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데!"
자몽을 상자째 쌓아놓고 먹던 파란여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4월 26일, 9시 뉴스에 나온 사람은 분명 카이레였다. 지난 번개 때 만난 적이 있는 카이레가 초췌한 표정으로 수갑을 차고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라딘을 상대로 지능적인 범죄를 저지른 카이레(24세. 본명 가일해)가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카이레는 배달된 책을 안받았다고 우겨 환불을 받는 방법으로 300만원 가까운 피해를 입힌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은 카이레의 지하창고를 수색한 끝에 빼돌린 책 뭉텅이를 발견하고...]
"세상에! 저럴 수가! 이런, 퇫!"
너무 놀란 나머지 파란여우는 자몽을 소금에 찍어먹고 말았다.
1년 후.
"어머나!"
전화통화를 하던 아영엄마는 TV 화면에 나온 사람을 보고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알라딘을 상대로 고도의 지능적인 범죄를 저지른 카이레(25세. 본명 가일해)가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카이레는 책을 구입할 때 부여되는 적립금을 자신의 계정으로 들어오게 하는 프로그램을 알라딘에 설치해 570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은 카이레로부터 범행일체를 자백받고... 참고로 카이레는 1년 전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범행을 벌이다 집행유예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여, 여보세요? 치치직..." 아영엄마는 결국 전화기 한 대를 새로 사야했다.
2년 후.
"끼익"
문이 열렸다. 보따리를 품에 안고 한 여인이 나왔다. 꾸미지 않았지만, 여인은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자, 먹어"
한 여인이 두부를 내밀었다. 카이레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뇌쇄적이었다.
"난 진우맘이라고 해. 먼저 출소한 폭스바겐 알지? 그가 그러더군. 자네가 멋진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카이레는 말없이 두부를 입에 넣었다. "간장 같은 건 없어?"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진우맘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멋진 일을 자네 혼자 다 먹으려 하면 체하지. 어차피 자네 혼자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만"
진우맘은 뒤를 돌아보고 손뼉을 쳤다. "애들아!"
뒤에 서있던 사람들이 카이레에게 다가왔다. "소개하지. 이쪽은 박치기의 왕 오즈마, 그 옆엔 컴도사 마립간, 여긴 우리 조직의 브레인 플라시보, 이쪽은 깻잎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게 특기인 갈대, 나와 같이 있는 식구들이지. 알아두면 도움이 될걸새"
그날밤, 카이레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다음날. 진우맘의 저택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다들 온 것 같군"
진우맘이 좌중을 훑어보았다.
"자, 이제 자네의 기발한 계획을 말해주겠나?"
카이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70%가 URL에 주소를 써넣고 접속을 합니다...."
카이레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우맘을 시작으로 기립박수가 나왔다. 그 박수는 세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제 그만!"
진우맘이 손짓을 하자 박수 소리가 멎었다.
"아주 좋은 게획이긴 한데...자넨 전에도 알라딘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적이 있더군. 왜 하필 알라딘이지?"
카이레가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책 속에는.... 꿈이 있으니까요!"
카이레는 피곤했다. '오늘 도대체 몇시간을 한거야?' 하지만 디데이에 맞춰 거사를 하려면 좀더 서둘러야 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자취집 앞에 도착했을 때, 카이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회사의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서있는 걸 보았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그가 이름을 불렀다.
"카이레 씨!"
"누구...시죠?"
사내는 선글라스를 벗고 지갑을 꺼냈다. 눈이 너무 작아서 카이레는 그만 웃고 말았다.
"전 마태우스라고 합니다. 강력계 형사지요"
"그런데요?"
"카이레님은 알라딘 관련 범죄로 두차례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그게 모두 4월이더군요. 일주일 후면 4월이 됩니다. 님께서 조용히 4월을 보낼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리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마태우스는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비만이면 더위를 탄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요즘 이사람과 자주 만나던데,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요?"
그가 꺼낸 사진 속에는 진우맘의 얼굴이 있었다.
"그냥 아는 선배예요.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먹고살기 위해 만나는 건데, 왜 참견이죠?"
"진우맘이 한때 부천 일대를 주름잡던 백공주파의 보스였던 것도 알고 있나요?"
카이레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지금은 은퇴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마태우스가 배에 힘을 주면서 말해다. "자, 잘 들어요. 전 한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라고 믿고 있어요.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몰라도, 항상 당신을 지켜볼 겁니다"
"그렇게 하시던지" 카이레는 그 한마디를 톡 던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뛰었다.
"아니, 이런 멋진 이벤트가 있단 말야?"
연보라빛우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알라딘 흑자기념, 대박 이벤트! 재고 책 대폭 할인! 선착순 200명에게만]
선착순 200명에 한해서 책을 정가의 20%에 팔고 있었다. 부엌에 유령이 산다는 내용을 다룬 괴기소설 <소울 키친>, 가을에 본 세계의 명산을 담은 화보집 <가을산>, 주인을 찾아 300킬로를 달린 진돗개의 실화 <복돌이>, 카퍼필드의 마술 비법을 담은 <SWEETMAGIC> 등등의 진귀한 책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였다. "현금만 받습니다"라는 조항이 맘에 안들었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터였다. 연보라빛우주는 무려 34만원어치의 책을 선택한 뒤, 계좌번호를 적었다.
