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마음과 몸을 위한 책을 만드는

민음사 출판 브랜드 판미동 입니다. :)


판미동에서 중국 최고 석학 장치청 교수의 건강고전 명강의를 담은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에 출간전 가장 빠른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한의학과 건강, 특히 고전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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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중국 최고 석학 장치청 교수의 건강 고전 명강의



논어보다 황제내경을 먼저 공부하라!

"인간의 생명을 통찰하는 최초·최고의 경전"



중국 국학 최고 권위자 장치청 교수가 들려주는 건강 고전 강연으로, 

2500년이 넘는 고전 <황제내경>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전인적인 몸 공부를 통해 자신을 읽어내고 삶의 조화로움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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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 간단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스크랩 링크와 함께 댓글로 올려주시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 2015년 1월 19일(월)부터 1월 26일(월)까지 입니다.


셋, 총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5년 1월 27일 화요일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5년 1월 30일(금)부터 2월 6일(금)까지 14일간입니다.

서평단에 선정되신 분은 1월 28일까지 개인정보를 비밀댓글로 적어야합니다.

1월 28일까지 개인정보 확인이 안되면 당첨이 자동취소됩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4일간 알라딘 블로그 및 개인 블로그에 서평을 작성한 후,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서평단 발표 포스팅 알라딘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 및 서평완료 댓글을 작성하지 않을 시,

다음 서평단 모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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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인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백승헌 지음 / 하남출판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리뷰보다는 어느 순간 페이퍼를 더 선호하는 입장에서 이 책은 고민거리였다. 생각 끝에 리뷰를 쓰기로 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오류 때문으로 말미에 언급하기로 한다.

 

최근 한의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사상체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상체질에 관계하시는 분이로구나 싶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 저의 체질은 어떻게 되나요?' 라고 여쭈었다.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전에는 체질과 관련하여 진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막상 진료를 해보니 단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는 환자들에게 체질에 관한 언급을 피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내심 기대를 했다가는 적잖은 실망을 했다.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인 사상의학이 독보적이라고는 하지만 東의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활용성을 점한 것은 아닌 듯 보이고, 대체의학계가 이를 수용하고 있는 입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의학계의 인정을 받든 아니든 간에,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이 흥미로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의(西醫)와는 달리 동의(東醫)는 애초에 만병의 근원을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 보았다. 타에 의한 마음의 상처 혹은 내적 발로의 상심은 당사자의 면역력에 관계하여 외부에서 오는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내적 질환을 만들어 낸다고 본 것이다. 양의에도 이를 흔히 스트레스, 즉 심인성 질환이라고 명명하고 있고 현대의 다양한 질환들이 이에 해당하는 실정이다.

 

우리말에 ‘환장(換腸),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있다. 환(煥)이라는 말은 ‘불꽃, 불빛, 빛난다’는 뜻이고 장(腸)은 창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두어야 할 점은 장(腸)이다. 창자를 뜻하는 장(腸)은 사실은 정(情), 즉 마음인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정신)의 상태가 크게 격동하여(煥)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당대(唐代)의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야우문령장단성(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울리는 풍경소리에 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구나, 라고 읊었는데, 장단(腸斷) 즉,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마음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동의는 인간의 감정을 중시했고,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희노우사비경공, 즉 칠정(七情)의 불균형에서 병이 깃든다고 보았다. 칠정은 사정(四情)의 다른 표현으로 중용의 첫 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사람의 감정(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中 이라고 하고,

발이개중절 위지화(發而皆中節 謂之和)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는 것을 和라한다”

 

이를 중용이 아닌 동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람의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 있다가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으면 和를 이루어 내는 법이지만, 발현하되 절도에 들어맞지 않으면 즉, 양극단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사람의 몸에 병이 깃든다, 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 싶다.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동물이듯, 그 마음도 늘 함께 움직이게 마련이다. 하여 중용에서 말하는 칠정이 中의 상태에 있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항상 발현하게 마련인데 몸(體)과 함께 각각의 정(情)들이 활발하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하여 칠정 중 어느 하나가 그 임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이 지나쳐도 몸이 상하고, 노여움이나 슬픔이 지나쳐도 마찬가지다. 이제마가 중용의 사정(四情)에 착안하여 사상의학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람의 체(體)와 질(質)을 4가지로 분류하여 임상 연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100 여년이라는 짧은 역사가 말해주듯 사상의학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하여 항간에는 8체질론이 나오고, 더불어 이 책에서처럼 28체질론으로 확장 보완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제마는 체질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체(體)는 육체, 즉 몸이고, 질(質)은 정신, 즉 마음을 의미한다.” 106쪽

