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엊그제, 연락이 왔다.
"서민선생님, 의예과장 임명장 수여식이 있으니 수요일날 본부로 가셔야겠는데요"
한남동에 있는 D대 서울캠퍼스, 처음 발령받을 때 한번 가고, 남미의 잘 모르는 나라 대통령이 연설한다기에-자리수를 채워야 했다-갔던 데 이어 세 번째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아침에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뛸 듯이 좋아하신다. "어머나, 우리 아들이 과장 되는 거야? 임명장 받으면 꼭 엄마 보여줘라"
"네" 하고 대답을 했더니 옷 얘기를 꺼내신다. 그냥 평소처럼 입겠다는 걸 극구 말리시는 어머니, "못써! 양복 입고 가야지"
그래서 난 이 더운 날씨에 넥타이에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혹시 말을 시킬까봐 연설문도 준비했다.
"전 반장을 한번도 못해봤거든요. 이런 큰 보직은 처음이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이히히"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일단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한 50명은 넘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임명장을 주다간 한시간이 금방 갈 것 같았다.
'저들이 다 과장인가?' 아는 사람도 있다. 가서 왜왔냐고 물어봤다.
"주임교수들은 다 불렀대"
으음, 그렇구나. 그렇게 된 것이로구나. 총장의 말이다.
"그냥 보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임명장은 각 단과대학으로 보냈습니다. 이미 받으셨지요?"
난 아직 못받았는데.
그러니까 오늘 자리는 임명장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주임교수들을 불러놓고 회의를 한 거였다. 기획실장, 교육처장 등 '장'이 붙은 사람들이 연설을 한다. 언제 끝나나 지겨워서 노트를 꺼내 그림을 그리고 있었더니 총장이 갑자기 이런다.
"적으시는 분도 계신데, 그러지 마세요. 회의록은 다 공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작한 지 50분이 될 무렵, 즉 사람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때, 총장이 옆에 앉은 부총장에게 묻는다. "혹시 한말씀 하시겠습니까?"
이런 경우 거절하는 사람을 난 거의 본 적이 없다. 손을 내젓기에 혹시나 했는데, 마이크를 달라는 말이었나보다. "간단하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간단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는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다시 정리하고 없던 내용을 추가하고 부연했으며, 첨언에 추신까지 덧붙여가며 11분을 혼자 얘기했다. 이제 끝인가 했다가 기절할 뻔했다. 부총장이 한명 더 있었던 것이다! 부총장을 많이 뽑는 이유가 회의를 오래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포기하고 있으려니 그가 할말이 없다고 한다. 총장이 되묻는다. "정말?" 그의 대답, "네" 난 다시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머리 뒤에서 광채가 났다. 역시나 그는 인간이 아니라 천사였던 것이다. 세상은, 이따금씩 아름답다. 우리가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