검은비는 50만원이 넘는 책을 주문했다. 'Toofool'은 23만원어치를, 수니나라는 정확히 40만원어치를 주문했다. 토끼똥은 33만원어치를, 손이 큰 panda78은 100만원이 넘는 책들을 클릭했다. 그날 하루동안 은행에 입금된 액수는 총 2천만원에 달했다.
'아무래도 수상해'
마태우스는 카이레의 집 담을 넘었다. 집안은 마치 사람이 안사는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엉? 이게 뭐지?'
책상 위에 편지가 한통 놓여 있었다. 겉봉에 '마태우스 형사님께'라고 씌어 있다. 마태우스는 자리에 앉아 봉투를 뜯었다.
[마형사, 범죄를 없애느라고 고생이 많네. 니가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난 지금쯤 브라질로 가고 있을거야. 브라질. 축구와 삼바춤의 나라, 브라질 말이야]
마태우스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난 알라딘 방문자의 많은 수가 URL에 주소를 써넣는 것에 관심을 가졌어. 중요한 것은, 알라딘의 스펠링이 'aladdin' 즉 'd'가 두 개라는 거야. 그래서 난 'www.aladin.co.kr'이라는 유령사이트를 개설하고, 알라딘의 초기화면을 옮겨 심었네. 그리고 책값을 20%에 준다는 허위광고를 때렸지. 물론 선착순 200명도 구라야. 이틀 동안 내게 송금된 돈이 얼마인 줄 아나? 놀라지 마. 무려 1억원이 넘어. 음하하하....]
"이런 젠장!" 마태우스가 편지지를 꽉 쥐었다. '당했다!'
[...넌 궁금할 거야. 내가 왜 그렇게 알라딘에 집착하는지. 내 꿈은 말야, 브라질에 한국책을 파는 책방을 만드는 거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는 내 이모가 살고 있어. 이모와 조카들은 한국책을 읽고 싶어하지만, 한국어로 된 책이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지. 스페인어로 된 책이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책은 그 나라 국민의 감정과 정서가 섞여 있는 거 아니겠어? 내가 책방을 만들면 이모와 조카들은 물론 거기 사는 교민 2천여명에게도 큰 도움이 될거야. 참, 이걸 읽으면 나를 잡고 싶어지겠지? 난 지금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고 있으니,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 바보 형사, 안녕!]
마태우스는 부리나케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인천 공항이요!"
'제기랄, 이렇게 당하다니!' 마태우스는 자신이 컴맹인 걸 후회했다. '앞으로 형사 되는 사람은 컴퓨터 시험도 봐야겠군! 세상 참...'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8시10분이었다.
"브라질 가는 비행기, 몇시에 있나요?"
미모의 안내원이 답했다. "8시 15분이요" 명찰에 '앤티크'라고 씌어 있었다.
마태우스는 신분증을 꺼냈다. "경찰입니다. 비행기를 수색해야 하니, 비행기 이륙을 잠깐 지연시켜 주세요"
마태우스는 비행기에 올라타고 승객들을 훑어보았다. "저기 있다!"
청자켓에 청바지를 입은 승객 하나가 자고 있었다.
"손들어!"
마태우스는 승객을 흔들어 깨웠다. 승객은 눈을 뜨더니 입가에 흘린 침을 닦았다. "왜그러세요?" 전에 본 카이레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태우스가 물었다. "당신, 누구야?"
승객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전 마냐라고 하는데요, 어떤 미녀분이 100만원과 비행기표를 주면서 브라질에 갔다와 달라고 했거든요..."
마태우스는 황급히 비행기를 빠져나가 앤티크에게 갔다.
"혹시 브라질에 가는 다른 비행기가 있습니까?"
앤티크는 비행 시각표를 찬찬히 살펴봤다. "아, 한시간 쯤 전에 개인 전용기 한 대가 이륙했습니다. 행선지가 브라질로 되어 있네요"
허탈해진 마태우스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나 형사님!" 앤티크가 놀라서 다가왔다. "왜그러세요! 너무 무리하셨나본데, 제가 실론티라도 한잔 갖다드릴까요?"
진우맘은 자기 방에서 부하들을 닥달하고 있었다. "뭐야? 돈챙겨서 도망갔다고? 도대체 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에잇! 찰싹!" " 윽!" "찰싹!" "윽!" 깊은 밤이라 그런지 진우맘의 타작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퍼졌다.
석달 후, 브라질리아. 교민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책 서점의 개관식이 열렸다. 책방 이름은 <냉정과 열정 사이>였다.
-The end-
*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나서 느끼는 게 있어서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너그럽게 읽어 주시길.
** 실제로 이 범죄는 불가능합니다. 혹시나 하고 www.aladin.co.kr을 쳐 봤더니, 알라딘 사이트로 알아서 들어와지더군요. 그러니 한번 해볼까 하는 분들, 포기하십시오. 음하하하.
***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제가 재미있게 본 영화 <스틸>을 베꼈습니다.
**** 저는 카이레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한때 그분처럼 글을 쓰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카이레님은 제 찬사가 부담스러우시겠지만, 그건 글 잘쓰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수고로움이 아니겠습니까. 이 글은 카이레님께 바치는 오마주이니, 불쾌하지 않게 읽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