르는 듯. 그도 그럴것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즐겨찾기를 통해 사이트에 접속하지
일일이 URL에 주소를 쳐 넣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교보는 괜한 일에 돈만 썼을 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두 서점의 차이는 독자서평에서 드러난다. 베르베르가 쓴 <나무> 한권을 놓고
볼 때, 교보에 올라온 서평은, 신설된 30자 서평까지 합친다 해도 70개를 넘지 못하는 반면,
알라딘에는 188개의 서평이 올라와 있다. 교보는 서평의 갯수를 가지고 시상을 하지만, 알라딘은
서평의 질을 따진다. 교보에 실린 서평 중 <이회창 대통령은 없다>는 책에 어떤 이가 이런 서평이
달렸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저같은 말없는 다수는 이회창님을 응원합니다. 화이팅!"
이런 서평은 교보에는 실리지만 서평을 심사한 후 게재를 결정하는 알라딘에는 실릴 수 없다.
서평 10편당 5천원의 상품권을 주는 것도, 좋은 서평을 많이 쓴 사람에게 '명예의 전당' 회원증을
주는 것도 독자들의 욕구를 부채질한다. 참고로 내가 서점을 하게 되면 고액에스카우트하고픈
분인 '서울의 평범한 여대생'은 현재까지 쓴 서평이 400개가 넘는다(서평 하나하나의 문학성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다).

좋은 배송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알라딘이다. 지하철 역마다 모닝 365의 해피샵이
만들어졌을 때, 난 정말 좋은 의견이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때 교보 측에 이런 글을 남겼다.
"교보도 저런 아이디어를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좋을까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라딘에서 집근처 편의점을 통한 배송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난 더더욱 감탄했다.
언제 어느때고 찾을 수 있는 것도 그렇고, 배송시 천원을 깎아준다니! 집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
많아 그간 다른 집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그간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저 환호작약할만한
일이 아닌가. 다 같은 머리일텐데 알라딘은 되고, 교보는 안된다. 지금이야 교보가 최강이고,
당분간은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재미를 포기할 수야 없겠지만, 공짜로 책을 읽고파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박대하는 교보 강남점을 보면서 교보가 일등할 날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공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서점이
어찌 잘될 수가 있겠는가. 공룡이 왜 멸망했는지 그 이유를 교보는 곰곰히 새겨야 할 것같지만,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한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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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3-11-26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가끔.. 마태우스님의 서재에 들리는 찌리릿이라고 합니다. ^^ 첨에.. 홍세화선생의 <빨간신호등>의 리뷰를 통해 들어오게되었습니다. 리뷰를 보고 `아... 코드가 맞는 사람 만났네...`했습니다. 요즘 제 취미가 제가 좋아하는 사회.인문학 서적을 통해 서재를 즐겨찾기 해놓는거거든요.

저는 알라딘 웹기획팀에서 나의서재와 같은 웹서비스나 페이지, 이벤트 기획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보는 알라딘은 이길 수 없다`는 제목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건 오늘도 그랬지만.. `어떻게 하면 "의미있는" 인터넷서점이 될 수 있을까?`, 좀더 처절한 의미에서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터여서 더욱 와닿았습니다.

인터넷서점으로서의 `알라딘`은 각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출로 따지면야 예스24가 1등이고, 교보가 2등입니다. 알라딘은 그 뒤지요. 그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알라딘은 그래도 `서비스 최고`를 실현하겠다는 자부심과 꿈을 가지고 5년을 일해왔습니다.(사실 그저께가 5주년 기념이었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경제 전반이 그렇겠지만.. 매우 시장 상황이 좋지않고, 인터넷서점은 더더욱 힘든 때입니다.

그런 시점에서 알라딘을 제대로 이해해주시는 분을 만나 너무 고마웠습니다. ^^ (칭찬해주면 좋아하고.. ) 저희가 인터넷교보나 예스24에 배울점이 참 많습니다. 사실은 `왜 우리는 그들처럼 못할까..` 라는 생각을 하루에 열두번도 더 한답니다. ^^

알라딘에 장점을 느끼시는 분들이 오히려 더 겁이 납니다. 실망시키지 않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해드려야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알라딘에 각별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예스24나 교보문고에도 그런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겠지요.(수적으로 따지면 더 많을지도..) 하지만 알라딘은 `알라딘이 없어지면 어떻하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각별한` 서비스를 하는 인터넷서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진정으로 최고의 인터넷서점이 되어야겠지요.

