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부교수 승진하는 해다. ‘승진하는’이라고 했지만 사실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올해 쓴 논문 하나가 너무 늦게 학술지에 실리는 바람에 그 점수가 포함되지 않은 게 뼈아프다. 기준을 충족 못시키면 어쩌나 싶어서 점수가 되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있다. 작년 말 기간제 임용을 통과한 감격이 아직도 귓가에 선한데, 왜 승진 날짜가 이리도 빨리 다가온담. 승진을 못하면 기간제의 통과가 무효가 되어, 매년 재임용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 기간 중 업적이 안되면 무조건 잘린다). 만년 조교수로 남고 싶은데 세상 일은 왜 마음같이 안되는 걸까. 학교 회의 때 학장님한테 이랬다. “제가 승진이 안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승진심사 일정을 알려온 직원한테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요.”


학교 회의를 하던 중 작년도 재임용 탈락자가 무려 12명이라는 보고가 나왔다. 모두 임상 교수다. 그 말을 들은 학장의 말.

“임상 선생이 진료하면서 연구까지 하는 게 좀 어렵지. 진료 실적도 연구점수에 포함되도록 학칙을 개정할 거야.”

순간 생각했다. 나도 진료가 하고 싶다고.


병원 소속으로 되어 있는 병리학을 뺀다면 기초 과목 중 기생충학은 가장 진료와 가까운 과목이다. 그러니 기생충전문으로 병원에 진료과를 개설하는 거다. 환자는 별로 없겠지만, 전단지를 뿌리면서 기생충의 위협에 대해 홍보를 하면 그래도 몇 명은 올 거다. 기생충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나이드신 분이 얼마나 많은가. 그분들에게 대변검사와 피검사, 그리고 피부검사를 병행하면서 내가 자신있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준다면 좋지 않겠는가. 물론 대부분은 기생충에 안걸렸겠지만, 몸에 기생충이 없다고 선언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민의 일부가 풀리니,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의학의 본래 목적에 맞지 않을까.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하다. 왜 나는 연구를 열심히 할 생각은 도저히 안하는 걸까. 학교 일이 부쩍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그게 면죄부는 될 수 없다. 8월까지는 계속 일이 바쁘니 그 이후부터 돈이 안들고 결과는 참신하면서도 금방 끝나는 멋진 일들을 한달에 하나씩 해나갈 생각이다 (이 말, 작년과 재작년, 재재작년에도 했었다). 그게 아니면 매주 사는 로또라도 걸리던가. 로또가 되고 나서 잘리는 걸 미리 알았을 때 “능력에 비해 자리가 너무 과분하다”고 사표를 던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멋지지 않는가. 언젠가 과기대 교수가 그렇게 했을 때 사회적으로 얼마나 찬사를 받았는가를 생각해보자. 그래, 길은 진료가 아니라 로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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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6-05-23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까 마태님께는 진료가 더 어울리네요. 환자들한테 인기짱인 교수님이 되셨을 텐데요.

마태우스 2006-05-2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미녀 환자를 넘 좋아해서 안될 것 같은데요^^ 말씀 고마워요

해적오리 2006-05-2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전 또 기생충 약 먹으라는 말씀 하실줄 알았어요.
저의 단순함의 한계입니다...
저도 딱 대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합니다. 월급은 올라가면서 직급은 대리에만 머문다면 정말 좋겠어요. ^^;;;

물만두 2006-05-2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가운입은 모습 보고 싶네요^^;;; 진료하시는 모습으로다가...

비로그인 2006-05-2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또가 되고 나서 잘리는 걸 미리 알았을 때 “능력에 비해 자리가 너무 과분하다”고 사표를 던지는 모습'이라니, 그저 책상위에 포스트잇으로 `안녕'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고 그게 어디든 간에 제가 속한 집단을 나가고 싶다는 것과는 또 다른 것 같아 웃다가도 슬퍼지려 합니다. 열심히 하시느라 알라딘 서재질도 한동안 잠시 뜸하셨다는 걸 다 압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을 이리 하시는지요.

paviana 2006-05-23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Jude님 멋지세요..포스트 잇으로 '안녕'이라니....
섹스앤 시티가 생각나네요.ㅎㅎ

세실 2006-05-23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합병원에 기생충학과도 괜찮을것 같은데요~~ 저두 갈래요..요즘 배에 가스가 차는것이..혹시....

