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의 모든 것>을 보고 싶었다.

네이버 평점도 8.66으로 높은 편이고, 딱 내 스타일일 것 같았다.

밤 11시 40분 걸 예매한 뒤 윔블던 결승을 보다말고 극장으로 향했다.

그 시각인데도 관객들이 꽤 있기에 “역시 재밌나보다”며 흐뭇해했는데,

영화가 시작될 무렵 아내가 갑자기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 뭐가?

“가스불을 켜놓고 왔어.”

그렇다면 어서 가야 하건만, 아무래도 영화표가 아까웠다.

아내한테 보고 있으라고 한 뒤 내가 집에 가서 끄고 오겠다고 했다.

잽싸게 차에 올라탄 뒤 바람같이 달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혼자 보는 게 싫다고, 집에 같이 가잔다.

차를 돌려 다시 극장으로 가 아내를 태우고 집에 갔다.

아내가 묻는다.

“화난 거 아니지?”

내가 화날 때가 없는 건 아니다. 예컨대 무시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

하지만 오늘 일은 그런 게 아니잖은가?

 

가는 도중 노래를 듣는다.

내가 80, 90년대(와 약간의 2000년대) 노래 350곡을 선곡하고

아내가 열심히 녹음해 준 덕분에

요즘은 차에서 음악을 흥얼거리며 다닐 수 있어서 좋다.

김완선의 <나만의 것>이 나온다.

“여보가 김완선을 좋아했나 봐?”

“우리 세대는 대개 김완선을 좋아하지 않냐? 그땐 지금과 달리 섹스심벌이라 할만한 연예인이 김완선밖에 없었잖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난 김완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가창력이 없고 눈에 흰자위만 있다고 퍽이나 욕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때를 함께 했던 스타들에게 제법 관대해진다.

게다가 <승승장구>에서 김완선이 이모한테 엄청난 착취를 당했다고 고백할 땐

나도 괜히 흥분해서 죽은 이모를 욕했었다.

그러나저러나, 난 젊을 때 누구를 좋아했더라?

언젠가 여기다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난 안소영을 좋아했었다.

내가 사춘기였을 때 그녀가 주연한 <애마부인>이 한창 히트를 쳤고,

그 후 안소영은 상당기간 야한 영화만 찍으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고1 가을에 아버님과 성묘를 가서 여관에 묵었던 적이 있는데,

지나가다 보니 문이 열려 있는 방에 큰 달력이 있었고

안소영의 큼지막한 사진이 있는 거다.

주위 눈치를 보면서 그 방에 들어가 달력을 뜯어냈고,

고이 접어 집에 가져와 책상서랍에 보관했다.

 

전근대적인 서랍검사를 하던 아버님 때문에 그 사진은 몇 달 못가서 버려졌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난 <애마부인> 시리즈가 나오면 극장에 달려가 봤다.

3탄을 지나고 난 뒤엔 별 감흥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안소영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안소영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다.

애마부인은 오수비 주연의 2, 염해리 주연의 3이 나온 뒤

감독과 영화사가 싸우는 바람에 감독은 파리애마(유혜리)-스페인애마(이화란)를 만들었고,

영화사는 애마부인4부터 시작해서 11탄까지 만들었는데,

10탄과 11탄만 안보고 다 본 것 같다.

야한 걸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건 믿어 주시길.

참고로 파리랑 스페인은 개봉날 가서 유혜리와 이화란의 사인을 받았는데,

유혜리 사인이 담긴 사진을 본 할머니가 “이렇게 생긴 여자랑 사귀면 안된다”며

야단을 쳤던 기억도 난다.

 

집에 와서 봤더니 과연 가스불은 켜져 있었고,

내가 영화를 못본 게 미안해서 아내는 집에 온지 30분째 내 눈치를 보면서

나한테 잘하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내가 돌아온 뒤에도 윔블던 결승은 끝나지 않았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세리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2-07-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네요. 내 아내의 모든것 재미있어요. 다시 도전하세용! 카사노바 류승룡 참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김완선? 난 별로던데....동세대가 아닌가 보아요. 남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ㅋ

마태우스 2012-07-10 01: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도 재밌을 것 같은데요
휴, 다시 시간 잡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글구 김완선은 저도 별로였는데, 갑자기 그때 미워하던 사람들, 예를 들어 농구스타 허재 같은 사람도 나이가 드니깐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죠 뭐. 하핫.

재는재로 2012-07-0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류승룡의 연기가 일품인 마지막 까지 웃겨주시는 저는 강수지 였는데

마태우스 2012-07-10 01:18   좋아요 0 | URL
류승룡이 그렇게 연기를 잘했다니 정말 보고파요.
이번에 못보면 쿡으로라도 꼭 보겠습니다. 꾸벅.

