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학교 때 했던 동아리 친구들끼리 모임이 있었다.

총 11명 중 9명이 참석하는 놀라운 출석률을 기록했는데,

한명은 오는 길에 응급환자가 생겨 다시 병원에 갔다가 왔고,

또 한명은 아이 학예회에 참석했다 합류를 하는 열성을 보였다.

85학번이니 만난지 벌써 26년째가 다 되건만

아직도 이렇게 모일 수 있다는 게 참 뿌듯한 일이다.

동아리에서 나보다 3년 아래인 한 후배는 작년에 만났을 때

"형, 우리 기는 졸업하고 이번에 처음 모이는데, 형 나올래? 나오면 좋아할거야."라고 말했는데,

후배들 모임에 나오라고 하는 것보다 '처음 모인다'는 말이 좀 더 황당했다.

동아리 시절 가장 일 잘하고 출석률도 좋았던 게 바로 우리기였기에,

졸업 후에도 이토록 잘 뭉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마흔 중반에 이렇게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참 고마웠다.

우리 기가 동아리 역사상 가장 잘난 기였기에

별반 잘하는 게 없었던 난 할일을 찾지 못해 방황을 했었다.

예과 때는 웃기는 모드가 어느 정도 통했지만,

진료봉사동아리인만큼 본과생은 일을 해야 했으니까.

어쩌면 동아리를 그만둘 수도 있던 나를 친구들은 붙잡아 줬고,

결국 난 그 동아리와의 인연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하고, 어느 정도 바쁜 세월을 보내고 난 뒤엔 드디어 내가 할 일이 생겼다.

모이자고 연락을 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일은 내가 참 잘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난 어디 괜찮은 음식점이 있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메모를 한다.

 

아내한테 이런 핀잔을 들었다.

"여보처럼 친구 많이 만나는 사람이 어딨냐?"

아내는 내가 자주 늦게 들어온다는 걸 탓하는 거였지만,

난 그런 야단을 맞으면서 기분이 좋았다.

친구를 사귄다는 건 어찌보면 보험에 드는 것과 같다.

친구관계를 유지하려면 돈과 시간이 들고,

또 성격차 때문에 생기는 갈등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친구들은 중년이 되면 내 삶의 자양분이 되어 준다.

이 나이에 새로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해 보라.

"쟤는 원래 저래"라는 이해심이 없는 사귐은 늘 조심스럽고, 그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는다.

별반 잘하는 건 없었지만 내 젊은 시절은 그런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놓은 삶이었고,

그 보험들은 다 지급률이 300%를 넘는 고수익 보험이었다.

그리고 난 지금 그 보험금을 하나씩 꺼내가며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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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1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는 소리없이 인간관계를 청산 중이어요. 나를 시기하거나, 내 마음을 계속 다치게 만드는 사람들을 더이상 친구로 남겨놓지 않는 작업들. 마음에서 아예 잘라내고, 그저 소리 없이 그 친구들의 마음에서도 저를 지우는 작업들. 그와 동시에 아주 나이 들어서도 노구를 이끌고라도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들 곁에 남고 싶다는 생각에, 그들과는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서로를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일부러 할퀴려 하지 않는, 의견이 늘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내 마음의 갑갑한 구석이나 기쁜 구석을 내보일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보험 중에서도 국가 의료 보험 축에 속하는 것 같아요. 아내분의 핀잔이 기분 좋은 것이 당연해요, 저도 마태우스 님이 부러운걸요.

마태우스 2010-01-12 13:22   좋아요 0 | URL
주드님, 님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사람들을 계속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저랑 이념이 다른, 그러니까 여자 나오는 술집만 주구장창 가는 친구들과 결별했습니다. 그네들은 "우리가 만난지 몇년인데 이러냐"고 했지만, 중요한 건 만난 햇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친구란 만나면 편해야지, 계속 '이게 아닌데' 하면서 앉아있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글구 님은 젊으니 앞으로 얼마든지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다고 봐요. 글구...저도 님 친구로 끼워주세요!

비로그인 2010-01-12 13:35   좋아요 0 | URL
아이 참 마태우스 님이 제 벗이 되어 주신다면 저야 황송황송 굽신굽신. 이렇게 사고가 유연하고 지성적인 분을 만난 것이 참 좋아요. 알라디너가 된 것이 무척 뿌듯하달까요. 전 제 친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알라딘에는 참 잘도 술술술 털어놓는데, `님 제정신이삼' 이런 댓글 대신 그런 때가 있어요, 라는 댓글을 처음 본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메르헨 2010-01-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자꾸 친구들 만날 기회가 멀어지네요. 다들 바쁜가 봐요.
시간이 흘러서...저도 마흔 중반쯤 되면 다시 모이게 될까요? ^^

Mephistopheles 2010-01-1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야 말로 가입과 동시 형사합의금까지 보조해주고 고액배당까지 보장받는 알짜배기 보험이군요.

