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저녁, 난 늘 그렇듯이 술집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곡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100미터 쯤 걸으면 된단다. 어느 높은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지하주차장에서 차가 나오고 있다. 난 그 차를 흘끔 보면서 주차장 차단기 앞에 설치된 건널목을 건넜다. 4분의 3쯤 건넜을 무렵 요란스런 클랙션 소리가 들린다. 난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나는 쪽을 봤다. 그 차가 내 곁에 서더니 창문을 내린다. <개그야>에 나오는 사모님 차림의 여자가 날 째려보고 있다.

“차 지나가는데 꼭 그렇게 먼저 가야 해요? 기다렸다 가도 되잖아?”

그곳은 자동차 전용도로도 아니었고, 건널목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귀에 따갑게 들어온 ‘보행자 우선’이란 경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잠깐 브레이크 한번 밟아주는 게 그다지도 기분 나쁜 걸까. BMW 앞에서 내가 걸리적거린 게 그리도 불쾌한가.

“저기 건널목 표시 안보여요?”

난 작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날 경멸스럽게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참나....."

그 말과 동시에 창문이 닫혔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차는 떠났다. 그녀는 떠났지만 난 한동안 그 차 뒤를 바라봐야 했고, 술자리에서 독주를 몇잔 원샷한 뒤에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곳은 타워펠리스였고, 나같은 사람이 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친구 중에 거기 사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타워펠리스 안에 있는 중국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돈에 좌우되는 허접한 인간인 나는 말로만 듣던 타워펠리스에 내가 들어왔다니, 하면서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내 반응에 친구는 혀를 차며 말한다.

“뭘 중국집 가지고 그래. 난 아파트 안에 들어가본 적도 있는데.”

친구나 나나, 그게 그거다. 한번 가봤다는 게 그리도 큰 자랑이라면 거기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얼마나 대단할까.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목에 힘을 주며 “타워 팰리스요”라고 대답하고, 택시를 타고 귀가할 때면 “타워 팰리스 가주세요”라며 혀를 굴리지 않을까. 그런 말에 꺼뻑 죽는 나같은 사람이 세상엔 많기에, 그 사모님도 감히 자기 차 앞을 지나간 사람에게 핀잔을 줄 수 있었으리라.


아파트가 지금처럼 대세를 이루기 전, 그땐 어디 산다는 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평창동이나 성북동처럼 부자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있긴 했지만, 내가 살던 서교동만 해도 좋은 집과 좋지 않은 집이 섞여 있었고, 그 집을 가보기 전까진 그가 부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을 처음 방문했던 고등학교 선생님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리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소 하고 다니는 걸로 보아 어려울 줄 알았는데(그래서 그 선생은 수학여행 때 입고 가라며 바지를 내게 선물했나보다) 그 정도는 아니네요.”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무슨동 센트레빌, 무슨동 아이파크, 이런 것들이 영국의 귀족 작위처럼 군림하고, 잘사는 집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며 못사는 집 아이를 배척한다. 사는 곳 자체가 권력이 되어버린 우리네 세상, 발전의 혜택을 누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가끔은, 옛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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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2-1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는 거주공간이 편하고 좋아서...라기 보다..
상대적인 우월감이 아파트 값의 50%라고 하는 농담아닌 농담을 접한적이
있었답니다..^^

부리 2006-12-1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못가본 모양이군요. 언제 저희집에 함 오시죠. 타워.....에 삽니다.

프레이야 2006-12-1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 사모님, 어이없네요. 독주로 속을 푸셨다니 마음 아파요. 외모, 나이, 이제 사는 곳마저 권력이 된 세상 ㅜㅜ 저도 부리님처럼 타워...에 사는데 헉 뜨금해요 ㅋㅋ

무스탕 2006-12-1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애들이 다니는 학교엔 두 부류가 섞여있죠.
제가 사는 15~22평의 소형 아파트 아이들과 40~50평의 대형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지들끼리 어떻게 구분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들 이야기에서 슬쩍 차이가 나요 -_-
솔직히 부럽거나 슬프거나 그런건 없어요.
가끔 하는 말(은 들은적이 있고..)이나 행동(을 본적이 있던가?)에서 웃겨~ 를 외치죠.
이것도 자격지심??

