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과일은 다 안먹으니 등수를 매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수박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일이다. 남들은 수박만 보면 입맛을 다시고, 더운 여름엔 수박을 먹어야 갈증이 없어진다나 어쩐다나 하는 모양인데, 난 왜 수박만 보면 한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수박을 먹다가 씨가 목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간 것도 아니고, 기어다니다 갑자기 떨어진 수박에 깔려 버둥거린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수박을 보는 순간부터 수박이 싫었다.


먹어본 적이 있긴 하다. 어릴 적, 엄마의 강권으로 수박 몇쪽을 먹었다. 선생님 댁에 갔을 때처럼 어려운 자리에서 사모님이 수박을 내올 때가 있었다. 억지로, 하지만 맛있는 척하면서 한쪽을 먹었다. 맛이 없었다. 난 확실히 수박 스타일은 아니다.


수박을 안좋아하는 내게 어머님은 이러셨다.

“니 각시는 평생 수박 구경도 못하겠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난 수박을 안먹어더라, 다른 사람을 위해 수박을 살 줄은 안다. 남의 집에 갈 때 수박 하나를 안고 들어가면 묵직한 것이 얼마나 폼이 나는가.


같이 일할 걸 상의하러 보건원에 갔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하는 3년간 머물던 곳, 그래서 거기 갈 때마다 친정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보건원은 많이 변했다. 그때 없던 건물들이 여러 채 들어섰고, 넉넉하던 주차장은 차들로 넘쳐 길이 좁을 지경이다. 테니스장으로 쓰던 곳에도 회색의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내가 근무하던 과도 마찬가지라, 세명을 제외하곤 얼굴이 다 바뀌었고, 사람 수도 20명 가까이 늘었다. 모든 조직은 팽창하는 속성이 있다는 파킨슨의 법칙(맞는지...?)은 거기서도 통했다.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제과점에서 롤빵이나 사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제과점 쪽으로 갔는데, 제과점은 온데간데 없다. 마침 그 근처에 과일가게가 있기에 수박을 샀다. 옛날 과가 두 개로 분과가 되었고, 사람도 다 합치면 30명가량 될 것 같아 큰맘먹고 세통을 사서 배달을 시켰다. 아마 지금쯤엔 즐거운 수박 파티가 벌어지고 있을 거다.


수박을 살 때 보니까 내가 옛날에 보던 그런 수박이 아닌 듯했다. 그때보다 더 커졌고, 모양도 둥글다기보다는 길쭉하다. 좋은 수박을 달라고 했는데 흠이 파인 수박을 주는 게 영 찝찝했다. “그거 괜찮은 거예요?”라고 물으니 “아, 그럼요! 제일 좋은 걸로 드리는 겁니다” 역시 과일 살 때는 뭘 좀 아는 분과 가야 한다. 그나저나 수박값은 참 안오르는 것 같다. 십년쯤 전 수박을 사가지고 친구집에 갈 때, 수박 한 개의 가격은 1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보다 더 큰 수박이 8천원이라니. 수박이 1만원 쯤 하던 십년 전에 배 값은 1천원 내외였는데, 십년이 지난 지금 배 한 개 값은 3-4천원, 크기로 봐서는 수박이 몇배 큰데 가격은 겨우 두배 차이라니 덩치 큰 수박은 슬프겠다. 오히려 떨어지는 수박 값과 날로 오르는 배값, 그리고 점점 배가 나오는 사람들. 이들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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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7-0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마태님이 과일을 다 안드신다니 의외군요..!

꾸움 2005-07-0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저 이렇게 웃고가도 되는겁니까~!!!
왜 이렇게 재밌으십니까~!!!!!!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수박 값과 배 값과 배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은 무슨~ ㅎㅎㅎㅎㅎㅎㅎ

oldhand 2005-07-0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 나온 사람들이 배값을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혹시 마태님이?
그리고 " 수박을 안먹어더라" -> "수박을 안먹더라도" 오타에요. 오타. 히히.

moonnight 2005-07-0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박 싫어해요. ^^; 여름에 수박을 안 먹으면 뭘 먹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물 먹는다고 대답하지요. 요즘엔 노력해서 좀 나아졌지만 과일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까지 공통점이 하나 더 늘어났군요. 친하게 지내욧! ^^

숨은아이 2005-07-05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님 글은 마지막 한 줄이 백미여요. ㅎㅎ
그런데 10년 전에 툭 튀어나온 배=인격이었는데 지금은 기피 대상인 걸 보면, 배 값이 오른 것은 배를 혐오하는 날씬한 것들의 음모...?

