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은이 조셉 캠벨은 비교신화학자라 한다. 그의 저서 ‘신화의 힘’은 마치 대학시절 읽었던 ‘크리슈나 뮤르티와의 대화’처럼 대화의 형식 빌어 신화 및 종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교양서이다. 그런데 예수를 ‘예수=영웅’이라는 등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캠벨의 관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가지게 된 의문이었다. 기존의 기독교적 종교관으로 본다면 예수를 영웅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캠벨의 견해에 대한 이러한 의문과 의아함으로 독서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종교적 혹은 신화적이면서도 범신론적인 조셉 캠벨


그의 사고방식은 서구적인 것으로 출발하면서도 사고의 내용은 지극히 포용적이다. 그의 사고가 출발하는 신화의 거점은 일반적인 종교관을 뛰어넘는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분리시켜 인식하는 기존의 폐쇄적인 관점에서 탈피한 신화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바로 우주, 천구라는 거대한 가락과 함께 리듬을 탄다. 이를 증명해주는 그의 번역물이 있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 그것이다.


캠벨의 ‘신화’는 사전적인 의미의 차별성을 지닌 신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캠벨의 신화는 그 범위가 없으며 차별을 두지 않는다. 하나의 신화를 기타의 신화와 분리하지 않는다. 캠벨의 신화는 기타와의 경계를 허문 신화이다. 아니 허물었다기보다는 애초에 경계를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잘 알려진 기독교적 신화로부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샤만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넘나든다. 그는 아프리카의 부시맨으로부터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통섭함을 보여준다. 일개의 샤만의 의식을 종교 혹은 신화와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캠벨은 범세계적인 종교로부터 한 사람의 무당까지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의 경계는 찾아볼 수 없다. 캠벨의 사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관, 결혼(사랑)관, 그리고 타자와의 인간관계 모두를 신화라는 모신(母神)을 통해 해석해낸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캠벨은 현대인들의 삶이 정신문화와 괴리되어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캠벨의 신화는 공자, 노자, 석가, 괴테, 플라톤을 아우른다. 그렇다고 캠벨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극히 인간다운 것으로 간주하면서 독자들에게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며 정신문화와의 접촉을 권하고 있다. 지극히 범신론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리 어려운 이유이다.


그는 ‘정신’은 ‘삶의 향연’이라고 말한다. 정신이 삶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인간은 그 정신을 바르게 향유하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캠벨은 인간을 신의 세계와 분리하여 종속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의 세계로부터 인간이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신적 존재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일체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자연의 품안에서 삶을 향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캠벨에 따르면 인간은 한 시도 그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캠벨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며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자사선생께서 남겼다는 중용(中庸)의 한 장구를 대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게 한다.

 

 이쯤하면 예수를 영웅이라 칭한 캠벨의 관점에 대한 의문은 스스로 풀리게 된다. 예수는 자기의 삶보다 큰 것에 자신을 바친 사람이고 그는 영웅이다. 그는 인간의 영적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했다. 이런 맥락에서 '어머니'도 영웅이다.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통섭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니라 프랑스를 위해, 어쩌면 자신을 위해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도자'는 될 수 있을지라도, '대단한' 사람이 될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위해 통섭하는 이, 그가 바로 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렉산더도 더이상 위대한 사람은 아니다. 캠벨 덕분에 '위대'라는 말과 '대단'이라는 말을 구별하여 쓸 수 있을 것 같다.


 

캠벨, 자연 친화적인 조화에의 영감


그는 거대한 우주의 에너지와 신화와의 개연성을 설파하기도하지만, 지극히 작은 식물의 세계를 놓치지 않는다. 작은 식물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세계를 인정한다.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쇼 라즈니쉬의 철학을 읽고 있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캠벨은 작은 하나의 식물에게도,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도 의식을 부여한다. 캠벨은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끈다.”라고 설파한다. 캠벨의 사고가 가장 깊은 감동을 준 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이 대목이었다.

 

 우리는 인권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부분 공감한다. 인권(人權)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물권(物權)’이다. 물권의 존재가 부정되는 사회에서 인권을 바로 정립하기란 용이한 것이 아니다. 물(物)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 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 자신의 환경이 부정될 경우 인간 존재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즉, 물권이 있을 때 인권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을 캠벨은 식물의 의식세계를 통하여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캠벨이 의식의 세계를 식물에게 부여하고 있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인간적 존재가 타자의 종교, 타자의 인종, 타자의 문화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를 캠벨은 식물에 의식세계를 부여함으로서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싶어 한다. 물권과 인권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캠벨의 행간을 잘 읽어내야 하는 이유이다.


캠벨의 통찰력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서적 전승을 사회지향적인 신화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지형적인 신화는 신화와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즉 인간의 영역에서 자연을 배제시키고 통제 혹은 정복하려는 성격을 가진 신화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근본적인 요인으로 유목민족의 특성을 들고 있다.  반면, 자연지향적인 신화 혹은 종교는 사람을 돕고 나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특성을 가진 신화로 간주하며 그 근간을 경작 민족, 즉 정착 농경민족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캠벨의 관점으로 바라 본 2가지 신화의 지향성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프리즘에 투영시킬 때 매우 적합한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전자의 경우 캠벨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을 통하여 서로 다른 종교와 그 교도들에 대한 공격성의 증거를 든다.