다락방 2006-12-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 아파트 광고 있잖아요.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여자들끼리 서로 알아본다는. '저여자 지난번에 괜찮다 했더니 우리 아파트에 사는구나.' 이거요.
전 이 광고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거 있죠.
그래, 나 거기 안산다, 그래도 나 괜찮은 여자다. 하고 막 혼자 궁시렁 거려요.

하하. 무스탕님 말씀처럼 저도 자격지심인가봐요.

Mephistopheles 2006-12-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보신 광고는 푸르XX라는 CF만 찍는 모 여배우가 등장하는 광고일껍니다..^^

비로그인 2006-12-1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북동, 하면 저는 왜 늘 성북동 비둘기가 생각나면서 각박한 동네로세..하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아마 지방에 거주해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가 뇌리에 너무 깊숙히 박혔나 봅니다.

sooninara 2006-12-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마을엔 타워~~사시는 분이 안보이죠?
알라디너는 알라디너를 알아본다..이런거 찍어 볼까요?ㅎㅎ

깍두기 2006-12-1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뭐 그딴 무식한 여자가 있답니까? 재벌2세 마태우스님을 몰라보다니......

2006-12-11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12-1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싸가지를 모르는 싸모님들은 육두문자 써가면서 무식하게 상대해줘야 하는건데.

건우와 연우 2006-12-1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9년쯤인가요. 사위에게 70억짜리 빌딩을 간판걸라고 선물했다는 명품을 치렁치렁 두르신 할머니를 보며, 내가 사흘 굶지 않은게 저 할머니에겐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를 되뇌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태우스 2006-12-1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님/아 네....그렇군요. 제가 강북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그런 분이 주위에 없어서요
깐따삐야님/제가 넘 온순한 게 원망스럽더이다..
속삭이신 분/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깍두기님/제말이 그말입니다. 재벌2세가 아니었음 서러울 뻔..
수니님/부리가 남산타워에 산다는데요^^
주드님/다 그렇죠 뭐. 저도 부산 하면 주드님밖에 생각이 안난다는...^^
메피스토님/프루지오라면 김남x군요!
다락방님/저희는 저희 나름의 자존심이 있죠. 어머 다락방님은 역시 알라디너였군요!
무스탕님/그런 얘기, 많이 들었지요. 제가 아는 아파트에선 놀이터도 평수 작은 곳에선 접근이 안되도록 간막이를 쳐놨더군요..
배혜경님/아앗 그렇담 님도 남산타워??? 매우 춥던데.... 괜찮으신가요
부리님/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배헤경님께 안부전해 주세요
메피님/그러니 그 돈 들여서 사는 거겠지요... 편안함만을 위한다면 굳이 거기서 살 필요까지....


해리포터7 2006-12-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단지 아파트에 이사가지 않는것도 그것때문인데요..같은 아파트라도 몇평대냐에 따라서 애들이 무리지어 논다니..웃기는 세상이지요?
안그래도 몇주전에 서울사는 작은아버지들이 오셨을때 우리집같은 건 서울에서 여섯배는 줘야 산다고 하는 소리에 왜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 났는지...ㅋㅋㅋ

춤추는인생. 2006-12-12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아니라 생각되는데 전 타워에서 인라인을 과외하는 꼬마도 봤어요.
많이 엎어지면서 친구들하고 배워도 될터인데... 좀 과하지 않나 싶었어요.
저 타워 안살아요 ;;

chika 2006-12-1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그 차, 화악 긁어버리고 싶지만. 주인 잘못만난 차가 뭔 죄가 있간디요~

모1 2006-12-1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여자분 웃기네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먼저지 차가 먼저냐구요. 우리나라는 교통의식이 이상한가봐요.

비로그인 2006-12-1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아주모테치카님의 글을 보니 생각나는 일화에요. 제 친구네 아파트 주차장에 모 번드드르한 외제 세단이 늘상 어물쩡, 두 칸을 차지하고 주차를 해놓았더랬어요. 어느날 화가 난 친구가 포스트잇에 `계속 이렇게 주차하면 못으로 긁어버릴겁니다'라고 써붙여놓자 그 다음날부터 아주 얌전하고, 주차 선 안에 주차를 해놓곤 했다더군요.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