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남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 이성으로 느끼지 않는다나 어쩐다나. 남자처럼 생겼다는 건 아니다. 그런 말을 듣는 여인들 중엔 예쁘기만 한 여자도 꽤 있다. 그렇다고 행동이 터프하다든지 말을 거칠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은 그러니까 미모와 상관없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끼리 커플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언젠가 실험실 사람들을 데리고 삼겹살에 소주를 마신 적이 있다. 그때 난, 실험실에 있는 유일한 남자에게 그 자리에 있던, 귀여운 용모를 가진 조교를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 딴에는 그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미영(가명)이요?” 그는 날카로운 눈을 깜빡였다.
“에이, 쟤가 무슨 여자예요? 내 눈엔 남자로 보이는걸요”
미영이도 지지 않고 말했다. “누구는!”
그게 5월 쯤의 얘기인데, 그로부터 석달이 채 못된 오늘, 난 그들이 사귄다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나: 이거 비밀 지켜야 하는 거예요?
조교: 선생님들도 다 알아요. 실험실에서 손잡고 다니는데요.
헉. 그렇구나. 석달전 일을 떠올리며 난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선남선녀가 사귄다는 사실에 기꺼이 축복을 보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상대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서로를 편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상대에게 잘보이려고 스스로를 치장할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를 내보일 수 있다. 막상 사귀기 시작한 후, 특히나 잠이라도 한번 자고나면 놀랍게 변해버리는 사람이 많다는 걸 감안하면, 편한 사람의 한결같음은 신뢰를 줄 수 있다. 또한 나는, 가장 좋은 부부는 가장 좋은 친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내가 0.1% 미녀에게 푹 빠진 이유가 오로지 그녀의 미모 때문이라면 우린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고, 그 미모가 눈에 익어 지겨워지는 경우-설마! 0.1%인데?-만남 자체가 시들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미모에 끌린 게 아니라 그녀의 다른 점, 예컨대 문학적 취향이나 유머감각이 좋아 사귀기로 결정했다면 그녀와 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고, 오래도록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애인과 친구의 차이다. 그러니 “쟤가 여자로 안보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혹시 그녀를 마음에 두는 건 아닌지 눈여겨 보시라.
PS.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꼴이란.
PS2. 둘이 계속 잘되길 빈다. 깨지기라도 하면 실험실이 너무 썰렁하잖아.
PS3. 미모만 밝히는 내가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