푸념과 희망이 교차하는 회사동료들과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서재를 돌아보면서... 만난 글이 저에게 용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몇자 적어봤습니다. 그럼.. 종종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싸이런스 2006-07-14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서재 첫 댓글?
 

 

 

 

내가 휴대폰을 처음 가졌던 96년, 휴대폰은 그 자체로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휴대폰 예절이 정착되지 못한 그시절, 공공장소에서 "난데!"라면서 큰소리로 전화를 걸 때면 사람들은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저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을게다. 휴대폰은 그 이전에 통신세계를 지배하던 삐삐가 가지고 있던 불편함을 일거에 해소시켜 준 혁명이었다. 휴대폰의 대중화와 더불어 삐삐는 급격히 사용자가 줄어들었고, 싼 가격으로 그에 맞서려던 시티폰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처음 휴대폰은 정말 무거웠다. 주머니에 넣으면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할까. 초창기 휴대폰 개발이 사이즈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은 당연했다. 휴대폰은 급속히 작아졌고, 유행이 지난 휴대폰은 '무전기'라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가벼움을 과시하려는 듯 사람들은 전화기를 목에 걸거나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휴대폰이 더이상 작아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컬러 휴대폰이 나왔다. 차태현과 안성기가 화면에 나와 "난 컬러로 쏜다"고 외쳐댔다. 하지만 난 컬러화에 대해 시큰둥했다. 컬러라고 해서 좋을 게 도대체 뭐가 있담?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말도 안되어 보이던 기능이 휴대폰에 장착되기 시작했는데, 그건 바로 디지털 카메라였다. 디지털 카메라의 용도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접촉사고가 났다든지, 놓치기 싫은 순간을 포착하고자 할 때 디카만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언제 올지 모르는 순간을 위해 디카를 가지고 다니는 건 불편하지만, 휴대폰이야 늘상 갖고 다니는 게 아닌가.

물론 지금의 화질로는 휴대폰이 디카를 이길 수 없다. 디카의 화소가 300만-500만인 데 비해, 얼마 전 개발된 삼성과 큐리텔 카메라폰의 화소는 겨우 130만 정도. 하지만 2년 안에 300만화소가 넘는 카메라폰이 나올 예정인 것을 보면, 카메라폰이 디카를 이길 것은 거의 확실하다.

사실 휴대폰은 각종 기기와의 싸움에서 번번히 승리해 왔다. 정확한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젊은 애들이 시계를 안차도 되게 만들었고, 한때 엘리트의 표상이던 전자수첩 역시 휴대폰이 나오면서 사라져 버렸다. 요즘은 게임도 인터넷으로 하는 실정인데, 큐리텔에서는 그래서 게임만 전문으로 하는 게임폰도 개발 중이란다. 심지어 mp3 기능까지 내장한 전화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mp3가 퇴출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게 아닐까?

휴대폰 개발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다. 안성기가 열연했던, 음성을 인식해서 전화를 걸어주는 "본부! 본부!" 시리즈는 별반 반응을 얻지 못했고, 018에서 야심작으로 내놓은 두번호 전화기도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지금은 듀얼폴더가 당연한 것 같지만, 처음 나온 휴대폰은 뚜껑도 없는 거였다. 폴더형이 나오면서 밋밋한 휴대폰은 퇴출됐고, 그건 듀얼폴더에 자리를 양보했다. 얼마 전 나온 스카이를 보니 폴더를 밀어서 열던데, 그건 특이한 면은 있지만 사용에 불편해 보편화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 쓰는 휴대폰은 그러니까 시장에서 선택된 것만이 살아남은 결과인 셈이다. 그런 멋진 휴대폰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내 휴대폰은 아직 흑백에, 단음이다. 48화음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벨소리가 나는 휴대폰이 부럽기 짝이 없지만, 뭐 어떤가. 전화만 잘 걸리면 되지.

