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스깽 데 프레, 만가 (Deploration)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훌륭한 스승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은 행운아라 할만하겠다. 스승 없이 제자가 탄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학창 시절이 더없이 그리워질 때면 변함없이 떠오르는 분은 바로 학교 선생님이고, 여러 선생님들 중 특히 더 기억에 남아 감사드리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선생님이 계신 것은 나 혼자만의 경우는 아닌 듯하다. 내게도 그런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지기도 전에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마음이 아프고 후회스러웠던지.... 아직도 그 선생님의 모습은 여러 장의 사진으로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다...

   

 조스깽 데 프레(Josquin des Pres) 선생님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콘데(Conde)에서 1440년 태어나 1521년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실 탄생지와 그 연도에 대한 기록들은 약간씩 달라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80세를 넘기신 조스깽선생님은 무척 장수를 누렸다는 점...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고, 그보다 정확히 245년 뒤인 1685년 생의 바흐선생님도 65세를 누리셨다. 역시 장수하신 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조스깽 선생님의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곡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보다는 이 곡이 담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조스캥 선생님에 대한 경의, 즉 애호가로서 존경받을 만한 음악가에게 갖는 일종의 경의의 표현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중심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뒤파이(부르고뉴 악파)와 쌍벽을 이루며 플랑드르 악파를 이끌었던 음악의 건축가 요하네스 오케겜은 그의 명성에 걸맞는  조스깽을 제자로 두었는데, 그 조스깽에 대한 의무감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음악적 성과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의 음악을 한 단계 올려놓는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은 조스깽의 공로로 돌릴 수 있다.중세의 음악이 다소 추상적이었으며 주로 단선율로써 “일정한 선율의 되풀”이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짝선율을 (함부로 붙이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선율에 또 다른 선율을 하나 혹은 그 이상 짝지어 놓는 초기 폴리포니(오르가눔)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왼쪽의 음반은 Missa Pange lingua 를 수록하고 있는 음반으로 조스깽 데 프레의 대표적인 음반 이랄 수 있다.

 

조스깽은 전통적인 형식에 혁신적인 자신의 음악을 섞어 지었고, 그 결과 중세의 음악과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 냈다. 자신의 화성이 모테트의 양식을 발전시키며 미사곡과 더불어 근대적 의미의 조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고, 스스로 고안해 낸 형식과 더불어 5, 6성부의 대위법은 또 다른 음악의 건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나마 조스캥의 업적을 결론 짖자면 그 후세 음악가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한 아름 가져다 주었다는 점이다.


  좋은 선물을 주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면 될 일인데, 왠지 나는 조스깽선생님께 의무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음악가도 아니고 애청자 일 뿐인데...). 그러나 지금 그 의무감은 감동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동안의 의무감이 서서히 애호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조스깽에 대한 몇 가지 수식어인 폴리포니의 완성자, 혹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작곡가, 혹은 가사와 멜로디의 개념화등 인데, 나는 이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조스깽은 스승인 오케겜의 죽음에 즈음하여 스승님에 대한 추모곡을 선물로 내 놓는다. “만가(Deploration)”라고 불리는 이 곡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한탄과 슬픔을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스승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건함, 무엇보다 음악의 정갈함을 고스란히 희석시켰다. ‘스승님께 드리는 음악’이라는 특별한 느낌은 이미 나를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는 점도 그려하려니와 슬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면서 보여주는 자.제.력.은 그야말로 나를 절제 美學의 地平으로 이끄는 듯하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놓는 듯한 음악은 연주를 듣는 즉시 감동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감동이 반감될 수도 있다. 한동안 듣고 나면 서서히 지루해지고 다른 곡으로 점프를 하고 싶어지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고전음악에서 이러한 일은 흔히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다. 고전음악은 같은 곡이라도 그 버전이 매우 다양하여 지루해 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의 명곡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청자에게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해준다.


  절제의 美가 신비스러운 영기처럼 서려있는 조스캥의 노래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가 들을수록 가슴에 깊이 패인 상처를 치료하는 노래요, 가슴에 사무친 푸르른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주는 정취는 나의 마음이 된다. 가장 심금을 울리는 추모곡이라고들 하는 조스깽이 스승님께 드리는 “만가”는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 함께 할 나의 영가가 될 것이다.

 

  음악을 즐겨 듣는 애청자의 한 사람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배어 들어오는 음악을 선호하고 경우도 매우 흔한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음악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 때의 그 감동은 정말 큰 감동으로 다가오며 특별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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