페크pek0501 2012-07-0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아들에다가, 착한 남편까지라니...
저, 감탄하는 소리가 들리시옵니까? ㅋ

마태우스 2012-07-10 01:19   좋아요 0 | URL
어...착한 남편이라뇨... 가스불 켜져 있으면 응급상황인데 당연히 와야죠
글구 대추를 저 때문에 달이는 건데, 제가 미안하죠^^
그나저나 페크언니 그간 안녕하셨어요.
갑자기 님 댓글 보니깐 그리움이 울컥...ㅠㅠ

비연 2012-07-0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서 못 보셨군요..ㅜㅜ 그래도 가스불이 켜져있었다니... 발견해서 다행요.
저도 아직 못 봤는데... 다음에 꼭 보아요~ ㅎㅎ

마태우스 2012-07-10 01:20   좋아요 0 | URL
그러믄요 전 한국영화를 특히 좋아한답니다.
굿다운로드든 쿡이든 보겠습니다.^^

2012-07-09 0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0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7-09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마태님같은 남편 만나야하는데
우리집이었다면 육탄전이 벌어졌을지도~
멋져요 마태님
그렇게 묵묵히 화 안내주면 제발저려 더 미안한게 부인이건만
다른 남자들은 몰라.
가스불 켜져 있었으니 안갔으면 큰일날뻔했네요

마태우스 2012-07-10 01:24   좋아요 0 | URL
어....하늘바람님
사실 저 그때 화 안났었구요
음, 이게 육탄전을 벌일 일인지 약간 이해가 안간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게다가 아내가 한미모 하는데 화를 내다뇨!!
암튼, 자상한 댓글 감사드려요.
사실은요 가스불이 안켜져 있었음 약간 허탈했을 수도 있지요

책읽는나무 2012-07-09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가스불이 켜져 있었군요?
부인이 정말 미안하셨겠습니다.^^
그래도 님이 동네 주민들을 다 살려내신 겁니다.
착하신 마태님.^^;;

나중에 영화 다시 보시면 좋겠네요.저도 그영화 봤는데 꽤나 우습고 재밌던데요.
감동까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재밌었어요.김수정이 참 예쁘게 나오고~~^^

마태우스 2012-07-10 01:24   좋아요 0 | URL
책나무님 안녕하세요
벌써 님과 알고지낸 지 10년이 다 되어 가네요.
전 감동보단 재밌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어떻게하든지 꼭 보겠습니다

레와 2012-07-0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 세번 확인해도 보일러 끄는 것과 차문 잠그는 걸 매번 깜빡해요. ㅠ_ㅠ

그리고 영화는 기회되실때 꼭 보시면 좋겠어요. ^^

마태우스 2012-07-10 01:25   좋아요 0 | URL
앗 그러시군요 전 차문 안잠궜다고 생각하고 다시 와보면 희한하게 잠궜더군요. 영화는 나중에라도 보겠습니다

무스탕 2012-07-09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일정시간 인기척이 감지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문도 잠기고 형광등도 꺼지도 수돗물도 잠기고 가스불도 꺼지는 그런 시스템을 얼른 개발해 주세요!
(이걸 마태님께 요구하고 있어요 ^^;;;)

마태우스 2012-07-10 01:26   좋아요 0 | URL
앗 무스탕님... 가스불 감지 시스템이라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듯하네요 현재 기술로 충분히 가능한 듯 싶은데요. 제가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누구한테 해야 할지...^^)

blanca 2012-07-1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우스님의 마음은 하해와 같군요! 저도 저런 실수를 가끔 해서 너무 공감갑니다. 안소영. 저도 그 시대 배우들에 관심이 많아요. 오수비 씨는 참 비극적인 생애를 사셨더라고요. 참, 개인적으로는 정윤희 씨가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마태우스 2012-07-10 11:15   좋아요 0 | URL
어...다들 그러시는군요. 가스불 정도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남편들이 뭐라고 하는군요 으음. 글구 저 마음 무지 좁다고 아내가 저한테 tiny heart라고 불러요. 오수비 씨가 안좋았군요 그건 몰랐네요.

울보 2012-07-10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허재 안 좋아했는데 허재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저도 보고 싶어요 내아내의 모든것,음 볼 수있을지 모르겠지만요,
다행이다,
옆지기였다면 아마 ,ㅡ,,
흐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지내시지요,,오늘 부터 장마라고 하네요, 건강 관리 잘하세요,

마태우스 2012-07-10 11:16   좋아요 0 | URL
울보님 오랜만이어요.
님까지 이러시는 걸 보니 가스불에 관한 한 제가 마음이 넓군요 호호.
님도 건강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