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장님의 장점 중 하나는 술을 안드신다는 거다. 어제는 학과장 송년회여서 오리고기를 먹었는데, 끝난 시각이 놀랍게도 6시 56분이었다. 술을 권하지도 않고 2차를 가자고도 안하는지라 학장님과의 저녁은 언제나 부담이 없고 즐겁다. 이건 물론 내가 학장님과 친해져서 이젠 안무서워하게 된 탓도 있지만 말이다.

이촌동에서 약속이 있었기에 기차를 타고 약속장소로 갔다. 초등학교 동창 애들의 모임인데, 얘네들이 벌써 한판을 다 먹은 듯 로바다야끼의 테이블에는 빈접시만 가득했다. 친구 하나가 내게 소주를 권한다. 난 아무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셨다. 알콜중독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법 중 하나는 중독이 아닌 사람은 안주가 없으면 소주를 못먹는다는 것, 난 중독이 아니었다. 근데 얘네들은 왜 안주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안주를 안시키는 걸까. 새 안주는 안시키면서 "밑반찬 더주세요"만 외쳐서 그런지, 종업원들이 좀 비협조적이었다(젓가락 달라고 세번이나 말했는데 안주고 말이야...).

전에도 말했지만 내 초등동창 애들은 대부분 있는 집 출신이고, 지금도 다들 뭔가가 되어 있다. 스타 정신과 의사인 표모씨를 필두로 극장주, 호텔이사, 한의사 부인 등이 포진해 있는데, 재벌2세를 사칭하는 내가 가장 극빈자다. 걔네들이 안주도 없이 술만 먹고 있는 게 말이 되나. 김치에다 소주를 마시는 호텔이사한테 물어봤다.
"아니 너같은 사람이 어떻게 김치에 소주를 마시냐?"
그의 대답, "원래 김치에 마시는 소주가 제일 맛있는 법이야."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친구가 안주 두어개를 시킨다. 근데 막상 나온 안주는 내 손가락만한 물고기가 겨우 다섯마리. 우리 열명은 아무도 그걸 먹을 엄두를 못내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명이 한개를 집었고, 그 뒤에 한명이 또 한마리를 집었다. 남들은 그냥 새로 온 밑반찬-두부와 콩, 옥수수-에 술을 마셨다. 오리를 든든하게 먹은 나도 배가 서서히 고파왔다. 그때 친구가 시킨 오뎅탕이 왔다. 젓가락 20개가 일제히 날았고, 오뎅은 흔적도 없어졌다.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1인당 2만원만 내면 충분했다.
'이왕이면 3만원씩 내고 푸짐하게 먹지 말이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돈을 아까워할 애들은 아닌데 왜 그렇게 몸을 사린 걸까. 일부는 가고 남은 애들은 노래방을 갔는데, 노래를 별로 안좋아하는 나는 살짝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가다보니 김밥천국이 눈에 띈다.
"라면이나 먹고 가야겠다"고 했는데 안에 들어가니까 친구가 김밥을 포장하고 있다. 노래방에서 먹게 그런다나 뭐라나. 배고픈 건 다 똑같구나 싶었다. 아무튼 난 집에 가서 라면을 먹었고, 포만감에 젖어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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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12-27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된장찌개에 밥 말아 먹는 것이 소주 안주로는 최고입니다!

마늘빵 2005-12-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갑부들이 몸사린다니까 재밌어요. ㅋㅋㅋ

마태우스 2005-12-2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발렌타인날 뭐하세요? 혹시 일 없으시면 그날 저랑 보내면 어떨까요
숨은아이님/된장찌개만 있어도 행복했을 거예요 엉엉.