 

이제마는 몸과 마음(정신)을 하나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이 아프면 칠정도 상하게되고, 칠정이 상하면 몸도 따라 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뜻밖의 사고를 만나 몸을 심하게 다치게되면 어디 짜증 뿐이겠는가. 쉽게 화를 내거나 노여워하고 때로는 낙심하여 풀이 죽는다. 부상의 정도에 따라 그 당사자의 심리 상태는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심적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의 경우 또한 병이 깃들게 마련이다. 욕심이 지나쳐도 마음의 병을 만든다. 이는 칠정이 그 임계치를 넘어선 결과이며 칠정이 양극단으로 치우친 결과물이다. 하며 예로부터 만병은 마음에서 온다했던 것이다.

 

체질론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간장의 상태가 좋은 사람은 자녀가 달려가다가 넘어졌을 때 웃어 넘길 수 있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진 사람의 경우 넘어진 어린 자녀에게 화를 낼 수가 있겠구나 싶다. 하여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떤 때는 웃어 넘기다가도 다른 때에는 화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간(肝)은 기쁨(喜)을 관장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다.

사상체질론은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한다. 체질에 따라 장기의 크기와 그 기운이 다르다고 본다. 물론 사람의 성격도 그에 따라 다르게 된다. 하여 체질을 약물치료나 음식에 적용시켜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첨언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사람의 장기가 선천적으로 크고 작음으로 실과 허가 정해진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화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태생적으로 간이 튼실하고 폐가 상대적으로 약한 태음인이라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간장이 허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폐가 일시적으로 승증을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간이 실하고 폐가 허한 사람으로 단정하여 치료에 임한다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적인 생각을 하게되었다.

 

체질론에 따르면 맛에 매우 민감한 소음인의 경우 비위가 태생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냄새에 더욱 민간해지는 순간을 만난다. 냄새에 가장 민감한 체질은 태음인이다. 태음인은 상대적으로 폐가 약해 공기 중의 산소율이 다른 체질의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소음인이 맛 보다는 냄새에 더욱 민감해지는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는 비위보다는 폐가 매우 약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경우 비위보다는 폐를 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약재를 사용할 때, 단정적이기보다는 당사자의 몸 상태에 따라 적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보는 이유이다.

 

또한 체질론은 체질에 따라 음식을 가려먹는 것의 이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분명 이점이 맞다. 그러나 건강이 매우 양호한 상태에서는 음식에 체질을 관여시키는 것이 꼭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몸이 대부분의 음식을 잘 소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체질과 맞지 않으며 기운이 강한 음식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체력이 약해진 상태이거나 심신이 지쳐있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병중이라면 체질론에 따른 섭생은 중요하다고 본다. 음인이 병중 일 때,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이다.

 

사상 체질론의 또 다른 어려움은 체질의 판단이다. 저자도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수학의 공식처럼 똑 떨어지는 정답을 가진 경우라면 문제는 없다. 체질의 판단에 오류가 날 경우 치료는 되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정확한 체질의 판단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책에서는 다양한 체질의 판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점 또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체질론은 분명 흥미로운 의학적 접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역사가 짧은 만큼 연구의 깊이가 아직은 미약해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제마의 체질론이 인간의 성정을 다루며 철학과 의학을 만나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실로 독보적인 관점의 접근이랄 수 있다. 서의는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애초에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연구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플라톤은 정신세계를 너무 애정한 나머지 물질을 중시하지 않았다, 아니 경시했다. 물질은 변덕스러운 존재인지라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항구적이며 영원불변한 세계, 바로 정신의 지고한 세계를 애정한 결과 이데아론을 제창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데아론으로 동의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동의는 변화 자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자연의 이치요 애초에 본질로 본 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장기 상태가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장기(臟器)는 그 장(臟)이 가지는 고유의 기(氣)을 담아 두는 그릇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다. 해당 장기의 균형이 깨면 그에 해당하는 정기(情氣)가 이상을 일으켜 격동하게 된다. 한마디로 칠정의 이상 움직임은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감정 상태가 몸의 건강 상태와 직결된다고 보는 사상의학은 분명 독보적인 관점임에는 틀림이 없다.

 

친구네는 얼마 전, 화장실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검사결과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사람은 죽겠는데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서의의 특징은 병이 겉으로 드러나야만 치료에 임할 수 있는 의학적 특성을 지닌 듯 하다. 물론 요즘은 서의에서도 심인성, 즉 심리적인 요인에서 병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질병과 마음(情)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외적, 내적인 병인을 다스리는 의학의 발달을 기대해보는 이유이다.