* 마지막 말은 지금이니까 하는 소리고, 이제 곧 나도 카메라폰이 생긴다. 그때가 되면 이럴 거다. "카메라폰 없는 애랑은 전화하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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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만 해도 '발' 하면 별로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진 않았다. '발고랑내',' 족발 치워!'  '개발에 땀나게' '새발의 피' '발랑 까졌네' 등등...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발'이 떴다. 발에 인간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있고, 발이 튼튼하면 오장육부가 튼튼해진다고 해, 발마사지 열풍이 장난이 아니다. '다나몰'이라는 사이트에서는 각양 각색의 발마사지 기계를 79,000원에서 199,000원에 팔고 있고, '크리스찬 바바라'에서는 1급 발마사지사라는 사람이 출장마사지를 해준단다.

공부를 해보니 '발'이 중요시된 건 요즘의 일은 아니란다. 크리스찬바바라 사이트에 나온 설명을 요약한다.
[중국의 오래된 의술책엔 발이 '제2의 심장'이라고 되어 있고, 삼국지에도 나오는 명의 화타가 만든 '족심도'는 오늘날까지도 전해 진다...피트제럴드라는 미국 의사는 1913년 'Foot zone therapy'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고, 독일 의학자는 발건강법을 개발, 일반인에게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10년 전부터 한양대병원과 영동세브란스 재활의학과에 '족부변형 클리닉'이 생겨 전문적인 발 치료에 눈을 돌리고 있다]

어설프게나마 의사면허증이 있는 처지라 한방 냄새가 물신 나는 발건강법을 마냥 추종하긴  싫었는데, 영동세브란스에 발 클리닉이 있다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그 병원 사이트를  들어가봤다. 그랬더니 족부변형 클리닉 대신 '발 통증 클리닉'이 있는데,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
[족부의 통증, 변형, 그리고 불편감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여 ...약물치료 및 물리치료를 시행하고, 변형된 발을 교정하기 위해 신발 및 보조기를 처방하고...수술을 의뢰하는...발만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치료하는 클리닉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크리스찬 바바라의 설명처럼 발 건강법을 시행하는 게 아니라 발의 기형을 치료하는 곳이다. 혹시나 하고 들어간 한양대 병원도 '발클리닉'이 있긴 하지만 기능은 같다. 그럼 그렇지. 양방에서 발마사지를 해줄 리가 없지.

물론 한방이라고 다 무시할 건 아니다. 나도 삔 곳이나 뇌졸증 등에는 한방이 더 효과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경희대가 그렇듯 미래에는 양방과 한방이 서로 협력하여 환자를 치료해 나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한의대의 커트라인은 이미 의대의 그것을 넘어섰고, 심지어 의대를 나오고도 한의대를 다시 들어가는 사람이 생길 정도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긴 해도 난 한방에 대해 일정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 비싼 돈을 주고 지어주는 보약이 과연 효과가 있느냐부터, 아픈 부위와 통증의 성질은 다른데 왜 다 비스무레한 약을 지어 주느냐, 사슴뿔이 그렇게 몸에 좋다면 사슴은 그럼 무병장수하느냐 하는 딴지성 의문까지, 한방에 대한 나의 불신은 뿌리가 깊다. 내가 불신하든 말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양의보다 한의사를 더더욱 신뢰하는 것같다.

그게 우리 특유의 '신토불이' 정신 때문인지, 아니면 허준이 쓰고 MBC에서 방영한 <동의보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 양의가 잘못한 게 많아서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건....아무리 생각해도 발마사지는 미신 같다. 오래된 중국책에 써 있다고 다 진실은 아니잖는가?

내가 가끔 산책을 가는 여의도 공원에는 발을 지압해 주는 코스가 만들어져 있다. 밤이 깊은 시각에도 많은 이들이 맨발로 오돌토돌한 길을 걷는데, 오래 전에 발마사지 자격증을 따신 우리 어머님은 그곳의 매니아로, 한번 가셨다 하면 열바퀴가 넘도록 그 길을 걸으신다. 나한테 해보라고 계속 권해서 큰맘먹고 한바퀴를 돌았는데, 너무나 아팠다. 아파하는 날 보던 어머님의 말씀, "그게 니가 건강하지 않아서 그래" 과연 그럴까? 그 다음에 돌 때는 그보다 훨씬 덜아팠으니, 하루 사이에 내가 건강해진 거란 말인가? 우리 어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엉터리다!

