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못잊을 은사, 하면 대개는 깊은 감명을 줘서 자신의 삶을 바꿔준 사람을 말할 거다. 하지만 그 반대도 있다. 동창들끼리 만나서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면서 웃고 마는.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글을 다 읽고 나면 내 심정을 이해할 거다.

내가 고1 때, 그는 우리학교에 처음 부임했다. 정치경제라는 과목을 가르쳤던 그는 첫시간에 우리반에 들어와 이렇게 수업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정말 행운아들입니다. 내가 1학년 열다섯반 중에서 유일하게 여러분 반을 가르치게 되었으니까요"
난 그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대개 믿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열다섯 반 모두를 혼자 가르쳤다. 그의 정체는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교과서에 나오는 사진-남녀가 결혼하는 사진을 비롯해서-들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고, 교통안전에 대한 포스터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오죽하면 쉬는 시간에 숙제를 하는 우리를 본  담임이 "이게 공부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항의하는 일까지 있었을까.

비가 오는 어느날, 그는 우산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많은 수가 들었다. 그 중에서 혼자 쓰고 온 사람만 일어나라고 했다. 많이 일어났다. 그는 우산을 왜 같이 안썼냐고 일장 연설을 한 뒤, 반성문을 원고지 50장에 쓰라고 했다. 수업 시간에 뭔가를 질문해서 대답을 못하는 경우도 무조건 반성문 50장이었다. 한번은 수업에 들어오더니 정신수련을 한다면서 한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도록 했다. 그리고 혹시 졸린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했다. 한사람이 손을 들었나보다. "짝!" 따귀를 갈기는 소리가 났다. 그쯤 했으면 알아들어야 할텐데, 두명 정도가 더 손을 들었는지 따귀 소리는 두 번 더 났다.

그가 낸 시험문제는 형이상학 그 자체였다. 전교에서 수를 받은 사람이 딱 하나일 정도로. 특히 1학기 기말고사는 책에 전혀 안나오는 법률 문제가 망라되어 사법고시를 방불케 했는데, 그 시절에 그래도 공부를 잘했던 내가 64점을 맞을 정도였다. 2학기 중간고사에서는 답이 이랬다. 1번부터 5번은 1), 6-10번은 2), 11-15번은 3), 16-20번은 4), 21-25번은 1). 답을 칠하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몇 개를 고쳤는데, 그의 특성을 파악해 과감한 베팅을 했던 내 친구는 유일하게 100점을 맞았다.

다른 반 반장이던 친구가 그의 수업방식에 항의를 했다. 그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그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그 반에 들어가 '보강'이란 명목으로 점심시간을 빼앗었다. 그건 결국 그반 담임과 그와의 싸움으로 비화되었는데, 하여간 반장은 그의 수업 시간엔 아예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그를 싫어했다. 그렇게 한달 뒤, 그 반장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몇 년 후 잠깐 한국에 들른 그에게 유학을 간 이유를 물었다. 야당 의원이었던 아버지가 정치적 탄압을 받아서이기도 했지만, 주 이유는 역시 정치경제 선생의 폭거였단다. 참고로 반장의 형이 <사다리 걷어차기>를 쓴 장하준 씨다.

그는 수업 중 외모상으로 맘에 안드는-노는 애들은 딱 보면 알지 않는가?-애를 보면 불러내어 시비를 걸었다.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니가 그렇게 주먹이 세? 나랑 한판 붙어?"라며 혼자 흥분했다. 다리를 올려 턱을 걷어차는데 예전에 싸움 한번 해본 솜씨인 듯 싶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얼굴에 상처가 나서 수업에 들어왔다. 안대까지 한 그의 모습에 우리가 궁금해하자, 깡패를 만났다고 했다.
"여러명이 덤비기에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면서 왼쪽으로 주먹을 뻗었는데..."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건만, 진상은 우리학교 야간에 다니던 학생들이 작정을 하고 그를 폭행한 거였다. 워낙 이상한 사람이라 "어떻게 선생님을 때려?"라는 생각은 안들었던 것 같다. 그는 결국 그해가 가기 전에 학교에서 해임되었고, 2학년 때는 새로운 정치경제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정치경제라는 과목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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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07-26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다 읽고 나니 전 참 복 받았단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인간 이하인 선생님은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정말 마태우스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쉼표 2004-07-26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엔 참 이상한 사람들 많아요..그쵸??
저도 중학교때 가사선생님이 그런 분류여셨거든요..
지휘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뜯기도 하고 후라이팬이나 냄비뚜껑으로 머리를 치고..그당시 옆반학생은 머리맞을때 잘못 맞아서인지..입이 돌아가기도하고..오른쪽이 마비된학생도 있었지만..선생님들은 그냥 학생을 너무 사랑하나 그방법이 과격할뿐이라고 옹호하더라구요..

