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도서실 앞에는 두툼한 명단이 붙어있다. 책을 대출한 뒤 제때 책을 반납하지 않은, 유식한 말로 미납자들이다. ‘꼭 돌려주라’는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명단이 공개된 뒤 추가로 돌아온 책은 별로 없어 보인다.




명단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전 학장님을 비롯, 고매하신 교수님들의 이름이 곳곳에서 보인다. 연체기간은 더더욱 눈이 부신데, 석달 정도는 부지기수고 어떤 분은 500일을 가뿐히 넘기고 1천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왜 책을 반납하지 않는 걸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로, 쭉 곁에 두고 책을 보는 경우다. 하지만 그렇게 꼭 필요한 책이라면 사는 게 학자의 기본이 아닐까. 두 번째 이유, 책을 분실해서. 이게 좀더 그럴 듯한데, 방안 어디에 있긴 할텐데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면 반납할 방법이 없는 거다. 세 번째 이유, 관심이 없어서. 1년 이상 책을 품고 있었다면 대출을 했다는 사실을 아예 까먹었을테고, 필경 자신의 책으로 간주를 하고 있을게다. 하지만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통계에 의하면, 책을 돌려달라는 전화를 했을 때 화를 내는 사람들은 대개 세 번째 부류란다. 까먹은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게 왜 화가 나는 걸까. 혹시 그들은 책을 돌려줄 생각이 아예 없는 게 아닐까. 남에게 빌린 뭔가가 내게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는 나로서는 그들의 심리를 이해할 길이 없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와 비슷한 잘못을 했다. 내 남동생이 동네 만화방에서 <비련의 화인>인가 하는 책을 빌린 후 반납을 안한 채 군대에 가버렸는데, 그집 주인이 정말 신경질나게 우리집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라도 갖다줬으면 좋으련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못된 아이였기에 “왜 나한테 그러냐. 난 모른다”고 같이 화를 냈었다. 왜 그랬을까. 나도 이해할 수 없다. 동생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터라, 동생이 남긴 설거지를 내가 하는 게 싫었던 것일 수도 있다. 결국 그 책은 지금도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몇 년이 지난 후, 난 그 만화방의 단골이 되었다. 95년은 만화라고는 눈도 안돌리던 내가 일생에서 가장 만화를 많이 보던 시절이었는데, 점심 때 쯤 만화방에 가서 맘먹고 만화를 보고나면 어느새 밤 열시가 지나있곤 했다. 그 동안 근처 사람들은 몇 번을 바뀌고 그랬는데, 그리도 열심히 만화를 보는 내가 이뻐 보였는지 아주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쥐포와 음료수를 무료로 제공하곤 했다. 내가 <비련의 화인>을 갖고 있는 그놈이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 잘해주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오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일주일만 보고 잽싸게 갖다줘야지. 난 착한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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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30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련의 화인>이라니요..갑자기 그 분이 생각납니다. 바쁘지만 잘 계신다죠^^

하이드 2004-11-3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 저도 얼마전에 책정리하다가 대학때 교수님한테 논문 쓰니라 빌린, 절판되서 구하기도 힘든 '언어학 어쩌구' 하는 책을 찾았답니다. 천일은 가뿐히 넘겼네요;; 아, 예전에 이사가기 전에 빌린 비디오 테이프 ' 정전자' 도 아직 어느 구석에서 잠자고 있어요.

호랑녀 2004-11-3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그렇게 공개되어 있으면 창피해서라도 갖다줄 법도 하구만...ㅉㅉ

혹시 연체요금이 두려워서 아니겠습니까? 책을 분실했다 하더라도 방법은 있지요. 똑같은 책을 사서 반납하거나 변상하면 되니까...

연체자는 정말... 미워...

sooninara 2004-11-3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파트 문고도 연체가 장난이 아닙니다. 분실률이 어마어마 할겁니다..^^

2004-11-30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4-11-30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체되면 그 다음에 책을 못 빌리기 때문에 저는 칼같이 꼭 반납합니다 아마 연체하신 분들은 그 뒤로 도서관 이용할 일이 없었나 봐요

sweetmagic 2004-11-3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방금 연체요금내고 왔는데....제가 아니라 친구 빌려준 책이요 ~ 친구가 늦게 줬데요 ~~~! ( 아 그리고 도서반납 안하면 졸업도 안‰쨈瑁熾?~)

sweetmagic 2004-11-30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글 `` 내가 본 영화들에 있어요 ~ !!

