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부제는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이다. 책의 제목과 부제만으로 판단 할 때는 저자가 매우 격한 감정을 쏟아 부을 것만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선비정신’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조선의 지배세력이었던 선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역사적인 증거물들을 통하여 명쾌하게 시도하고자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평가의 기준설정이다. 

 

 




올바른 평가의 기준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은 국민들의 ‘선비’라는 용어 인식을 역사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고 그 용어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함으로서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실상을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라는 대상을 평가해야하고 그 평가를 위해서는 평가의 객관적 근거를 장치해야 했다. 저자는 이 평가의 기준장치를 매우 명료하게 설정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지극히 개관적이고 합리적이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어느 내용보다 가장 값진 소득이 바로 ‘평가 기준’이라는 바로 이 대목이라 여겨진다. 




 바른 평가의 기준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편견은 평가의 오류를 낳는다. 오류는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숨어있다. 단순히 개인적 범주에서 판단과 정의가 감금된 상태라면 위험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개개의 인식이 타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고, 결과론적으로 그의 사고와 행동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동기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책을 저술하는 주체이다. 시중에 출시되어 읽히는 도서들을 저술한 주체가 역사이든 인물이든 그 어느 팩트에 대한 평가의 적절한 기준을 갖추고 있지 못할 때, 그 결과물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독자들은 그 영향으로 바르지 못한 인식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수많은 과정들이 세대를 거듭한다면 어떤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일까... 단순한 오류의 문제를 넘어 왜곡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이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나라 전체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물들을 저자는 이 책에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선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충실했으며, 보다 나은 가치의 창출을 위해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 물론 이는 해당 인물의 시대적 기준에 의거한다. 

2. 인물의 삶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가. 현재와 관계하는 역사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3. 인물의 직책, 지위에 부여된 기대에 얼마나 잘 부응했는가. 저자는 이를 인간 본연의 책임감과 해당 능력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상의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는 보편적인 평가의 기준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이 보편적인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여 역사의 인물을 바라보고 평가하여 저술한 관련도서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는 개인적으로 매우 회의적이다. 이 책이 수많은 교양 역사서들과 차별되어야 하며 별점 다섯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 평가의 기준을 명료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그를 근거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장치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선비’라는 용어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 

최근 미국을 위시하여 경제 열강들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만난 대한민국은 경제력의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수용하는 입장에 있다. 이는 마치 청나라에게 조선의 국왕이 한 겨울 얼어붙은 땅 바닦에 피를 흘리며 머리를 찧던 사건, 즉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수치를 맞본 조선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국민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이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 때에 대한민국의 출판계,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양서들의 저자들은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정체성의 일환으로 삼고자 해왔다.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교의 부흥과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말이기도 하다. 유교는 조선을 지배해온 강력한 이념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의 전통 문화적 요소로서 배제할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교의 부흥’이라는 공식은 과연 현대의 우리에게 적합한 성질의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조선의 유교를 현대에 부흥시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역사적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타당성을 부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선비에 대한 저자의 평가기준으로 볼 때 유교는 우리 역사에서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유교라는 조선의 지배이념을 새롭게 이해해야 할 필연성의 재조명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연유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받들며 조선을 지배해왔던 조선의 선비를 보편적이면서도 엄정한 평가의 기준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현대의 대한민국이 유교를 어떻게 부활시킬 것 인가하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의미를 단순히 우리의 것이라는 미시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때 다시 한 번 국가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계하고자 한다. 