superfrog 2004-07-2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배 아빠가 음악선생이었는데 답이 1 2 3 4 3 2 1 2 3 4 3 2 1.. 또는 1111222233334444 이랬다던데 다행히 과목이 다르군요.. ;;;

starrysky 2004-07-2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 뽑을 때 인성 검사를 철저히, 아주아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는 글입니다. 정말 1년 동안 고생 많으셨겠어요. 부르르~ -_-++++

아영엄마 2004-07-26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나는 선생님과 기억하기 싫은 선생님... 기억나는 선생님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후자쪽이 거의 없는 걸 보면 다행인듯... 내가 너무 착한 학생이었나? ㅋㅋㅋ
담임 선생님들께 머리가 좋으니(근거:IQ 검사결과) 공부 열심히 하면 되겠네~ 라는 소리만 들었던 아픈 기억만 난다..크흑.. 난 왜 어렸을 적부터 이리도 수학에 약한걸까...

꼬마요정 2004-07-26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릴 적부터.. 소위 선생복이 많았어요~ 모든 선생님들-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빼고-이 다 좋은 분이셨거든요... 3학년 때 선생님은 엄마가 돈 안드렸다고 제가 젤 잘 하던 산수를 우를 줬더랬죠...거의 모든 시험이 100점이었는데..항의도 못했어요...ㅜ.ㅜ
그 선생님 빼고는 다 좋은 분들이셨는데...^^

panda78 2004-07-2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섭다.. ㅡ..ㅡ;; 남자 고등학교는 너무 무서워요...
저희 고등학교 교장샘은 이사장 사위라서 교장이 되었는데, 무슨 꼬투리만 잡았다 하면 "너네 아버지 뭐하셔? 장사? 그러니까 니가 그 모양이냐?" 이런 식이었죠.
저는 명찰이 없거나 지각하겠다 싶으면 학교 안갔습니다. ^^;;;

tarsta 2004-07-26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후배 한 명은 똑똑하고 바른 아이인데요. 중고등 시절 중에 1년을. 매일같이 앞에 불려나가서 따귀를 맞았답니다. 자기 이름이 불리면 교단으로 나가서. 따귀를 맞고. 그리고 들어오는 일을 1년. 다른 친구가 같이 맞을 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자기 혼자 맞았대요. S대 공대 갈 만큼 공부도 잘 했던 학생인데 말입니다. 본인도 아직까지 이유를 모른답니다. 부모님에게 말씀 안드렸냐?? 하고 물었더니 걱정하실까봐, 그리고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지금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원 참 기가막혀서... 내동생도 아닌데 정말 화나더군요. 퍽.

아영엄마 2004-07-27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제 서재에 오서셔 솔로의 유형 살펴보셔요~ 님은 어떤 어떤 유형을 합쳐놓은 솔로일까요?ㅋㅋ

LAYLA 2004-07-27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경할선생님도 있고 ~ 저런 상상하기 싫은 선생님도 있죠. 제가 여중 다닐땐 여학생 엉덩이 만지는 남자샘도 있었는걸요. 나이도 지긋해서 교감연수다니고 하다 보니 일반선생님들도 어떻게 할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ㅠ_ㅠ 마태우스님 선생님은 아예 사이코(이건 심했나..;;)같은데요. 일반인처럼 보이지 않아요..=ㅁ=;;

sweetrain 2004-07-27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고3담임이 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날, 저한테 날린 명대사가 있습니다..그날은 현충일 전날이었고요, 어머니가 위독하시니 집에 보내달라던 제게, "..비겁하게 그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자습 다 하고 가라, 그리고 니네 어머니 너무 오래 사네, 내 생각엔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실줄 알았는데.." 그 말을, 의자에 건방진 자세로 앉아 팔짱을 끼고는 절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하더군요. 뭐 전 그다음날 어머니 장례식때문에 학교에 갈 필요가 없었고, 담임은 장례식땐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장지에 와서 매장 끝나자 마자 절 소복입은채로 학교로 끌고가 야자를 시켰습니다...미안하단 말도 없이요...그 인간한테 일반사회와 정치와 윤리를 배웠습니다. 아아.