 

조선의 동의학계에 걸출한 인물, 구암이 있지만 사상의학을 의학적 관점이 아닌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좋은 이제마도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 각기의 장점들을 찾아 적절한 접목을 이루어 내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본 도서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다음의 내용이다.

 

 

처음에는 이 책이 28체질론, 즉 사상체질의 확장인고로 내용이 달라진 것인가?하고 의아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책의 나머지 부분들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저자의 집필의 실수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초판이 2002년임을 감안할때 그동안 전혀 수정을 거치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판본이 이어질 경우 교정이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알라디너들의 건강을 위해 한마디를 첨언하고 싶다.

반후행삼십보 불용개약포 飯後行三十步 不用開藥包

한마디로 식사후 삼십보를 걸으면 약지어 먹을 일이 없다, 라고 이해해면 되겠다.

직접 실험을 해본 결과 300―500보 정도를 걸었을 때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개인 차이가 있기마련이겠지만...

 

아파본 사람은 안다. 건강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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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길에 올랐다.

자주 그리고 또 자주 찾아보아야하는 곳이지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은 일이 바로, 고향길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곳이며, 나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고향이다. 나이가 어려서는 그 뜻을 잘 모르다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부터 아련한 단어로 변해가는 것이 고향이라는 단어인 것이다.

 

아버지를 뵈니 이제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사내다움의 듬직함은 어디론가 사라져있고, 어깨는 연약하며, 시들어가는 꽃처럼 안타깝기만하다. 인생은 그런 것, 태어난 모든 것은 그 시기를 다하면 이처럼 쇠약해지고 나약해지는 법, 나도 때가 되면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리라... 그러나 그 입가의 미소는 그 어느 꽃보다 더 포근하고 더 아름답지 않은가...그 여유있고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가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당시 깊은 산골짜기의 시골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학교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놈은 다름 아닌 공책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우개가 주범이었는지도, 아니면 빈곤이 주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공책에 글씨를 실수라도 하게되면 지우개가 없는 아이들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지우곤했다. 지우개가 있는 친구들이라고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공책의 구멍이 바로 그 결과였다. 누가 더랄 것도 없이 공책도 지우개도 모두 저질이었다.  

 

침을 발라 연필자국을 지워보겠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의 결과물, 질 떨어지는 공책의 종이가 수분의 힘을 견디지 못했다. 그만 촌놈들의 몸에서 때가 밀려나듯 시골 촌놈들의 손가락에 공책의 살점들이 벗겨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 쪽의 노트가 휑하니 들여다 보인다.

 

지우개의 사정은 때밀이와는 달랐지만 이도 큰 차이는 없었다. 힘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사리 손을 가진 초등 1학년 생들의 생각과 결과는 전혀 원치 않는 것이었다. 이는 침바른 손가락보다 훨씬더 비극적인 결과를 간간히 초래했다. 어느 순간, 북~하고 공책의 한 면이 찢어져버렸으니 말이다. 연필 글씨 하나를 수정해보겠다고 애쓰다가는 공책을 찢어먹은 시골 어린 촌놈의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표정...어이가 없는 멍한 그 표정 말이다...

 

이는 비단 공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미술시간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문제는 손가락의 침도 아니요 지우개도 아닌, 바로 크레용이었다. 수업시간에 공책에 침발라 발생하는 일만으로도 스트레스인데, 즐거워야할 미술시간마저도 그러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크레용은 6색갈, 도대체 어떤 색으로 그림을 그려야할까. 빨강, 파랑, 검정, 하양, 노랑 그리고는 하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곱색갈 무지개도 그려낼 수 없는 이 색갈부족의 크레용은 색갈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재질이 나빴던지 단단하기가 무슨 나뭇가지같았던 것이다.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려면 손에 여간 힘이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색칠을 할라치면 그만 크레파스가 먹질 않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색갈이 부족한 것도 불만 가득한 일인데 아 이넘의 크레파스가 도화지 위에 먹질 않네.

 

질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던 도화지의 살점들이 때 밀리듯 크레파스에 뭍어나온다. 때로는 도화지가 되려 크레파스를 먹고 있었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놈이 나 하나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창피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에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죄다 그런 놈들 투성이다. 크레파스를 이리 돌리고 저리돌려가며 겨우겨우 그림을 도화지 위에 채워가다가는 미처 다 채우지도 못하고 종이 울리는 것이었다. 미술시간을 겨우 마친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하다. 즐거운 그림 그리기시간이 아니라 크레파스와 한바탕 시름을 한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하루하루 쌓여가자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도 미술이 들어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폭발을 해버린 것이다. 무슨 큰 건수라도 잡은 냥,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선 것이다. 평소 아버지 앞에서 힘도 못쓰던 촌넘이 그날은 그렇게 단단히 용기를 낸 것이다.

