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음반이 없어서 이걸 띄웠습니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만 난 위-대장 반사 환자다. 뭔가를 먹으면 바로 일을 봐야 한다는 뜻이다(이 시간까지 벌써 세 번이나 일을 봤다....). 엄마에게 효도하려고 아침을 먹었더니, 어김없이 신호가 온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앉았다. 잠시 후, 할머니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여는 바람에 난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화장실에 있는 모습을 들키는 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3대 수치라고 도스토에프스키가 말했었지만, 하여간 굉장히 멋쩍은 일이다. 하얀 내 히프를 할머니가 보셨으면 어쩐다?


출근을 하면서 벤지 생각을 했다. 벤지가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텐데. 내가 집에 있을 때, 벤지는 내가 실이라면 바늘 같은 존재였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내가 어디를 가든 내 곁에 머물렀다. 언제나 1미터 가량 떨어진 채 둥지를 틀고 앉곤 했는데, 그러다가 누군가가 내 옆에 앉기라도 하면 그 사이로 파고들어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했고, 잘 때 어머니가 이불이라도 덮어주려 치면 나를 해롭게 하는 줄 알고 맹렬히 짖어댔다. 내가 화장실에 가면 문 앞에 엎드린 채, 다른 이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니까 벤지는 내 위치를 말해주는 위치탐지기이기도 했다. 그 벤지가 없어졌으니 일을 볼 때는 화장실 문을 잠가야 하건만, 익숙지 않다보니 까먹은 거다.


비가 내린다. 벤지가 죽던 그날처럼.


 * 어느 분이 ‘Heaven'이라는 씨디를 보내 주셨다. [마태우스님의 벤지도 지금 거기서 분명히 마태우스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 곁에는 이런 벗들이 있다. 내 아픔에 같이 아파해 주는 벗들이....

 

 **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벤지는 주로 화장실에 소변을 봤다(급할 때는 대변도). 변기 근처에 다리를 대고, 몸에 비해 많은 양의 소변을 내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매우 기특하다며 벤지를 쓰다듬곤 했는데, 부랴부랴 물을 뿌리긴 했지만 화장실에서는 언제나 벤지 오줌 냄새가 났다. 가끔씩 오는 형제들은 물론이고 노상 그 냄새를 맡아야 하는 엄마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셨다. “그럼 어디다 소변을 보라고?” 내가 늘상 하던 항변이었다. 벤지가 하늘나라로 간 뒤, 화장실의 냄새는 사라졌다. 하지만 난 냄새나는 화장실이 그리워 죽겠다. 오늘 따라 더더욱. 젠장, 다 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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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6-2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이신데 뭐 어떻습니까? 흐흐. 유난히 그리울 때가 있죠. 저도 한동안 그랬답니다.^^

인터라겐 2005-06-2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 생각나네요.. 마태님.. 울고 계시는건 아니시죠?

어룸 2005-06-2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다듬쓰다듬...

노부후사 2005-06-2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컷들의 오줌냄새때문에 대부분 중성화수술을 시키죠. 병원에서 일하다가 심심해서 병적부를 보고 있으면 sex란에 male라고 적힌 개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 sexlessness 죠. - 어, 그러고보니 이 얘기 언젠가 했던 것 같은데... - 여튼 끝까지 수술 안 하고 기르시는 분들 보면 정말 강아지를 사랑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까이 한다는 건, 좋은 점 못지않게 불편함도 따르는 것인데 요즘엔 좋은 점만 취하려 하는 것 같아요.

물만두 2005-06-27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턱턱~ 투덕투덕~

진/우맘 2005-06-2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옥.....도닥도닥....

꼬마요정 2005-06-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 내셔요~!! 화이팅!!
글구 할머니는 눈이 침침하실테니까... 아마 못 보셨을 거에요...그쵸?

숨은아이 2005-06-2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 그날 비가 왔군요.