아영엄마 2005-07-0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수박 물량이 많아서 가격 폭락이랍니다. 농사지으신 분들 속상하실 것 같아요..(장마에 썩는 것도 많을텐데...)

플레져 2005-07-05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박만큼 시원한 과일도 없는데... 일단 한번 드셔보세요. 정말정말 시원해요.
아영엄마님 말씀 들으니 더 열심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드시죠? ^^

마늘빵 2005-07-05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모든 과일을 다 좋아해요~~~ 과일광!

하루(春) 2005-07-0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비타민은 뭘로 보충하세요? 알약?

갈대 2005-07-05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박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던데요. 수박에 냉한 기운이 있나 봐요. 그나저나 벤지,,, 일은,,(__)

파란여우 2005-07-0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박은 싫어요...물만 나오는....별로 땡기지 않는 과일도 아닌것이, 채소도 아닌것이...갈대님하고 나란히 있으니 종친회 모임에서 만난 것 같아요 호호호^^

니르바나 2005-07-0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수원 하나를 통체로 날로 먹은 저는 과일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라딘 마을에 와서 알았습니다.
과일은 청탁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다 보니...
아!수박먹고잡다.ㅎㅎ

인터라겐 2005-07-06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엄마는 수박을 많이 드셔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어요.. 수박이 약이 될수도 있는데..ㅎㅎ

마태우스 2005-07-0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허걱 그런 처방도 있나요? 전 그래도 ....안먹겠다고 버틸 것 같은데요
니르바나님/호호 저도 어떻게 과일을 싫어할 수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님 만날 때 수박이라도 하나 사들고 가야겠어요^^
여우님/님과저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갈대님과 종친회 하지 마시고, 공통점 많은 사람끼리 놀아요. 근데 갈대님도 수박 안좋아하신다고....
갈대님/젊음을 무기로 여우님께 접근하시다니!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마세요.....^^
하루님/비타민은요 우리가 먹는 음식 속에 알게모르게 있대요. 우유 잘 먹습니다, 전
아프락사스님/오오 저희 어머님이 바라는 그런 인간형...
플레져님/저의 수박 기피는 너무 오래되어서 잘 안될 겁니다. 옛날에 억지로 먹을 때도 설탕을 잔뜩 찍어서 먹었다는... 지금은 설탕 있어도 못먹어요
아영엄마님/저는 안먹더라도 다른 분께 선물 많이 하겠습니다. 알라딘에도 몇통 풀어놓을까요?^^
숨은아이님/제 말이 바로그말입니다 호홋. 날씬한 것들이 항상 문제지요
문나이트님/님과 저의 공통점이 이로써 27개로 늘어났군요. 서른개 채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올드핸드님/배나온 사람이 배값을 조정한다...숨은아이님은 날씬한 것들의 음모라는데... ^^ 오타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움님/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재밌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날개님/음...전 과일 잘먹는 이미지였나봐요?^^

marine 2005-07-06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특이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전 수박은 너무 좋아하는데요, (숟가락 들고 퍼먹을 정도로) 매실은 못 먹어요 옛날부터 집에서 담근 매실주도 못 마셨는데 음료수로 나오는 거 보고 뒤로 넘어갈 뻔 했잖아요 아니, 세상에, 이게 음료수로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좋아한단 말이야?? 전 매실주는 체했을 때 약으로 먹는 걸로 알 정도로 역겨워 하는데 음료로 시판되다니, 충격 그 자체였죠 매실주랑 야쿠르트는 일단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절대 못 먹습니다 (불가리스나 파스퇴르 등은 잘 먹는데 한국 야쿠르트나 이오 같은 건 못 먹음)

마태우스 2005-07-07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전 매실도 싫어합니다만 매실주는 먹습니다. 매실 음료는 물론 싫어하죠. 그러니까 매실주를 먹는 게 술이니까 참고 먹는 거지 좋아서 먹는 건 아니랍니다. 야쿠르트도 못드세요? 전 요플레는 못먹습니다만 윌은 먹어요. 숟갈로 수박을 드시는 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