 

이유를 모르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시는 아버지께,

 

"아버지~! 저 크레용 바까주세요~!"

"아내 왜?"

제 크레용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하도 단단해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냐? 얼마짜리루?"

"오십원 짜리요!"

오십원씩이나??

 

아버지의 반응은 당시 우리집 가정의 형편을 정확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다.

 

같은 반에는 선장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 대부분 농사를 짖는 집안의 아이 들어었지만 그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엔진이 달려있는 큰 배를 운용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크레파스를 가지고 학교에 왔다. 색갈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크레용이 아니었다.

 

부드럽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도화지 위를 날아가듯 스쳐가듯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손이 가는대로 색갈을 내주는 이 신비한 크레파스, 그 색감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을 가진, 바로 파스텔이었던 것이다. 무지렁이 촌놈들이 파스텔을 처음 보고는 눈들이 똥그래가지고, 빙 둘어서서 그 친구가 조심스럽게 다루는 그 파스털의 색감에 감탄을 금치 못하곤 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넘...이 친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에 담겨있는 그 부러움 가득한 감정...그 오묘함은 파스텔보다 더 또렷하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께 떼를 써서는 열두가지 색을 가진 크레파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 값은 무려 오십원이었다!! 무지개를 그릴 수 있고, 도화지위에 색감이 먹히는 크레파스 말이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의 값이 오십원이었다. 시내버스의 요금은 15원 혹은 20원.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가격의 크레파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짜장면 한 그릇 값의 크레파스를 부담없이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핵교) 5-6학년이 되니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자기 집이 상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

당연 손 드는 놈  하나없다.

"그럼 자기 집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죄다 손을 든다.

눈치를 보는 넘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죄다 손을 번쩍 치켜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럼 자기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드는 친구가 있을리 없다.

(이런 질문을 왜 했을까? 한마디로 가정 환경조사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집이 중산층이라고 번쩍 손을 들던 넘들, 나를 포함하여 한마디로 거시기가 찢어지게 가난한 넘들이었다. 당연한 것은 서로 비교를 할 처지가 아예 되지를 못했다. 잘 사는 집안이라고 해봐야 겨우 작은 엔진 달린 통통 배를 가진 그 친구네 달랑 하나였고, 나머지는 서로 비교할것도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들 뿐이었으니 이런 촌놈들은 지네가 진짜로 중산층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이 뭐가 가난한데?? 다른집이랑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옆집과 차이가 없는 가정, 바로 중산층이었던 것이다.

 

6학년이 되니 테레비가 있는 집 손들어봐, 냉장고가 있는 집 손들어봐,  하는 질문으로 바뀌었는데, 테레비가 뭔지, 냉장고가 뭔지 그 의미를 모르는 놈들에게 물어봐야 소득이 없다. 찢어지게 가난했으면서도 그것이 가난인 줄 모르고 지냈던 나의 과거는 차라리 아름다운 추억이지 싶다.

 

그렇게 나의 추억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동리는 많이도 변해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변해있고, 과거 깊은 산골의 적막함도 변해있고, 세상은 더더욱 변해있다. 오로지 변하지 않은 것는 하늘을 흘러가는 푸르른 저 구름뿐....

 

아니다. 하나가 더 있는데 그만 깜박했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이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이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그것이다. 언제나 너그럽고 자애로운 그 마음 말이다... 결코 깜박할 일이 아닌데 자식은 늘 이렇게 깜박한다. 아름다운 그 마음에 어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이다 내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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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0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님의 글을 만날수 있어 좋네요

차트랑 2014-08-0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바람님,
아주 오랫만에 뵙는군요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 언젠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친구는 서구의 사고가 동양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어디 동양 뿐 이던가. 전 세계를 지배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의 요지는 서구 사상의 강력한 위대성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한창 서구의 철학에 깊이 침잠해 있었고, 한마디로 노닐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 친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타자를 지배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와 그 논리, 한마디로 서구의 ‘이성’이야 말로 얼마나 위대한 것이던가. 과학을 일으키고 각종 분야의 학문을 일으켜 전 세계의 사고와 관념을, 즉 우리의 세상을 완전히 딴 세상으로 바꾸어 놓은 사상이 아니던가.