저자 계승범, 재귀준거의 딜레마를 마주하면서도 조선 선비의 진면목을 드러내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선비라는 인물을 조선이라는 영토 안에 가두어둔 채 미시적인 안목으로 서술한 수많은 교양서들과는 달리, 저자 계승범은 조선의 성리학을 거슬러 중국이라는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이 책을 읽은 후의 독자들은 분명히 조선에 한정된 미시적 역사인물로서의 선비가 아니라 조중관계 속에서 거시적 선비의 모습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의 공자, 맹자, 노자의 가르침이 중국에서의 유교와 사회와의 관계하는 방식과 대조적으로 조선에서 공맹노자의 가르침을 선비들이 이용하고 있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며 심지어 그 얼마나 통탄스러운 것이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연 공맹노자께서 자신들의 학문을 이용, 대중을 혹은 국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조선의 선비들에게 과연 무어라 말했을까...마치 이 상황은 변질된 막시즘에 저항하며 칼 막스 스스로가 막스주의자이기를 거부한 상황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후대의 우리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조선의 거룩한 선비들이 과연 그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어떤 행동을 했고 그들의 언행이 조선 사회에 끼친 결과물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막연한 개념의 선비’가 아니라 ‘분명하고도 또렷한 조선 선비’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이 지배했던 조선의 진면목을 조목조목 따져 간다. 저자의 일목요연한 글을 읽으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슬픔을 느끼는, 혹은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수많은 역사관련 저자들이 밝혀내기를 꺼려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 가지, 혹은 단편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선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왜곡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라더라도 말이다. 하여 이제 '선비'라는 명제를 그 누군가는 다루어주어야 하며, 어쩌면 치명적인 아킬레스건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의 치부를 공개하는 일에는 그만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니 말이다. 때론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은 우리의 과거, 즉 현재와 분리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일종의 재귀준거이다. 한 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학자로서 재귀준거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자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조선 선비들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평가함으로서 미래를 향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문제점과 개선점을 극명하게 제시해주고자 하는 저자의 뜻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마디가 있다, "그대가 걸어온 발자국을 되돌아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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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2-2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자격지심은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준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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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스깽 데 프레, 만가 (Deploration)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훌륭한 스승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은 행운아라 할만하겠다. 스승 없이 제자가 탄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학창 시절이 더없이 그리워질 때면 변함없이 떠오르는 분은 바로 학교 선생님이고, 여러 선생님들 중 특히 더 기억에 남아 감사드리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선생님이 계신 것은 나 혼자만의 경우는 아닌 듯하다. 내게도 그런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지기도 전에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마음이 아프고 후회스러웠던지.... 아직도 그 선생님의 모습은 여러 장의 사진으로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다...

   

 조스깽 데 프레(Josquin des Pres) 선생님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콘데(Conde)에서 1440년 태어나 1521년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실 탄생지와 그 연도에 대한 기록들은 약간씩 달라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80세를 넘기신 조스깽선생님은 무척 장수를 누렸다는 점...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고, 그보다 정확히 245년 뒤인 1685년 생의 바흐선생님도 65세를 누리셨다. 역시 장수하신 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조스깽 선생님의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곡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보다는 이 곡이 담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조스캥 선생님에 대한 경의, 즉 애호가로서 존경받을 만한 음악가에게 갖는 일종의 경의의 표현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중심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뒤파이(부르고뉴 악파)와 쌍벽을 이루며 플랑드르 악파를 이끌었던 음악의 건축가 요하네스 오케겜은 그의 명성에 걸맞는  조스깽을 제자로 두었는데, 그 조스깽에 대한 의무감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음악적 성과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의 음악을 한 단계 올려놓는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은 조스깽의 공로로 돌릴 수 있다.중세의 음악이 다소 추상적이었으며 주로 단선율로써 “일정한 선율의 되풀”이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짝선율을 (함부로 붙이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선율에 또 다른 선율을 하나 혹은 그 이상 짝지어 놓는 초기 폴리포니(오르가눔)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왼쪽의 음반은 Missa Pange lingua 를 수록하고 있는 음반으로 조스깽 데 프레의 대표적인 음반 이랄 수 있다.

 

조스깽은 전통적인 형식에 혁신적인 자신의 음악을 섞어 지었고, 그 결과 중세의 음악과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 냈다. 자신의 화성이 모테트의 양식을 발전시키며 미사곡과 더불어 근대적 의미의 조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고, 스스로 고안해 낸 형식과 더불어 5, 6성부의 대위법은 또 다른 음악의 건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나마 조스캥의 업적을 결론 짖자면 그 후세 음악가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한 아름 가져다 주었다는 점이다.


