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의 나는 참으로 평화로웠다. 학교에 가서 알라딘의 글을 읽고나서 코멘트를 쭈우욱 단다. 새 글을 한두편 쓰고 난 다음 논문을 쓰려고 하면 벌써 식사시간. 밥을 먹고나서 다시 그간 올라온 글에 코멘트를 달고, 남는 시간에 일을 하다 퇴근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괴롭히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알라딘에 예전만큼 집중하지 못한다. 마음이 초조하니 무리한 글을 쓰게 되고, 그러다보니 인기면에서 멍든사과님, 스타리님 등 신흥세력에게 마구잡이로 밀리고 있다.
요즘 날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모교 기생충학교실 40주년 행사다. 당일날 몸만 가면 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돈도 약간-사실은 많이-내야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40주년 기념 책자를 만드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당일날만 읽히고 마는 책인지라 돈이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학교 사람들은 그래도 행사에 오면 책자라도 하나 받아야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책을 만드는 사람이 내게 무시무시한 제안을 했다. "서선생이 글을 잘 쓰니까 우리 교실 출신 선생님들을 일일이 방문해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 좀 써봐"
그게 지난 3월초의 일이다. 5월까지 시간을 줬으니 넉넉하다고 할지 몰라도, 우리 교실 출신 선생님의 숫자가 열여섯-더 되던가?-이나 되고, 또 전국에 흩어져 있는지라 일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내가 그 일을 하기 싫었던 이유는 내가 냈던 책을 드릴 때 그 선생이 했던 말이었다.
"지금 니가 이런 거 쓸 때냐? 쓰라는 논문은 안쓰고..."
그랬던 사람이 며칠만에 똑같은 입으로 "서선생이 글을 잘쓰니까"라면서 학문과는 전혀 무관한 글을 쓰라는 걸 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같으면 죽어도 그렇게는 못할텐데, 모교에 남는 분들은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았다. 아무튼 난 개기기로 했고, 5월 31일까지 단 한줄도 쓰지 않음으로써 나름의 복수를 했다. 그쪽에서도 아무 연락이 없었고.
그런데...지난 7월 초, 인정평가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대로 말했다. 한줄도 안썼다고, 미안하다고. 그의 말이다.
"7월 31일까지 시간을 다시 줄테니 써봐라"
난 바빠서 도저히 못쓰겠다고 했다. 알라딘도 평정해야 하고, 또 학과장이 되어 일이 많다고. 그랬더니 그가 화를 낸다. 우쒸, 부탁하는 처지에 화를 내다니. 내 개김성은 딱 거기까지였고, 난 "그, 그러죠"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 뒤 난 가끔씩 날을 잡아 그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찾아갈 시간도 없거니와 그런다고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가 알아서 쓰기로 했고, 업적이나 근황은 재미가 없으니 평소 남들이,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에 대해 쓰자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여섯명을 썼으니 열명쯤 남은 셈이다.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너무너무 잘썼다. '캬!'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내 글이 다른 범상한 글들과 한 책에 묶이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보고싶은 마음을 이기며 선생님은 오늘도 실험실의 불을 밝힌다"
"우리 후학들이 감자를 먹지 않게 하는 건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우린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으음, 써놓고 보니까 별로 잘쓴 것 같지 않은 듯 싶지만, 그래도 믿어야 한다. 정말 명문들이다.
여섯명까지는 잘 썼지만, 문제는 나머지다. 연구업적이 많은 경우엔 글을 쓰기가 참 쉽다. "Excellent님을 떠올릴 때면 난 이 단어가 생각난다"
"우리 학회에서 SCI 등재 논문이 가장 많은 분이다"
"그 유명한 MBP(잡지 이름)에 매년 한편 이상의 논문을 싣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도대체 뭘 써야 할까? 같이 술을 마신 기억이랄지, 인간성이 좋다는 등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걱정이 된다. 10년 후 닥칠 50주년, 그리고 60주년 때 내 후배가 나에 대해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알라딘 사이트를 평정하기도 한 서민 선생님은 주량은 약하나 술을 가장 꾸준하게, 최선을 다해서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을 여러 권 냈지만 팔린 책은 하나도 없다]
십중팔구 이런 사태가 날 것에 대비해, 그때도 내가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쓴다는 것은 내겐 겁나는 일이다.
쓴 걸 모교 선생님한테 미리 메일로 보냈다. 그 선생님 왈, "사진도 있으면 좋겠다!" 아니 사진 정도는 자신이 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사진을 달라면 그중 몇 명이라도 자신에 대한 글을 미리 보겠다고 할지 모를 일이고, 더 큰 이유로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