 

하여 나는 과거 칭기즈칸과 그의 후예들이 80여 개국을 점령했고, 해가 지지 않던 나라였던 영국이 과거 지배한 땅의 2배, 그토록 위대하다는 알렉산더가 지배했던 땅의 7배가 넘는 땅을 강점하면서 무자비하게 휩쓸어버렸던 그 위대함을 말해 준 적이 있다.

 

 

때마침 몽골의 칸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프랑스, 독일 등도 北方之强(북방지강)의 그 강력하고도 거친 위대함 앞에 결코 무사치 못했을 것이며 현재의 유럽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유럽을 한창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던 몽골군은 차기 칸을 선출하는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철군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인도를 통해 몽골로 가고자 함이었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나선 것이지만 최종 목표는 몽골과의 무역 이권이었던 것이다. 몽골의 위대함을 실감할만한 대목이다.

 

 

 

 

목차를 비롯,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기대감으로 가슴을 부풀게 하는 책을 만나곤 하는데 신영복의 『강의』가 그 중 하나이다. 구입해놓은 지는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저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간간히 읽어볼 요량으로 미루고 미루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의 편견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저자의 글 전개방식이 눈에 띈다. 강의라는 제목이 말해주는가. 글은 논리정연하고 질서가 있다. 진도를 나가며 새롭게 되짚어 올라갈 필요가 없다. 명료하다. 교과서를 연상시키는 내용의 전개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의 장점이다.

 

한마디로 글의 전개 방식이 명료하고 글은 유려하며 질서 정연한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다. 더구나 내재하고 있는 온고지신의 창의적 사고는 나의 편견이 그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자각하게 한다.

 

고전 관련하여 출판되는 많은 도서들은 강의라는 형식을 빌어 짜깁기의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차만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밀도 있고 심원한 그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 말이다. 알고 보면 나의 편견은 이유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편견을 보기 좋게 깨트려주는 책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의 의도를 한마디로 약한다면 ‘동양 고전 독법’이다. 시대를 거슬러도 한참 거슬러 올라가는 동양 고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즉,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다. 고전이라는 매우 친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는 당연하다. 역(易)을 비롯 유․도․묵․법가와 그들의 생각을 텍스트를 통해 조명하며 큰 줄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경우라면 일반적인 것 이겠지만 이 책의 특징은 한 발 더 나아가는데 있다.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유도하는데 있다.

 

누군가로 하여금 사유토록 하기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쓴이의 창의적인 생각과 그 생각이 주는 여백, 그것이다. 나머지 여백은 독자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 물론 사유를 통해서다.

 

또 다른 장점은 서구의 역사를 지배해온 '생각'을 함께 사유토록 하는 점으로 그 의미가 크다. 저자가 대표적으로 던져주는 테제는 서구의 존재론, 동양의 관계론이다. 서구의 진리가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라면, 동양의 ‘道’는 ‘길’이다. 서구의 '도'는 사유 속에 있고, 동양의 '도'는 삶 속에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동서양 철학의 테제가 마무리되면 동양 고전의 주인공들을 목차에 따라 등장시킨다. 동양의 사유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가지는 사상의 특성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사유를 유도하면서 말이다. 역(易)도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易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易에 대한 독자와의 간극을 상당히 좁혀주는 역할은 한다. 역을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해준다. 더불어 남송대의 유자들이 유학을 연구 발전시킨 동기와 결과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뒤이어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공맹순노장, 그리고 묵․법가이다. 이들의 철학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相(상)이다. 반면 서양의 그 것은 絶(절)이다. 부연하자면 동양의 相對(상대)와 서양의 絶對(절대)인 것이다. 하여 동양의 고전은 관계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반면, 서구의 그것은 존재론으로 환원한다.

 

우리의 국민 정서는 종교의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반면, 서구의 명문법은 그 다양성을 인정을 하되 실질적으로는 이단을 용서치 않는 정서를 가지는 것은 이러한 사유의 차이다. 이러한 사유는 독선이 될 수가 있다. 존재론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절대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되버린다. 철학이 정치의 시녀, 혹은 부속품이 되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좋은 예이니 말이다.

 

하여 동양의 관계론은 실천이 뒤따른다. 반면 서구의 그것은 사유 속에서 맴돈다. 사유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틀을 깨는 순간 모든 것은 죄다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서양은 그것을 한 곳으로 모아서 가두어두려 한다. 서구의 과학이 ‘중력자’를 그토록 애타게 찾는 이유도 그것이다.