  좋은 선물을 주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면 될 일인데, 왠지 나는 조스깽선생님께 의무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음악가도 아니고 애청자 일 뿐인데...). 그러나 지금 그 의무감은 감동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동안의 의무감이 서서히 애호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조스깽에 대한 몇 가지 수식어인 폴리포니의 완성자, 혹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작곡가, 혹은 가사와 멜로디의 개념화등 인데, 나는 이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조스깽은 스승인 오케겜의 죽음에 즈음하여 스승님에 대한 추모곡을 선물로 내 놓는다. “만가(Deploration)”라고 불리는 이 곡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한탄과 슬픔을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스승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건함, 무엇보다 음악의 정갈함을 고스란히 희석시켰다. ‘스승님께 드리는 음악’이라는 특별한 느낌은 이미 나를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는 점도 그려하려니와 슬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면서 보여주는 자.제.력.은 그야말로 나를 절제 美學의 地平으로 이끄는 듯하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놓는 듯한 음악은 연주를 듣는 즉시 감동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감동이 반감될 수도 있다. 한동안 듣고 나면 서서히 지루해지고 다른 곡으로 점프를 하고 싶어지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고전음악에서 이러한 일은 흔히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다. 고전음악은 같은 곡이라도 그 버전이 매우 다양하여 지루해 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의 명곡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청자에게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해준다.


  절제의 美가 신비스러운 영기처럼 서려있는 조스캥의 노래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가 들을수록 가슴에 깊이 패인 상처를 치료하는 노래요, 가슴에 사무친 푸르른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주는 정취는 나의 마음이 된다. 가장 심금을 울리는 추모곡이라고들 하는 조스깽이 스승님께 드리는 “만가”는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 함께 할 나의 영가가 될 것이다.

 

  음악을 즐겨 듣는 애청자의 한 사람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배어 들어오는 음악을 선호하고 경우도 매우 흔한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음악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 때의 그 감동은 정말 큰 감동으로 다가오며 특별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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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모의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성스러운 연주’라는 생각을 갖곤 한다. 그녀의 연주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 그녀가 ‘특별수업’이라는 책을 냈건만 나는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진정한 팬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라디너의 서재에서 발견한 ‘특별수업’,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다.  한 음악가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 그 음악가가 쓴 책을 읽어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인간문화재인 만신 김금화씨는 ‘하늘과 땅을 인간에게 이어주는 것을 바로 무(巫)’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무(巫)의 존재는 비단 만신만이 아니라고 했다. 만신의 성격을 가지는 존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 음악가도 포함된다고 했다. 음악가가 일종의 만신이라니...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리모의 특별 수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은 바로 ‘음악가는 만신’이라는 김금화씨의 말이었다.


 그리모는 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게되자 극도의 불안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모는 모든 심리적 짐을 떨쳐버리고 그 어느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으로 떠나야 할지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그리모에게는 연주로 성스러움을 느끼게하는 특별함이 있다


 

홍신자와 그리모


 이는 마치 춤꾼인 홍신자씨의 상황과 오버랩 된다. 춤의 예술을 행위하던 홍신자씨도 그리모와 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홍신자나 그리모가 예술가로서 처해있는 상황은 ‘정신적 고갈’을 의미하는 같은 상황이다. 즉, 영적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술인에게 영적 에너지는 절대적인 것이다. 김금자씨가 말하는 만신이라는 의미는 아마도 이러한 맥락 일 것이다. 만신이 신과 인간을 영매하는 존재이듯이 예술인도 청중과 음악을 영매하는 매체인 것이다.


