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수업시간에 퀴즈를 내서 가장 많이 맞춘 학생에게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2’를 준 적이 있다. 우리 학생들이 책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문제가 나갈 때마다 “저요 저요!”를 외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건 꼭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 공짜 책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 느낌표에서 리포터의 질문에 답을 한 사람에게 서점에서 책을 원하는만큼 담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었다. 백이면 백, 사람들은 제목도 안보고 박스에 책을 쓸어담기 바빴다. 숨겨둔 책을 찾으면 보너스가 제공되니 그런 거기도 하겠지만, 그걸 보면서 생각한 건 이거였다.

“저 책들, 다 헌책방에다 팔지 않을까?”

고르고 또 고른 뒤 책을 사도 안읽는 책들이 생기는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책을 담으면 그가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안읽기 마련이다. 나 같으면 몇백권을 박스에 담는 대신, 제목을 봐가며 천천히, 잘해야 한 열권쯤 담았을거다.


예전에 교봉에서 모니터요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댓가로 교봉에서는 10만원 상품권을 주는 이외에, 주어진 신간 중 원하는만큼 책을 고르게 했다. 난 좋은 책을 먼저 고를 욕심에 모니터요원 모임이 있는 날이면 일찍 가서 책을 골랐고, 열권쯤 되는 책들을 종이가방에 담아 집으로 갈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책을 사놓고 안읽은 채 쌓아놓은 것들을 보면 그 대부분이 그때 쓸어담은 책이다. 읽을 책이 밀려있는 터라 공짜가 아니라면 고르지 않았을 그 책들에게는 읽힐 기회가 제공되지 못했던 거다.


그래도 ‘시골의사’는 어느 누구에게나 감명깊게 읽힐 수 있는 책이고, 또 학생들이 의사가 될 사람들이니 퀴즈에서 1등을 한 학생에게 그 책은 필경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주고 나서 애들이 보인 반응에 난 놀랐다.

“이거 말고 선생님 책 주면 안되요?”

책의 질적인 면에서 훨씬 나은 ‘시골의사’ 대신 내 책을 달라니, 난 그저 감격했다.

“저도요!” “저두요!” “말 싸인도 해서요!”

그 학생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책을 갖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난 내가 가르치는 본과 1학년생 모두에게 책을 주기로 약속했다.


수업이 있던 금요일 오전, 난 한시간 반동안 말을 그렸고, 학생 이름과 덕담을 써 넣었다. 처음 세명은 “좋은 의사 되시길.”이라고 적었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싫어하는 특유의 야성이 꿈틀거리는 바람에 이내 학생마다 다른 덕담을 적었다. “지성과 미모가 항상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기도 했고, “나중에 더 좋은 책 쓰시길.”이라고도 썼다. 그걸 수업시간 전에 하나씩 나누어 주는데, 마치 싸인회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교봉에서 싸인회를 할까 하다가 여건상 못했던 게 아쉬웠었지만, 엊그제 일로 인해 그 아쉬움은 모두 없어졌다. 유명저자도 아닌 나한테서 책을 받아들고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학생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 대학에 있다는 건 참 축복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학생들에게 내 책은 얼마나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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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1 2005-11-1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학생들이 모두 읽긴 할까요??? 제일 위에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 하다..라는 문장이 쬐끔..걸립니다. 그래도 사인본이고 교수님인데..보겠죠?

미완성 2005-11-1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과 1학년생들이 모두 책을 받았으니, 음......기말고사는 거기서 내시는 게 어떨랑가요;;

chika 2005-11-1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멍든사과님, 역시 훌륭한 의견이라고 생각됩니다! ^^

숨은아이 2005-11-1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느낌표에서 시간 정해놓고 그 안에 책 고르라고 한 건 정말 무식한 짓이었네요. 무작정 쓸어담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stella.K 2005-11-13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 마태님의 말싸인된 책 두 권씩이나 가지고 있으니 제가 알라딘의 회원이란 게 더 축복 아닌가요? 흐흐.
교봉에서 아직도 모니터 활동 하나요? 저도 나가보게...^^

▶◀소굼 2005-11-13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사과님 의견에 동의;;

마태우스 2005-11-13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굼님/그래도 명색이 기생충학 선생인데 헬리코박터 문제를 낼 수야 없죠^^
스텔라님/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교봉은 제 적국인데.... 거기서 모니터하다가 알라딘을 알게 되었고, 이리로 건너온 거죠. 그래서 교봉에게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치카님/책 맨 뒤에 있는 문제 내면 너무 쉽지 않을까요?^^
사과님/님은 항상 이렇게 깜찍한 생각을 하신다니깐요^^
모1님/보는 애도 있고 안보는 애도 있겠죠 뭐. 교수가 준 책이라고 무조건 읽어야 하는 건 아닐 테니깐요.

딸기 2005-11-13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 마태님은 좋은 선생님이시군요. :)

싸이런스 2005-11-1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난 한시간 반동안 말을 그렸고....." 마태님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겁니까???

moonnight 2005-11-1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제자들이 참 부럽네요. ^^ 삭막하기 짝이 없는 본과수업에서 책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란 걸, 그 아이들이 알아야 할 텐데.

울보 2005-11-1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역시,,마태우스님이시네요,,

세실 2005-11-1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마태우스님 글 신문에 났네요~~~ 축하드리옵니다. 날카로운 필치가 예술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돼지라고 베르베르가 말했다니....홋....돼지고기 먹어도 되는건가요?

chika 2005-11-1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099299  헉, 순간 99999인줄 알고 기겁할뻔했슴다. ;;

비로그인 2005-11-1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세실님처럼 한겨레 신문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신고하러 왔습니다.
칼럼 고사하셨다더니 결국은 쓰시는 거로군요 ^^
축하드립니다. 더욱더 재치있는 글 부탁드릴게요~

가시장미 2005-11-14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글 보여줘요!!!!!! -_-)/ 지난 신문을 어디서 구해요~~ 올려줘. 형!!

가시장미 2005-11-15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세실님 감사드립니다. 역시. 아주 재미있는 글을 올려주셨네요. ^-^* 근데 왜 형은 수준 낮은 글이라 못 보여준다고 하셨을까? (버럭!!! )

마태우스 2005-11-1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님/재미있긴요 죽고싶어요...
세실님/감사합니다만 흑...너무 못썼어요. 부담이 컸구요, 제 스타일의 글은 아니었다고 봐요.
고양이님/그게 잘 안됐습니다. 공덕동 얘기한 게 다 이 얘기였어요.
치카님/저두여
세실님/그건 진짜예요.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원숭이와 돼지가 인류의 조상이라고...돼지가 이브라고 했어요
울보님/부끄럽사옵니다
문나이트님/전 문나이트님 환자들이 부럽습니다^^
싸이런스님/너무 빨리 그렸나요?^^
딸기잼아줌마님/호호 무슨 말씀을...그리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