그 길 한쪽엔 표지판이 있는데, 발 모양이 그려 있고 위치별로 지압을 했을 때 어디를 좋게 하는가가 나와있다. 복잡하기 짝이 없어 보다 말았는데, 발을 지압하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면 모르겠지만, 당뇨, 심장병, 암 등 모든 병을 다 예방할 것처럼 선전해 놓은 게 영 미덥지 않다. 발마사지, 그놈의 정체는 과연 뭘까? 최소한 좋긴 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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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1.3이던 출생률이 1.17로 줄어들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출산률 저하의 원인은 여성과 아이에 대한 사회적 투자가 없다는 거다. 미국의 유수기업들은 회사 내에 보육시설을 갖추고 있던데, 우리나라는 어디 그런가?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인색하니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기도 하고, 남편 월급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크게 늘고 있지만, 그걸 뒷받침해주는 시스템은 지극히 낙후되어 있다.
애 봐주는 사람을 쓰면 좋겠지만 그 비용이란 게 장난이 아닌지라, 여성이 직장에 나가려면  맘좋은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의 희생이 뒤따른다.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다. 어린이는 나라의 기둥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애 때문에 일찍 가봐야 한다고 하면 "역시 아줌마는 안돼"라면서 화를 낸다. 육아휴직을 신청하면 한달에 20만원의 껌값을 준단다 (처음에는 10만원이었지만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20만원으로 인상했다). 돈도 돈이지만, 요즘같이 고용이 불안한 와중에 어느 누가 배짱좋게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을까? 출산율 1.17은 이런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소리없는 파업이지만, 정치권에서 나오는 대책이란 게 기껏해야 "육아휴직 수당을 십만원 인상한다"는 정도인 걸 보면 문제의 핵심이 뭔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것같아 안타깝다.

여성의 75%가 직장생활과 출산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다는 민우회의 조사처럼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돈 얼마를 더주는 게 아니라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것, 지금처럼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포기해야 된다면 애를 포기하는 여성의 수는 점점 늘어나지 않을까? 

신문을 보니 출산율 저하의 원인을 높은 사교육비로 보고 있다. 셋을 낳으면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못할 테니, 하나, 둘만 낳아서 제대로 가르쳐 보자는 심리,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건 애를 안낳는 여성이 증가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미국의 예를 보자. 미국은 전체 인구 중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줄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히스패닉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주로 저소득층을 형성하고 있는 히스패닉은 여자 혼자서 아버지가 각기 다른 애를 여럿 키우는 가정이 많단다. 왜? 애 한명당 정부에서 일정 정도의 보조금이 지급되니까. 일을 하면 보조금이 깎이는지라 나가서 일을  하느니 애를 다섯쯤 낳아서 보조금을 받는 쪽이 훨씬 더 좋단다. 하지만 그들은 그 돈을 애  키우는 데 쓰는대신 마약과 알콜로 탕진하는데,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돈을 주는 건 이런 위험성이 있다. 역시 좋은 건 애가 있어도 안심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며, 이를 위해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더. 한겨레를 보니 독자투고에 어느 여성분이 쓴 글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은 이미 6살짜리 딸과 3살된 아들이 있는데, 올 12월에 세째 아이를 출산한단다.  주위에선 뭐그리 많이 낳냐고 하지만, 자기는 사교육도 무리해서 시킬 생각이 없단다. 아이들과 상의해서 진정으로 원할 때만 시킨다나. "남들이 하니까 하는 식의 사교육병도 고쳐야" 한단다.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출산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는 시대에 세번째 애를 낳겠다고 하고, 역시 사회문제의 하나인 사교육 열풍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소신을 지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다고 남들에게도 그런 걸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저출산 사회"이니 "주부들의 의식변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이분이 과연 몇명이나 애를 낳을 생각인지, 낳은 애들이 전부 남들만큼 사교육을 시켜 달라고 조르면 어떻게 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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