 극도의 영적 에너지의 고갈을 느끼자 춤꾼 홍은 인도로 향한다. 그녀는 라즈니쉬를 만나고 그의 제자가 되어 영적에너지를 재충전한다. 그러나 영적 에너지의 재충전은 단순히 방전된 밧데리를 충전하는 것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밧데리는 같은 질의 내용물로 재충전 하여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 재충전 후의 영적 에너지는 그 이전의 것과는 완연하게 다른 성격을 지니고 충전자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성질의 효과를 내게 한다. 밧데리는 성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반면, 영적 에너지의 재충전은 충전자의 질적으로 다른, 그리고 거대한 성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모도 자신의 여정을 떠난다. 떠나기로 한 이상 어디로인가 떠나야 한다. 여정에서 그녀는 스승님과 매우 닮은 교사를 만나고 동경하던 삶을 찾아 성당의 뜰을 관리하며 사고하는 친구를 만나고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또 다른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모의 타자와의 관계

 

 그녀가 말해주는 늑대 센터에 대한 이야기도 이채롭다. 그녀는 늑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늑대에게 물려 큰 상처를 입는다.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를 극복하고 상대방을 진정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 내면의 상처를 인내해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의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낼 수도 있음을... 그 상처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도 있음을.... 그러나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그리모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랑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우연하게도 바로 이전에 읽었던 ‘산화의 힘’에서 읽었던 내용과 매우 일치하는 깨달음을 그리모의 특별수업에서 다시 읽게 되다니...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예술가, 영웅, 죽음’이다. 캠벨이 말하는 영웅은 인류에 헌신한다. 예술가는 대중과 문화에 신화를 가져다 줄 수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특별수업에서도 예술가와 영웅은 위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우연의 일치인가...

 

 

그리모의 죽음

(그리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려는 것이 아님)

 

 조셉 캠벨은 죽음으로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캠벨도 이러한 신화적 재탄생의 방식에 공감하는 듯 했다. 특별수업은 말하고 있다. “인간은 오직 사랑 때문에 죽어야하고 그 죽음은 비극이 아닙니다.”라고...


특별수업이 주는 특별한 교훈이 하나 더 있다. ‘자유를 수련하라’는 것이다. 자유를 수련한다는 의미는 영혼의 활동에 자신을 내어준다는 의미라고 했다. 영혼의 활동을 인식하는 존재는 만신이다. 물론 그리모가 만신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활동인식은 만신적인 요소를 가진 점이라는 뜻일 뿐이다. 자유의 수련은 영혼의 활동을 한다는 뜻이라는 것일 뿐....




그리모, 그리고 달과 6펜스

 

 

적은 분량의 책이면서 그리모가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의 책이라겼기 때문에 그 과정이 궁금했고 그에 대한 기대감만을 가지고 읽었다. 그런데 뜻밖의 소득 아니, 뜻밖의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다시 만난 것이다. . 그리모가 머물렀던 수녀원의 베아트리스라는 등장 인물을 통해서이다.  

 베아트리스는 그리모에게 “인간에게는 원래 속한 어떤 지방, 어떤 기후가 있어 평생 그 곳을 찾아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만난 서머싯 몸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그들은 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nostalgia)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이방인이며,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잎이 우거진 오솔 길, 그들이 놀던 사람이 많은 거리는 그저 그들이 거쳐가는 곳일 뿐이다. 그들로하여금 애착을 가질 지도 모르는 영원한 그 무엇인가를 찾아 떠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낮선 느낌이다.”


서머싯 몸은 태초부터 그 조상들이 떠나왔던 그 어떤 땅으로 인간을 돌아가도록 재촉하는 격 유전이 피와 함께 우리의 몸을 돌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서머싯 몸은 달과 9펜스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가 떠나게된 배경을 독자들에게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서머싯 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그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절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머싯 몸의 이런 소설속의 언어를 특별수업의 베아트리스를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이는 나에게 무척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모, 그리고 매트릭스


 그리모가 만난 베아트리스는 정말 특이한 인물이 있다. 베아트리스를 통해서 달과 6펜스를 만나는가하면 영화 매트릭스를 만나기도 한다. 정말 특별한 일이다. 베이트리스는 그리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인간은 신의 암(癌)이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되더군요. 통제를 벗어나 제멋 대로 번식하는 세포들이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는 사로잡힌 모피어스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다. ‘인간은 암과 같은 존재이다.’ 라고... 스미스의 이 말은 당시 충격적이었다. 왜냐면 일면에서 자연의 파괴를 일삼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이 말에 선뜻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그래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모가 만난 사람들

 