무스탕 2010-01-12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월 19,900원이면 해결되는 보험보다 훨씬 좋은 보험이네요.ㅎㅎ

제게도 1984년부터 시작된 보험이 있답니다.
여자들의 우정은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우린 아직까지 즐겁고 반가운 친구들이에요 :)

hnine 2010-01-1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엔 있는 듯 없는 듯 하다가 보험보다도 더 빛을 발휘할 때가 있지요.
(저와 같은 학번이셨네요^^)

비연 2010-01-1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동기들끼리 자주 만나는데, 참 그만한 만남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이들수록 우정에 기대는 마음에 생기는 것...보험 맞네요~^^

뷰리풀말미잘 2010-01-12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는 투자 마인드가 조금 다르신듯. 저는 보험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주의라서 실손 보험 위주로 들어놨습니다. 저도 나이가 차고 십년 단위의 회상이 자연스러워 지면 좀 후회가 들까요. ㅎㅎ 그때 고수익 보험을 들어놓는 거였어!

마태우스 2010-01-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르헨님/그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다들 바쁘더라도 계속 만남의 끈은 놓고 있지 말아야죠. 위에서 언급한 친구들은 동아리라는 끈을 유지했기에 바쁜 게 어느 정도 지나간 후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메피님/혀, 형사합의금은 잘 모르겠는데요^^ 알짜배기는 맞는 것 같습니다.
무스탕님/여자들 우정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멋져요.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더 넓은 것 같아서요. 우리 남자들은요 누가 모임에 잘 안나오면 뒷다마를 깐답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걸 이해한다고 하더군요. 27년 된 보험이면 아유, 수익률이 대단하겠군요^^
hnine님/아앗 님이 저랑 같은 학번이라니, 반갑습니다. 앞으로 우리 잘해봅시다^^
비연님/그만한 만남이 없다고 느끼는 거, 아주 좋은 태도입니다. ^^
말미잘님/지금부터 준비하시면 후회 안하십니다. 제가 조교 때, 저희 교수님들은 단 한번도 같은 직장 내 친구들 말고, 밖에 있는 친구를 만난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전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순오기 2010-01-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는 보험이라는 정의가 명쾌하군요.
마태님은 알라디너의 보험이라는 것도 아시는지요?^^

Seong 2010-01-12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그 보험 해약중입니다. 친구가 좋기도 하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상처주는 경우가 너무 많더군요. 괜히 시니컬해졌습니다. ^.^;;;;

이네파벨 2010-01-1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보험은 상당수 중도해지된 듯....ㅠ.ㅠ
아니, 해약까지는 아니고...그 뭐시라..."실효" 상태......

바쁜 삶 속에서 옛친구들 꾸준히 챙기고 연을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듯 해요. 더구나 저처럼 게으르고 무심한 성격일 경우엔........

제가 좋아하는....아이들 노래 가사가 떠오르네요.
Make new friends but keep the old. One is silver and the other gold.
정말 진실된 격언인 듯.

밀린 보험료 내고...소중한 보험들을 되살려야겠네요.

(오랜만에 마태님 서재에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종종 글은 읽어왔는데...^^)


pjy 2010-01-12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입할때만 묻지고않고 따지지도 않는 보험...줄때는 왜이케 인색한지~ 보험대신 친구가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훨씬 더 심적으로 도움되죠~~근데 한달에 한번 보험돈내는만큼 친구들도 한달에 한번은 만나야되는데 이게 또 쉽지 않죠~ 마태님, 편한 친구들이랑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세요^^

Joule 2010-01-1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보험 여기에도 하나 있어요. :>

뭐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애도 없고, 개도 없고, 집도 없답니다.

세실 2010-01-1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보험으로 생각하실까요? ㅎㅎ
맞습니다. 친구는 보험이죠. 종신 보험.
사무실에서 힘들때 전화해서 흉 볼수 있는 친구,
나의 단점까지 모두 내보일 수 있는 친구 좋죠~~

카스피 2010-01-13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친구들은 자신의 형제라고 할수 있지요.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많이 계신 마태우스님이 무척 부럽네요^^

summit 2010-01-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때 만날 친구들이 그리워지는 글이군요.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생각만 하면 언제나 든든한 사람들이 친구(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인 것 같네요^^

마태우스 2010-01-14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mmit님/생각만 하지 마시고 자주자주 만나세요. 모든 게 다 나중의 추억이 된다니깐요^^
카스피님/감사합니다. 제가 잘하는 건 그다지 없어도, 친구는 많답니다^^
세실님/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저도 님한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줄님/모, 몰랐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pjy3926님/안녕하세요 제가 인사를 드렸는지 모르겠네요. 보험보단 친구가 훨씬 더 나은 것 같은데요, 시간을 많이 뺏는다는 점에서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가 않더라구요. 그래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어요.
이네파벨님/음, 해약한 보험을 다시 드는 사람은 없지요. 해약한 친구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친구랑 결별할 정도면 뭔가 문제가 있었을텐데, 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기에 다시 만나도 똑같을 것 같네요. 오랜만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Tomek님/아니다 싶으면 해약은 빠를수록 좋답니다. 오래됐는데 안맞는 친구도 많이 있더라고요
순오기님/그,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감개가 무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