마늘빵 2005-06-2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는 하늘에서도 가려서 잘 싸고 다닐거에요.

세실 2005-06-2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도 마태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렇게 찡한데..
토닥토닥. 조금만 힘들어 하세요.

야클 2005-06-27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뽀삐할아버지도 가끔 자기 화장실 놔두고 나 신문보는 곳까지 따라와서 일보고 가는데... 같은 말티즈할아버지들이라 하는 짓도 비슷하군요.^^
이제는 알라딘동네 최고령견공이 되어버렸네요.

panda78 2005-06-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어루어루 쓰담쓰담.. 우리 마태님, 힘내세요-

아영엄마 2005-06-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지킴이가 되어 주었던 벤지의 빈자리가 문득문득 느껴지시겠군요. 아프락시스님 말씀처럼 벤지는 어딜 가서도 잘 가리며 살거예요. (사실 집안에서 어디에 볼 일을 보겠어요~. 개도 화장실 가야죠..-덕분에 저희집도 늘 냄새가 납니다..ㅜㅜ;;)

2005-06-2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5-06-2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앗...그렇게까지....감사합니다. 넙죽.
아영엄마님/버릇이 되어 잘 때 직각으로 누워 잡니다. 요 반쪽에는 언제나 벤지가 있었지요.... 아직도 많이 허전합니다.
판다님/님들 덕분에 힘 많이 냈어요. 그냥 가끔씩 허전한 거죠...
야클님/..... 댓글 쓰다보니 벤지 생각이 많이 나네요. 사랑하는 대상은 아무리 잘해줘도 헤어질 때 아쉬운 법인가봐요.. 그나마 전 잘해주지도 못했죠..
세실님/네.....감사합니다.... 저 괜찮아요 이제.
아프락사스님/거기선 소변 대변 볼 때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봤으면 좋겠어요... 남이 보는 걸 매우 부끄러워했지요..
숨은아이님/네...그날 비가 왔지요.... 살아오면서 가장 슬펐던 그날....
꼬마요정님/글쎄 못보셨어야 하는데 괜히 불안한 거 있죠..
진우맘님/저 정말 괜찮아요. 그냥 이따금씩 그럴 때가 있잖아요....
새벽별님/할머니가 저 수치스러운 장면을 본 것에 촛점을 맞춰 주세요!
물만두님/감사합니다.... 전 만두님한테 해드린 것도 없는데...
에피님/뭐, 중성화 수술 한다고 덜 사랑하는 건 아닐 거예요. 욕망을 알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보다는 아예 모르는 게 더 행복한 거 아닌가요...
투풀님/남녀가 유별한데 자꾸 쓰다듬으시면 어떡해요
인터라겐님/오전에 좀 울었죠...지금은 괜찮아요..
스텔라님/그래요, 할머니가 아니라 스텔라님이었다면...알라딘 떠나야죠^^
검은비님/님의 큰 위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안그럴께요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겠어요...

2005-06-27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5-06-27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긴요. ㅎㅎㅎ.

노부후사 2005-06-28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님이 모르셔서 그러시는 거여요. 중성화수술할 때는 마취를 약하게 하는데 개들이 무지 아파해요. 개눈에서 눈물 떨어질 정도로.

세벌식자판 2005-06-29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친구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애완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보고..

"난 게을러 터져서 개는 못 키울 것 같다."

라고 말하니 그 친구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개 키워봐라. 부지런하게 된다. 정~~~ 안되면. 개가 니따라 게을러지고.. ^^; "

마태우스 님 글을 보니 그 친구 말이 이해가 되네요.

마태우스 2005-06-2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벌식자판님/아, 네... 사람에겐 누구나 책임감이 있어서요, 부지런해지게 마련이죠...
에피님/네.......... 그래도 전 벤지에게 팔을 대주면서 마음이 아팠답니다..
스텔라님/그러니까 화장실 가실 땐 꼭 노크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