그리모는 여정을 통해 몇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 과정에서 그리모는 자신의 슬픔, 즉 자신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정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아닌 타자와의 만남이다. 인간의 슬픔은 인간을 통해서만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을 잘 보여준 그리모의 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한스는 자신의 밖에서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자신 내부에서 찾으라는 조언을 해준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그만 돌아보아 유리디체를 잃은 것은 그녀가 부활하는지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자신의 내부로 회귀하라는 그런 조언 말이다. 그녀는 마침내 해답을 찾는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슬픔을 떨쳐보리고 자신의 피아노 앞에 새로운 사람으로 서있다. 그리고 그리모는 말한다.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묻지 말고 그대처럼 길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라."라고...  

 

 

그리모의 특별수업


특별수업이라는 표제어가 특별 수업으로 결정된 단서를 이 책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참으로 멋진 대목이다. 그리모는 스승 바르비제가 해준 말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내가 자네에게 요구하는 것은 최고가 되라는 것이 아닐세. 내가 요구하는 것은 특별해지라는 것일세.” 아...나는 이 행간을 읽을 때, 전율을 느낀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깨달음이 일었다. 비로소 나는 그리모의 연주에서 왜 그토록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유를 수련했고, 그 영적 활동을 통해 특별해져버린 것이다. 영적 에너지로 충만한 자신의 영혼을 피아노의 건반에 실어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영매, 아니 만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이 글은 그녀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와 똑같이 고갈을 경험하며 그 고갈을 새로운 에너지로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녀의 여정은 특별할 것이 없다. 다만 슈타인웨이에 들어가 어느때든지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우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우리도 특별해지려고 한다면 언제든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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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은이 조셉 캠벨은 비교신화학자라 한다. 그의 저서 ‘신화의 힘’은 마치 대학시절 읽었던 ‘크리슈나 뮤르티와의 대화’처럼 대화의 형식 빌어 신화 및 종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교양서이다. 그런데 예수를 ‘예수=영웅’이라는 등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캠벨의 관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가지게 된 의문이었다. 기존의 기독교적 종교관으로 본다면 예수를 영웅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캠벨의 견해에 대한 이러한 의문과 의아함으로 독서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종교적 혹은 신화적이면서도 범신론적인 조셉 캠벨


그의 사고방식은 서구적인 것으로 출발하면서도 사고의 내용은 지극히 포용적이다. 그의 사고가 출발하는 신화의 거점은 일반적인 종교관을 뛰어넘는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분리시켜 인식하는 기존의 폐쇄적인 관점에서 탈피한 신화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바로 우주, 천구라는 거대한 가락과 함께 리듬을 탄다. 이를 증명해주는 그의 번역물이 있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 그것이다.


캠벨의 ‘신화’는 사전적인 의미의 차별성을 지닌 신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캠벨의 신화는 그 범위가 없으며 차별을 두지 않는다. 하나의 신화를 기타의 신화와 분리하지 않는다. 캠벨의 신화는 기타와의 경계를 허문 신화이다. 아니 허물었다기보다는 애초에 경계를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잘 알려진 기독교적 신화로부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샤만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넘나든다. 그는 아프리카의 부시맨으로부터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통섭함을 보여준다. 일개의 샤만의 의식을 종교 혹은 신화와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캠벨은 범세계적인 종교로부터 한 사람의 무당까지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의 경계는 찾아볼 수 없다. 캠벨의 사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관, 결혼(사랑)관, 그리고 타자와의 인간관계 모두를 신화라는 모신(母神)을 통해 해석해낸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캠벨은 현대인들의 삶이 정신문화와 괴리되어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캠벨의 신화는 공자, 노자, 석가, 괴테, 플라톤을 아우른다. 그렇다고 캠벨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극히 인간다운 것으로 간주하면서 독자들에게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며 정신문화와의 접촉을 권하고 있다. 지극히 범신론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리 어려운 이유이다.