 

 

 

독선이 불러오는 비극

 

동양이라고 해서 사유의 독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이 그러했다. 주희의 그것과 한 글자라도 다른 사유는 사문난적이며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서인들은 주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독선에 빠져 전체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당시 대 학자이자 실천을 중시했던 윤휴는 주자의 중용장구 주석을 다르게 고쳐 읽었다. 숙종실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자사의 뜻을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반적(叛賊)이다. 「숙종실록」 3년 10월 17일

 

결과는 뻔했다. 윤휴는 전체주의 집단의 집요한 모략과 음모를 견디지 못하고 난적도 아닌 반적으로 몰려 결국 사사되었다. 같은 유학자끼리도 이러한 독선을 적용시킨 것이 조선이었으니 사상이 다를 경우에는 어떠했겠는가. 조선 후기에 유일하게 노자주(老子註)를 집필한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박세당이 바로 그 냥반이다. 유자(儒者)로서 박세당은 도가(道家)인 노자주를 집필한 그 죄가 크다하여 또한 사사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박세당은 유자였지만 주희를 중심으로 교조화된 유학의 획일화를 염려했다. 실천, 즉 후대들이 실학이라고 칭하는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를 외치던 윤휴와 박세당은 그렇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숨을 강제당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왕필은 새파란 20대에 노자주를 완성했고 현재 그의 역작은 명저라 불리고 있지 않던가. 조선이 동양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적 독선에 빠지면서 사유의 다양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도․묵․병가에 실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사유를 강제당함으로서 폭 넓고 자유로운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가에 목을 매던 조선은 결국 제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타자의 생각을 수용하지 못하는 존재의 종말은 대개 이러하다.

 

서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언뜻 사유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서양인 듯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제 아무리 다양하다 한들 그 방향성에 문제가 있었다. 서구 사상의 특징은 지고한 사유의 최고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과학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아인시타인을 비롯 서구의 과학자들은 『궁극의 이론』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죄다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론, 그것이 바로 궁극의 이론인 것이다.

 

애초에는 불변이라고 믿었던 아인시타인이 특수상대론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의심을 받았고 새로운 이론을 필요로 한다. 이론들은 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발전인지는 판단할 수 없으나 한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서구의 과학은 『초끈 이론』에 다다른다.

 

만약 이 궁극의 이론을 입증했다고 치자, 그 이론이 모든 이론의 종말이라는 것, 즉 진정한 궁극의 이론이라고 과연 누가 절대 확신 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그들의 사상은 어떻게 정치에 영향을 끼쳐왔던가.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빼앗아 왔다. 선의의 경쟁이란 그들만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고,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미국 독립선언문) 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자신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타자들은 완벽하게 제외된 평등과 권리이며 자유와 행복의 추구였던 것이다.

 

이정도면 애교에 가깝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면서 타자를 학살했던 독일을 보면 더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핵심이 고전 독.법.인 이유

 

제 아무리 양서를 많이 읽고 사유한다 한들, 그 방향성이 바르지 않다면 오히려 독선이 되고 비극을 불러올 수 있음은 분명하다. 저자가 이 책을 易(역)의 이해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양 사상의 출발점인 易은 애초부터 변화로 시작하여 변화로 끝을 맺는다. 세상은 무한한 변화의 연속이고 상호 관계한다. 절대(絶對)란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에 절대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변화를 해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동양의 생각이다. 변화는 바로 창조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가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확장한다하더라도 그 존재는 의미를 찾을 길이 없다. 다른 그 어떤 존재가 있어주어야만 자신의 존재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동양의 생각인 것이다. 상대가 없는 ‘나’는 의미가 없다. 혼자서 하는 운동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속하기가 힘들다. 몇 일 혼자 하다가도 영 흥이 나지 않는다. 혼자서 할 수 밖에 없는 수영도 그 어느 상대와 어울릴 때 만이 흥미를 더하는 것이 아니던가. 여럿이 하는 축구도 마찬가지다. 한 팀만 있어가지고는 흥이 나지 않는다. 여러 팀이 우승을 놓고 대(對)를 할 때만이 신이 나는 것이다.

 

 

여기서 對(대)라는 말은 敵(적)이라기보다는 짝(對)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가 우리의 짝이 되어줄 필요가 있다. ‘그대’가 있음으로 ‘나’가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그리하여 짝짖기를 한다. 짝짖기는 어찌보면 창조의 본능이다. 짝을 이루지 못하면 창조를 이루어 낼수가 없다. 상호 짝을 이룰 때 만이 창조는 가능한 것이다.

 

하여 相交(상교)라는 것은 동양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고 바탕이 된다.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서로 비긴 바둑을 화국(和局)이라고 할까. 서로는 同(동)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화(和)는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독법인 이유이다.