비로그인 2006-05-2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OR paviana님
아마도 회사 다니기 싫은 직장인의 진정한 로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섹스앤 시티에서 버거가 캐리에게 결별한 방식이지요. 저는 그저 구구절절이 늘어놓지 않고 그냥 딱 `안녕’이라고 두 글자 써놓고 사라지는 걸 택하렵니다. 후훗.

다락방 2006-05-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야 할 길도 로또에 있는것 같아요. ^^;;

비로그인 2006-05-2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회사 맞은편 회사의 직원 두 명이, 어느날 사내연애를 몰래 시작해서 결혼을 하더니, 신혼여행으로 하와이인지 발리인지, 어느 섬으로 가서는 그곳에서 그곳의 복권에 당첨되어 아예 이민을 가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러면서도 로또는 하지 않고..후훗)

클리오 2006-05-23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또 좋아요.. 근데 하여간 이 계절만 되면 잘릴지 모른다는 마태님의 엄살을 듣다니.. ㅋㅋ (엄살이라 믿을께요.. ^^)

moonnight 2006-05-23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은 로또예요? ^^; 직장동료가 선물한 로또 두 장, 아직 안 맞춰본 상태로 책상위에 있어요. 계속 맞춰보지 말까봐요. 이 로또가 당첨됐다면. 하는 상상이 더 기분좋은 듯 해서. ^^ 흠. 마태우스님은 진료도 정말 잘하실거란 생각 드네요. 환자분들께 인기만점인 의사. ^^

Mephistopheles 2006-05-2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길은 진료가 아니라 로또에 있다. -
명언중에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끔 직원들이 이 월급받고 집사고 차사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투덜거리면 로또만이 살길이다...!! 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늘바람 2006-05-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무엇을 해도 멋지실 것같아요 그런데 마태님 덕분에 모든 의사가 다 미녀를 밝히리라 생각되는 건 ^^

춤추는인생. 2006-05-23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저도 흰가운 입은 마태님 보고싶어요.
나이드신분 손 꼬옥잡고 친절하게 설명하실것 같다는^^

하루(春) 2006-05-23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형부도 저만 보면 로또 한 번 사보자고 하는데...
전 뭘 믿고 여지껏 로또도 한 번 안 사봤나 몰라요.

울보 2006-05-24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도 인기많을듯해요,,

마태우스 2006-05-24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아이들과 노는 거야 원래자신있지요^^
하루님/로또,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가판대로 가시어요^^
춤추는 인생님/그, 그럴까요 제가? 같이 오신 젊은 여자분의 손을 꼬옥 잡고 나이드신 분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을까요^^
하늘바람님/앗 제가 미녀를 밝힌다는 걸 어케 아셨나요?? 부끄러워라...
메피님/그전 복권은 당첨되어도 그만둘 수가 없었지만, 로또는 정말.... 근데 그전 복권이라도 한번 당첨되면 좋겠다는...^^
달밤님/귀염성과 해박함이 어우러진 달밤님만 하려구요^^ 그 로또, 일정기간 지나면 상금이 지급 안될 수도 있으니 유효기간 넘기지 마시어요^^
클리오님/님 말씀을 듣고보니 제가 이 컨셉으로 8년째 버텨온 것 같군요. 근데 이번엔 진짜라는....ㅠㅠ
주드님/오오 넘 아름다운 얘기군요^^ 현지인도 되기 힘든 걸 관광객이 되다니, 한민족의 우수성이 여기서 발휘되나봐요
다락방님/그나저나 요즘 님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가요? 제게 말씀만 하시면 당장.....
세실님/미녀와 기생충은 사실 별 상관이 없지요. 넘 걱정 마세요!!
주드님/나름 최선을 다하는데요 갈수록 서재질이 뜸해져요 요즘은 새벽이 컨셉이죠^^
만두님/가운 입어도 전 의사 티가 안납니다 이발소 아저씨 같죠^^
해적님/저희 직종이야 월급은 연수에 따라 올라가니, 조교수가 딱 좋아요. 근데 나이 들어서 조교수라면 좀 없어 보이긴 하겠네요. 올해 고비를 넘겨야 할텐데...

2006-05-24 0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1 2006-05-24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로또였군요. 로또 사셨는지요. 일단 사셔야 될지 말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모1 2006-05-24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엄마 꿈이 좋다고 로또 지난주에 사셨다가..몽땅 꽝이셨다는..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