그는 ‘정신’은 ‘삶의 향연’이라고 말한다. 정신이 삶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인간은 그 정신을 바르게 향유하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캠벨은 인간을 신의 세계와 분리하여 종속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의 세계로부터 인간이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신적 존재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일체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자연의 품안에서 삶을 향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캠벨에 따르면 인간은 한 시도 그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캠벨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며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자사선생께서 남겼다는 중용(中庸)의 한 장구를 대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게 한다.

 

 이쯤하면 예수를 영웅이라 칭한 캠벨의 관점에 대한 의문은 스스로 풀리게 된다. 예수는 자기의 삶보다 큰 것에 자신을 바친 사람이고 그는 영웅이다. 그는 인간의 영적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했다. 이런 맥락에서 '어머니'도 영웅이다.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통섭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니라 프랑스를 위해, 어쩌면 자신을 위해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도자'는 될 수 있을지라도, '대단한' 사람이 될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위해 통섭하는 이, 그가 바로 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렉산더도 더이상 위대한 사람은 아니다. 캠벨 덕분에 '위대'라는 말과 '대단'이라는 말을 구별하여 쓸 수 있을 것 같다.


 

캠벨, 자연 친화적인 조화에의 영감


그는 거대한 우주의 에너지와 신화와의 개연성을 설파하기도하지만, 지극히 작은 식물의 세계를 놓치지 않는다. 작은 식물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세계를 인정한다.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쇼 라즈니쉬의 철학을 읽고 있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캠벨은 작은 하나의 식물에게도,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도 의식을 부여한다. 캠벨은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끈다.”라고 설파한다. 캠벨의 사고가 가장 깊은 감동을 준 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이 대목이었다.

 

 우리는 인권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부분 공감한다. 인권(人權)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물권(物權)’이다. 물권의 존재가 부정되는 사회에서 인권을 바로 정립하기란 용이한 것이 아니다. 물(物)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 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 자신의 환경이 부정될 경우 인간 존재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즉, 물권이 있을 때 인권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을 캠벨은 식물의 의식세계를 통하여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캠벨이 의식의 세계를 식물에게 부여하고 있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인간적 존재가 타자의 종교, 타자의 인종, 타자의 문화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를 캠벨은 식물에 의식세계를 부여함으로서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싶어 한다. 물권과 인권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캠벨의 행간을 잘 읽어내야 하는 이유이다.


캠벨의 통찰력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서적 전승을 사회지향적인 신화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지형적인 신화는 신화와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즉 인간의 영역에서 자연을 배제시키고 통제 혹은 정복하려는 성격을 가진 신화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근본적인 요인으로 유목민족의 특성을 들고 있다.  반면, 자연지향적인 신화 혹은 종교는 사람을 돕고 나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특성을 가진 신화로 간주하며 그 근간을 경작 민족, 즉 정착 농경민족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캠벨의 관점으로 바라 본 2가지 신화의 지향성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프리즘에 투영시킬 때 매우 적합한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전자의 경우 캠벨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을 통하여 서로 다른 종교와 그 교도들에 대한 공격성의 증거를 든다.

 

 캠벨은 한마디로 사회지향적인 신화적 성격을 가진 신화를 종교의 실패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그 경계를 초월한 시대의 삶을 인류에게 적용시켜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캠벨은 신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 그리고 자연적 존재의 단절을 강제하는 사회지향적인 신화로부터 자연 지향적인 신화로의 귀환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그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독자라면 캠벨의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서구인이라는 나의 편견으로 캠벨을 바라볼 때, 위와 같은 사고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서구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루소와 니체는 인류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서양 사상가들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자연을 떠나려하지 말고 그 품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미 2500년 전에 자연에로의 귀환을 촉구한 바 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동양의 서적들은 자연지향적인 사고를 외쳤던 것이다. 캠벨은 자연 그 자체를 神의 현현(顯顯)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구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나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캠벨의 예증