실비 2005-12-2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은 푸짐히 먹어야하는데 먹은기별도 없겠는걸요~

진주 2005-12-2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대주주님과도 비교가 안 될 으리으리하신 분들이 정말 짭짤하게 사시네요.허긴....그렇게 짜게해야 돈이 모이는 법이지.....끌끌...

moonnight 2005-12-2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먹을 땐 안주 푸짐히 시켜먹는 재미도 쏠쏠한데.. 너무하셨어요. ㅠㅠ 근데 집에 가서 드신 라면 무지 맛있었을 거 같아요. ^^

하이드 2005-12-2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곱창

비로그인 2005-12-2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가입되어 있었구나...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님이 쓰시는 서평 애독자입니다. 제가 다음 카페에서 알라딘으로 이사할까 생각 중인데... 선배님으로서 알라딘 서재의 장단점을 좀 알려주십시오. 초면에 불쑥 이런 부탁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보물창고 2005-12-2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있는 집이 더 하죠?
어느집은.. 아주~~ 부유한데요.. 자기 애는 1명.. 동서네 애는 2명인데..
설날.. 새배돈을 가지고.. 열받아 한데요..
동서네는 2배를 번다고..

마늘빵 2005-12-2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마태님 야클님이 들으면 서운해하세요. 저도 마태님처럼 '미녀'를 더 좋아해요. ㅋ

하루(春) 2005-12-2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학교 출신이시군요. 저희집은 다 그 밑 학교 다녔는데...

모1 2005-12-2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을 글을 보면서 마태님 집안도 만만치 않은 것이 아닌가..생각해 봅니다. 대주주님~~~

플라시보 2005-12-2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3만원씩 내고 좀 배불리 먹지. 있는 사람들이 정말 더 한가 봅니다. 혹시 그렇게 살아서 있는건가? 흐흐.

marine 2005-12-2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빗나간 얘기일수도 있는데, 대학 다닐 때 종합병원장 딸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찌나 돈 쓰길 싫어하는지, 검소함의 수준을 넘어서 거의 남에게 빈대붙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나중에 친해져서 살짝 물어 봤더니 한단 소리가, 난 남들이 나한테 얻어 먹으려고 덤비는 게 제일 싫더라, 그래서 일부러 먼저 사달라고 한다네요 ㅋㅋ
집에 돈 많다는 소릴 말던가 ㅋㅋ

2005-12-28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5-12-2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고마워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나나님/제 친구들과는 좀 경우가 다르긴 하네요. 하여간 특이한 분들 많군요^^
플라시보님/설마요. natural born booja는 대개 돈 잘 쓰던데..
모1님/아 저희 집안이요... 재벌의 기준을 겨우 충족시키는 정도입니다^^
하루님/어머나 정말 반갑습니다!!! 갑자기 친근감이 마구마구
아프락사스님/왜 저를 거부하시죠? 그날 님이 제 무릎 베고 주무신 거 기억안나요?
깡지님/신선한 이미지군요. 하여간 그날 무지하게 배고팠어요
칼님/님 방명록에 글 남겼습니다. 참조하시길...
하이드님/맥락에 맞는 댓글을 남깁시다^^
달밤님/밤중의 라면이 다이어트의 적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ㅠㅠ
진주님/내가 살테니 왕창 시키자,라고 하고픈 걸 참았다는...
실비님/꽃은 한송이로도 충분하지만, 안주는 하나 가지고는 안된답니다^^

Shaylor 2005-12-3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님
함께 곱창 + 은(silver)딱지 맥주 먹던 하이드 친구에염, 기억나실지

해피뉴이어

passy 2006-01-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과 술한잔 좋아하시나봐요...
"술일기" 재미있네요.. 살짝 취하고 이런저런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한 권 책 읽는 것처럼 집에 돌아올때 뿌듯하죠.. 얼마전 새로 나온 책인데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 술보다 더 매혹적인 술집 순례기
넥서스BOOKS이 출판사구요.. 지은이는 박미향인데.. 그 곳에
한번 가 보고 싶은 술집들 많더라구요.. 친구들에게
소스 제공하시고 술 한잔 거하게 한번 얻어 드심이 어떤지..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태우스 2006-01-0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살리토님/술한잔 하는 분위기를 아주 좋아하지요. 올해는 술보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르쳐주신 책은 꼭 사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술집 가르쳐줬다고 거하게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세일러님/아 기억나죠. 반갑습니다. 님도 여기 가입하셨군요!

OTL 2006-02-0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소한게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