날개 2004-11-3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련의 화인.. 그 책이 궁금하군요..^^*

ceylontea 2004-11-3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빌리고 반납하지 않은 책이 딱 한 권이 있어요... 고등학교 다닐때 친구네 놀러갔다가 오빠 책이라는데 빌렸어요... 아직도 다 읽지 못했답니다... 그래도 그 친구랑 연락은 계속 되니 꼭 돌려줘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가 그 책을 저에게 빌려줬다는 것을 기억할까요? 혹 기억한다해도 반납해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너 가져.. 그럴 것 같다라는 것이죠... 전 제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거나, 책에 손상이 되어 돌아왔을 때처럼 싫은 것이 없답니다.

노부후사 2004-11-30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책 빌리셨어요? 전 그게 더 궁금 ^^

비로그인 2004-11-3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중엔 매 학기 수업 교재를 구입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한 학기를 버티는 녀석이 있었지요. 연체료를 내는게 구입하는 거 보다 더 싸게 먹힌다는 것이 그 녀석의 주장이었지만, 꼭 그런 녀석이 자기 책 마냥 빌린 책에 필기도 하고 줄 좍좍 긋고. 무엇보다도 그 책이 부교재인데 절판되었고, 게다가 도서관에 달랑 1권 밖에 없을 경우에는 친구들이 다들 제발 반납 좀 해주면 안 되냐며 싹싹비는;;

니르바나 2004-11-3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린 책 반납이 하루라도 늦으면 불안초조해지던데.

은행대출이나 도서대출이나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불량거래 리스트에 오르는 일이 두려워요. 와 이 소심증

soyo12 2004-12-0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출이란 말을 듣고 바로 은행 금융 대출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요즘 생활에 힘들어 있나봅니다.^.~

아영엄마 2004-12-01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페이퍼에서 님의 글을 봤는데 정말 특정 기생충(참굴큰입흡충...??)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셨어요? 우와~ 학명 지을 때 혹시 님의 이름도 들어갔남요? 본인의 몸에 생체 실험까지..존경 존경!! (__)

2004-12-0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12-01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어, 그거 제가 발견한 건 아니어요. 그거 학명에 'Seo'가 들어가긴 하지만, 그건 제 은사님의 성이구요. 저 학문적으로는 별로인 거 아시면서...

소요님/하하, 그렇네요. 너무 뜸하신 걸 보니 괴롭히는 사람이 주위에 많나봐요?

니르바나님/님도 그러시군요. 그럼 500일을 돌파한 사람들은 다들 강심장?

여대생님/그렇게 버티는 친구분도 계시군요... 돈을 아끼려 책을 빌린다 해도 밑줄 긋는 건 정말 너무하는 것 같네요.

에피님/하하, 그걸 왜 궁금해하시옵니까. 바이러스 감염에 관한 책이어요. 글쓰는 데 참고하려구요

실론티님/여기 분들은 다들 책을 사랑하는 분들이지요. 저도 빌려준 책 못받을 때처럼 속상한 적이 없지요.

날개님/아유, 그 책 재미 하나도 없어요. 궁금해하지 마시길^^

매직님/앗 정말 카테고리가 틀렸네요. 요즘 자주 이래요...

나나님/그, 그럴까요? 그래도 교수들이라 또 빌려달라면 대출해줄 것 같은데..

수니님/왜 반납을 안할까, 심리가 궁금해요.

호랑녀님/우리 도서관은 연체료가 없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하이드님/정전자, 그거 주윤발 나온 거죠?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지존무상이 더 재밌긴 하지만... 어머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여우님/그분이라면 혹시......???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나요??


진/우맘 2004-12-03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 선배에게 빌린 '장미의 이름' 상 권.....일년동안 학년 협의실에 꽂아두었다가, 결국 잊어버렸죠. 그 책을, 며칠 전 구입해서 돌려드렸습니다. 안 잊어버리고 구입해서까지 돌려 드리는 스스로를 무진장 자랑스러워 하며...그랬더니요, 울 이쁜 선배님, 뭘 사서까지 주냐고, 독서행사하고 남은 상품권 만원권을 주시는 겁니다.

흑흑...역시나, 어른의 아량은 다르와요.

빌린 책은 돌려줍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