 

하여 『강의』는 우리에게 고전을 관계라는 소통을 염두에 두고 읽도록 권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이다. 저자가 주인공들을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소개하다보니 읽고 싶어지는 책이 한둘이 아이다. 흔히 말하는 四書는 물론이요 도가, 묵가, 법가등이 그러하다. 책에서 책으로의 전이를 불러일으키는 책이 바로 『강의』인 것이다. 책이란 자고로 이래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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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관독일기를 읽어보지 못한 탓에 둘의 차이가 어떠한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저자의 관독일기는 그야말로 이덕무에 대한 오마주이며 고요한 자신의 독백지 싶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지은이가 정말로 독서량이 많은 사람이이라는 것을 감지케 한다. 주로 고전이 독서의 대상일 것이다. 잠과 명으로 그 범주를 제한했지만 그의 독서력과 량은 가히 짐작키 어려운 수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부제가 말하듯 주된 독서는 잠과 명이지만, 책에서는 그 외에도 저자의 고독이 눈에 띈다. 특히 107쪽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는데,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 고독’은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오는 ‘절대 고독’이라는 말보다 그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든다. 마치 시퍼런 칼날처럼 말이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다’는 말이 무엇이던가. 바로 중용의 백인가도(白刃可蹈)를 이름이 아니던가. 시퍼렇다 못해 하얀 칼날 위를 걷는 용기를 일컬음이다. 그 용기 저편에 서있는 사람은 끈임없는 절대 고독을 견뎌야 한다. 고독을 견뎌야만 용기를 낼 수 있고 비로소 한 인간은 백인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과연 누가 그 고독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순수하며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시인, 茶兄 김현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茶兄의 詩 '절대고독'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둔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와 함께.

 

 

 

 

 

시인 茶兄께서 '절대고독'이라 말씀은 하시지만 그에게 고독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어쩌면 '고독'은 인간 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여 茶兄에게 고독은 즐거움이며 자신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관독일기의 저자의 고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의 독서 일기를 적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이 나올 당시에 이미 그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기를 그렇게 적어왔다고 한다. 지금도 저자가 그렇게 한 해의 중양절을 시작으로 일기를 적어오고 있는지 궁금해 지는 것은 그 동안의 독서가 그 얼마나 방대할까를 짐작해서이다. 나로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인지라 그저 존경스럽고 부러울 뿐이다.

 

일기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잠과 명을 읽으며 적어간 이 글은 또한 수필의 느낌을 주기도 하며, 내용은 상당히 자조적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저자의 주요 저술은 이 책이 아니라 저자가 일기를 쓰던 당시 주 타겟으로 하고 있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주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관독일기를 하루하루 써간 것이다. 독자로서 이점을 배워두어야 겠다 싶다. 바쁜 와중에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목표를 세워 그것을 이루어 내는 저자의 모습은 과연 유배지에 있던 여유당께서 자녀들에게 보낸 서한을 읽은 사람답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간이 나도 책을 읽지 않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독서에 게으르고 시간이 나면 딴짓을 하곤한다. 관독 일기는 그런 나에게 좋은 채근을 준다.

 

더불어, 카메라를 새것으로 장만해가며 공들여 찍은 사진들은 아마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다음 독서의 순서는 그 책으로 자연 정해져 버렸다.

 

여러 날의 일기들이 대부분 매우 인상적이지만 특히 저자가 남원에 들렀던 날의 기록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기고봉의 전설을 잠시 소개 하고 있다. 기고봉은 이퇴계와 수년간에 걸친 필담으로 사단칠정을 서로 교환한 장본인이다. 말이 교환이지 기고봉께서 먼저 도전장을 내밀어 시작된 논쟁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고봉은 이퇴계를 궁지로 몰아 넣었고 궁해진 이퇴계는 자신의 학문을 더욱 개진, 발전시켜 반론을 폈던 것이다. 그러한 이황의 저술이 상당부문 임진왜란때 약탈당하여 일본의 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중국의 사상가로 하여금 李夫子라는 호칭을 들은 인물로 부상했던 것은 어쩌면 기고봉의 덕분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매우 인상적인 대목은 안순암의 경어를 언급한 부분이다

안정복은 성호 이익의 직계 후학으로 “대장부 심중에 일촌 쇠는 녹지 않는다. 大丈夫心中一村鐵未銷”라는 말을 소개한다.

 이 말은 마치 논어 중 ‘자한’이 출전인 “삼군가탈사야 필부불가탈지야(三軍可奪師也 匹夫不可奪志也)” 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三軍은 제후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많은 군대의 규모로 총 37,500명의 전차가 있는 부대를 말한다. 막강한 군대의 장수의 목을 취할 수는 있어도 필부의 의지는 절대로 꺽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장부와 필부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자한 편에 나오는 이 말에서 匹夫라는 말을 더없이 애정하게 되었다. 과연 맹자가 말한 大丈夫와 공자가 말한 匹夫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싶다. 무릇 필부란 그래야 하는 법이다.

