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 난 해마다 100권씩의 책은 읽은 줄 알았었다. 그런데 옛날 기록을 찾아보니 2001년만 해도 내가 읽은 책은 70권에 불과했고, 100권을 돌파하기 시작한 건 겨우 2002년부터다. 초창기 기록이 53권인 걸 보면 책을 읽을수록 속도가 붙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23권의 기록을 세운 2002년 이래 내 기록은 답보 상태였다. 120여권이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여서 그런 걸까?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작년 기록을 분석하니 그게 아니다. 10월까지는 120권을 넘게 읽어 기록 경신이 유력했는데 11월에 단 4권, 12월 6권을 읽으면서 평년작이 되었다. 물론 그 원인은 애인을 사귀었다는 거였다. 애인 만나랴, 전화하랴 그러다보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던 것. 각 요소들의 독서 저해효과를 분석해 봤다(10점 만점)
1) 애인: 책 읽기를 저해하는 요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작년 말의 부진은 그녀를 사귄 지 얼마 안되어 푹 빠져버린 탓도 있을테니, 6개월 이상이 지나 안정이 된다면 다시 책을 많이 읽을 수도 있었을 거다. 더구나 그녀 역시 문학을 하는 여자였으니 같이 만나서 책을 읽는 아름다운 광경도 연출할 수 있었을지도. (애인의 저해효과 -5.8)
2) 술: 이틀에 한번꼴로 술자리를 갖는 나, 한번 술자리에서 쓰는 시간이 대략 다섯시간 정도 되니, 술을 극단적으로 안먹는다면 책 15권을 더 읽을 수 있다. 여건이 안되어 술을 못줄였지만, 파산과 동시에 여건이 무르익었다. (술의 저해효과: -7.5)
3) TV: 술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 요즘 들어 자리에 누우면 습관적으로 TV를 튼다. TV를 켰을 때 재미있는 걸 할 확률은 케이블 TV의 많은 채널 덕분에 30% 정도나 된다. 그러다보면 은근히 시간을 빼앗기는데, 고치려고 해도 잘 안된다.(저해효과 -4.1)
4) 설사: TV도, 마실 술도 없는 출퇴근 시간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독서의 시간이다. 내가 직장이 멀지 않았다면 과연 이렇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가끔씩 자는 거 말고, 설사는 출근길 책읽기의 강력한 저해요소다. 위대장반사가 있어 아침에 뭔가를 먹으면 대번에 신호가 오는 나, 오늘 아침 별 생각없이 먹은 빵또아(빵으로 덮힌 아이스크림) 하나에 설사기가 느껴졌다. 설사가 나오는 판에 한가롭게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 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기차가 천안역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엊그제는 불고기버거를 먹었다가 같은 일을 겪었다. (저해효과: -8.0)
5) 그리고 여자.
기차역 화장실에서 일을 본 나. 학교까지 가는 버스에 앉아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때, 터미널 부근에서 엄청난 다리를 가진 여인이 탄다. 그녀가 탄 뒤부터 난 한줄의 책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를 안보면 보고 싶어서, 막상 보고나면 가슴이 뛰고 어지러워서 글자가 눈에 안들어왔다. 사실 난 다리가 예쁘다는 게 뭔지 몰랐다. 가늘면 그냥 좋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버스 문앞에 기대어 선 그녀의 다리를 보면서 예쁜 다리의 실체를 알았다. 백화점에서 스타킹을 선전하는 마네킹의 다리와 흡사한 그런 다리, 난 그게 인체공학적으로 가능한지 미처 몰랐었다. 여자 얼굴을 가장 먼저 봐왔지만, 다리가 예쁘면 얼굴이 크게 문제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미녀는 아니었다). 지금도 난 정신이 헤롱헤롱해 아무 생각도 안나는데, 앞으로 그녀가 내렸던 상명대 근처를 헤매고 다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저해효과: -9.9)
독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온갖 유혹과 싸워야 하고, 요즘처럼 날씨가 좋고 벚꽃이라도 피면 방구석에서 책을 읽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3월까지 40권을 읽어 일년에 160권까지도 가능했건만, 술의 유혹에 무너지는 바람에 4월 들어서는 지금까지 딱 세권을 읽었을 뿐이다. 파산도 한 김에 다시금 책상에 앉아 독서를 하리라. 책값도 그리 싼 건 아니지만, 술과 향락에 비하면 책은 아주 싼 취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