 그렇다고 캠벨의 다양한 생각에 모두 동의를 표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캠벨의 주장과 마주친 적이 있다. 캠벨은 개인이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지 말고 지구라는 행성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신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좀 더 제한적인 시야를 버리고 넓은 시여를 확보하여 상생의 신화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언 뜻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캠벨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예시는 바로 미합중국이다. 미합중국은 13개라는 별개의 주들이 통합,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냈음을 매우 바람직하게 평가하고 있다. 캠벨은 미합중국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이 상생을 위해 하나로 통합한 것은 지구라는 행성과 동일시한 예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피해와 폐단, 그리고 그 비인간성, 잔인성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캠벨의 주장대로라면 13개주는 원주민들과 매우 원만하면서도 그들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 그 일을 해냈어야 옳았다. 아니,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유도해 내는, 캠벨의 말을 빌자면 지극히 ‘이성적인’,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떳떳한 통합이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비극을 안겨주지 않는 그런 통합 말이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그런 통합을 결코 이루어내지 못했다.

 

  캠벨은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 부른다.’ 했다. 캠벨은 한 술 더 떠서 세상 만물을 ‘그대’라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 것’을 바라보는 자아와는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쟁은 상대방의 사람들을 ‘그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13의 타자들이 서로를 ‘그대’로 본 반면, 원주민들을 ‘그 것’으로 보았다.

 

서구인들은 대 항해시대 당시 7천만명에 달하는 남북미 아메리카의 원주민의 목숨을 90% 사망케 했다. 쉽게 6천만명이 넘는 인구를 사망케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통합을 이루어 낸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5천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갔으며 '그대들'을 '그 것들'으로 대했다. 물론 5천만명이라는 수치는 서구인들의 통계이므로 그 수치를 축소했을 가능성이 높아 믿을 수가 없지만 말이다. 캠벨은 미합중국의 통합에서 장점만을 부각시키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그 이후에 발생했던 인간의 씻어낼 수 없는 비극에 대해서는 그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이러한 캠벨의 시선을 나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절대로 별점을 5개 찍을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역자 이윤기선생...

이 책은 지극히 신화적 혹은 종교적이면서도 종교의 냄새가 나지 않는 캠벨만의 매력은 지닌 책이다. 읽기를 마치며 나는 역자 이윤기선생이 왜 이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윤기선생 역시 신화에는 일가견을 가진 분이다. 신화와 관련한 이윤기선생의 저술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만의 독특한 해석법을 잘 아실 것이다. 이윤기 선생은 전통적인 신화의 해석을 새롭고 매우 뛰어난 통찰력으로 재해석하여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간 분이다. 이윤기선생의 번역 혹은 저술들은 매우 일관성이 있어 좋다. 일관성은 그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되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이윤기선생께서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캠벨의 입을 통한 책이지만 바로 이윤기선생께서 우리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전언을 담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애써주신 것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신화의 힘'을 읽도록 줄기차게 뻠쁘해주신 알라디너들께 또한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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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1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공님, 조지프 캠벨과 조셉 캠벨은 다른 사람인건가요?
저는 신의가면 세트 네권을 사놓고 아직 못 읽었어요... <신화의 힘>은 종종 어디서 봐서, 제가 가진 책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여하간... 차트랑공님의 무한한 지름신 인도 힘에 의해서 장바구니로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2-15 13:32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신 조지프와 조셉이 아무래도 동일 인물인 듯 합니다^^
조지프를 조셉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가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답니다.
저도 그런적이 있었는데
기억해보니 버렸더라구요 ㅠ.ㅠ
'무소유'가 제게는 대표적입니다.
법정스님께서 돌아가시자 무소요가 겁나게 뜨더군요.
나도 저 책 있는데...하고 책장을 뒤져보니 없는거에요.
가만 생각해보니 버렸지 뭡니까요 ㅠ.ㅠ
후회 막급, 때는 늦였죠 ㅠ.
버린 곳을 다시 찾아가보니 그게 가만 있을리가 있나요? ㅠ.ㅠ
조지프 캠벨...저도 어느 분의 강력한 뻠쁘로 읽게 되었는데. 좋으네요
책장을 넘길수록진 좋아지는 그런 책이더라구요.
사실 처음 몇장 읽어보고는 반품할까 생각했답니다 ㅠ.ㅠ
반품을 받아줄 분이 계시거든요.
뻠쁘해주신 알라디너입니다 쿠더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