호랑녀 2004-07-2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온갖 유형의 사이코 교사들이 다 출동하는군요.
저도 풀어볼까요?
고등학교 때 윤리선생은, 명찰을 달지 않았다고 명찰 달 자리를 꼬집었죠. 그 윤리선생은 남자였고, 우리학교는 여학교였죠.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아침자습시간에 심부름시키고 자습 안했다고 손이 퉁퉁 붓도록 때렸죠. 숟가락을 들지 못할 정도로... 1등을 했는데 돈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답니다. 그 여자 남편은 약사였는데, 살 만큼 살던 사람인데 말이죠.
중1때 담임은 책을 잘 읽지 못했어요.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한 페이지를 읽기가 힘들었죠. 국어선생이었는데.
훗, 그뿐인가요? 중1때 미술선생은 점수 발표 후에 실기점수를 깎아서 전교1등짜리를 바꿔버렸죠.

더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학교를 졸업했고, 내 아이들을 또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죠.

로렌초의시종 2004-07-2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업 시간에 담배를 폈죠, 갑자기 수업하다말고 아이들에게 커피를 뽑아오라고 시켰죠, 말안듣는다고 애들입에 제 입술을 부볐죠, 저보고는 대놓고 동생보다 멍청하다고 했었죠, 중학교 3학년 1년동안이 지옥같았습니다. 날마다 아빠에게 그 인간 얘기를 하면서 난리를치고 밤마다 그 인간이 사라지기를 기도했죠. 그리고 1년 후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사건으로 그 인간은 학교에서 중인환시리에 뺨을 맞고 학교는 파면 당했지요......

mannerist 2004-07-27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식어를 잘못 쓰신듯. 그런 '걸' 셀 때는 '마리'로 세야죠. ㅎㅎㅎ

ceylontea 2004-07-2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라고 하기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도 있죠..
그렇지 않은 좋은 선생님도 많으신데..
문제는 그 말도 안되는 선생님이 아이들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나기는지...

marine 2004-07-2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 정도로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교사들의 폭력을 오히려 학생들이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할 때 아주 짜증이 났어요
이를테면 적당히 때리면 반항하니까, 아예 끽 소리도 못하게 확실하게 때려야 한다는 일부 교사의 주장을 학생들이 맞아, 맞아 하면서 동의하는 식이죠
특히 무식하게 때리는 교사의 수업 시간에는 말을 잘 듣다가, 민주적으로 대하는 선생님 시간에는 교사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학생들의 이중적인 태도가 정말 싫었어요

sweetmagic 2004-07-2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학교에는 더 심한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이런 건 교육부장관있는 청와대로 바로 찔러야 한다는 저의 얼토당토 않은 주장에 동화된 한 친구가 진짜로 청와대로 편지 썼다가 퇴학당할 뻔도 했었지요... 여튼 전 별의 별 선생님은 다 만나 본것 같습니다. 다음에 인물별로 페이퍼 한번 써야겠군요... (일주일 내내 써도 모자라겠네~)

바람꽃 2004-07-2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인성교육은 중요합니다.
딴소리; 전 장하준을 장준하로 읽어놓고는 고개를 몇번 꺄우뚱하다가 확인했답니다.
암만 생각해도 장하준은 첨 듣는 이름인 것 같아요.

털짱 2004-07-27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까지 이렇게 총천연색인 페이퍼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과연 한국교육은 사람에게 여러가지 다채로운 삶을 경험하게 하는 것 같군요. 다들 모여서 술이나 한잔 하면서 경험담을 들어보고 싶어지네요... 제 이야기도 양념으로 섞어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