 

 캠벨은 한마디로 사회지향적인 신화적 성격을 가진 신화를 종교의 실패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그 경계를 초월한 시대의 삶을 인류에게 적용시켜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캠벨은 신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 그리고 자연적 존재의 단절을 강제하는 사회지향적인 신화로부터 자연 지향적인 신화로의 귀환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그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독자라면 캠벨의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서구인이라는 나의 편견으로 캠벨을 바라볼 때, 위와 같은 사고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서구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루소와 니체는 인류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서양 사상가들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자연을 떠나려하지 말고 그 품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미 2500년 전에 자연에로의 귀환을 촉구한 바 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동양의 서적들은 자연지향적인 사고를 외쳤던 것이다. 캠벨은 자연 그 자체를 神의 현현(顯顯)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구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나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캠벨의 예증


 그렇다고 캠벨의 다양한 생각에 모두 동의를 표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캠벨의 주장과 마주친 적이 있다. 캠벨은 개인이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지 말고 지구라는 행성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신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좀 더 제한적인 시야를 버리고 넓은 시여를 확보하여 상생의 신화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언 뜻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캠벨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예시는 바로 미합중국이다. 미합중국은 13개라는 별개의 주들이 통합,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냈음을 매우 바람직하게 평가하고 있다. 캠벨은 미합중국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이 상생을 위해 하나로 통합한 것은 지구라는 행성과 동일시한 예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피해와 폐단, 그리고 그 비인간성, 잔인성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캠벨의 주장대로라면 13개주는 원주민들과 매우 원만하면서도 그들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 그 일을 해냈어야 옳았다. 아니,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유도해 내는, 캠벨의 말을 빌자면 지극히 ‘이성적인’,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떳떳한 통합이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비극을 안겨주지 않는 그런 통합 말이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그런 통합을 결코 이루어내지 못했다.

 

  캠벨은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 부른다.’ 했다. 캠벨은 한 술 더 떠서 세상 만물을 ‘그대’라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 것’을 바라보는 자아와는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쟁은 상대방의 사람들을 ‘그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13의 타자들이 서로를 ‘그대’로 본 반면, 원주민들을 ‘그 것’으로 보았다.

 

서구인들은 대 항해시대 당시 7천만명에 달하는 남북미 아메리카의 원주민의 목숨을 90% 사망케 했다. 쉽게 6천만명이 넘는 인구를 사망케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통합을 이루어 낸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5천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갔으며 '그대들'을 '그 것들'으로 대했다. 물론 5천만명이라는 수치는 서구인들의 통계이므로 그 수치를 축소했을 가능성이 높아 믿을 수가 없지만 말이다. 캠벨은 미합중국의 통합에서 장점만을 부각시키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그 이후에 발생했던 인간의 씻어낼 수 없는 비극에 대해서는 그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이러한 캠벨의 시선을 나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절대로 별점을 5개 찍을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역자 이윤기선생...

이 책은 지극히 신화적 혹은 종교적이면서도 종교의 냄새가 나지 않는 캠벨만의 매력은 지닌 책이다. 읽기를 마치며 나는 역자 이윤기선생이 왜 이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윤기선생 역시 신화에는 일가견을 가진 분이다. 신화와 관련한 이윤기선생의 저술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만의 독특한 해석법을 잘 아실 것이다. 이윤기 선생은 전통적인 신화의 해석을 새롭고 매우 뛰어난 통찰력으로 재해석하여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간 분이다. 이윤기선생의 번역 혹은 저술들은 매우 일관성이 있어 좋다. 일관성은 그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되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이윤기선생께서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캠벨의 입을 통한 책이지만 바로 이윤기선생께서 우리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전언을 담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애써주신 것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신화의 힘'을 읽도록 줄기차게 뻠쁘해주신 알라디너들께 또한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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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1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공님, 조지프 캠벨과 조셉 캠벨은 다른 사람인건가요?
저는 신의가면 세트 네권을 사놓고 아직 못 읽었어요... <신화의 힘>은 종종 어디서 봐서, 제가 가진 책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여하간... 차트랑공님의 무한한 지름신 인도 힘에 의해서 장바구니로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2-15 13:32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신 조지프와 조셉이 아무래도 동일 인물인 듯 합니다^^
조지프를 조셉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가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답니다.
저도 그런적이 있었는데
기억해보니 버렸더라구요 ㅠ.ㅠ
'무소유'가 제게는 대표적입니다.
법정스님께서 돌아가시자 무소요가 겁나게 뜨더군요.
나도 저 책 있는데...하고 책장을 뒤져보니 없는거에요.
가만 생각해보니 버렸지 뭡니까요 ㅠ.ㅠ
후회 막급, 때는 늦였죠 ㅠ.
버린 곳을 다시 찾아가보니 그게 가만 있을리가 있나요? ㅠ.ㅠ
조지프 캠벨...저도 어느 분의 강력한 뻠쁘로 읽게 되었는데. 좋으네요
책장을 넘길수록진 좋아지는 그런 책이더라구요.
사실 처음 몇장 읽어보고는 반품할까 생각했답니다 ㅠ.ㅠ
반품을 받아줄 분이 계시거든요.
뻠쁘해주신 알라디너입니다 쿠더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