 

순암의 기록은 사적인 것이겠지만 지극히 인상적인데, 177쪽의 순암 6잠과 4경을 소개할 때는 그 절정에 달한다. 순암은 자신의 오른 쪽과 맞은 편에 각각4 글자 새겨 놓았다고 한다. 이는 주역의 곤괘 “경이직내 의이방외”하는 문구라고 한다.

 

 

한문을 그대로 옮기면 “敬으로써 안을 곧게하고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이고, 줄인 말대로 옮기면 “경으로 곧게, 의로서 바르게”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는 곧 공경한 자세로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하고 의에 입각하여 자신의 외부 행동을 단속한다는 의미이다. 177쪽

 

저자의 말이 매우 지당한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이 敬과 義는 실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밖으로 바르게한다’는 말이 바로 실천력이다. 일생을 통해 경과 의, 두 글자로 삶을 충실하게 살다간 이가 있으니, 바로 조선의 조남명이 아니던가. 하여 그 제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는데 압장섰는데 정인홍, 곽재우는 그 대표적인 예라하겠다.

 

 

전반적으로 관독일기는 靜中動을 느낄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해주면서 깊은 사유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하는 능력을 가진 책이다. 조용히 관조하고 싶다거나 숙고의 기회를 가지고 싶은 분이라면 매우 좋은 책이 되어주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두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선, 저자가 잠명으로 고른 대상 인물들 대부분 대단히 훌륭하고 내적 사유를 참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인물들이다. 문장은 고고하고 아름다우나 일생이 그렇지 못했던 인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백운거사 이규보에 대한 글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스로 경계해야 할 일에 대한 명’과 같은 글이다. 나는 이규보의 글이 등장 할 때마다 잠시 읽기를 멈추곤 했다. 이규보는 고려의 인물로 권력에 무던히도 집착한 나머지 온갖 비굴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씨 일가에 빌붙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썼던 인물이다. 백운거사라는 닉네임도 사실은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하여 비관, 은둔했던 당시에 얻은 이름이 아니겠는가.

 

 

오죽했으면 이 책의 저자가 사모하는 이덕무마저도 그의 인물평을 혹독하게 했겠는가. 이덕무는 이규보가 남긴 글의 가치를 전혀 알아주지 않았는데 ‘추졸하고 산만하여 명실이 꼭 맞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이 덕무의 이규보의 글에 대한 평가에서 ‘추졸’이라는 말보다는 ‘명실’이라는 말에 의중을 두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글로만 본다면 어찌 이규보의 글을 추졸하다고 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명실'이라는 말로는 능히 이규보의 글공부를 한 사람으로서는 전혀 바르지 못했던 행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던가. 이덕무는 이 ‘명실이 꼭 맞지 않는다’라는 평으로 이규보의 글과 그 행동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음을 설파한 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말을 남겼다 한들, 그 말을 남긴 인물이 자신이 남긴 말 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삶을 살았다면 그 언어의 가치와 비중은 거품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하여 사적으로 매우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다른 집고 넘어갈 부분은 다음과 같다.

『중용』 장구章句에 나오는 계신공구는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에서 온 말로,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 183쪽

 

이 곳의 부도는 불도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한데, 다음의 불분과 서로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비록 한글로 읽는다 하더라도 대구를 염두에 두고 일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한글의 음운법칙을 우선 적용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럴 경우 '부도'로 읽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잘못된 지적임을 인정함)   

 

 

또한

호은은 “숨은 곳 보다 더 드러남이 없으며, 은미한 일 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183쪽

 

저자는 위 글을 ‘막견’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莫見乎隱은 ‘막현호은’으로 읽는 것이 맞다. ‘見’을 ‘견’으로 읽으면 ‘본다’는 뜻이 되지만 ‘현’으로 읽으면 ‘나타난다, 드러난다, 명백하다’는 뜻이 된다. 즉 본 장구의 ‘見’은 뒤에 이어 나오는 顯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편, 莫見乎隱 莫顯乎微에 대해서 박완식 선생은 중용에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보다 더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 없다" -중용(박완식)75쪽 

 

물론 저자의 '숨은 곳'을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은미한 일'을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으로 각각 이해를 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겠으나, 이는 중용을 읽어본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혹 아직 중용을 읽을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에게는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 적어둔다. 

  

참고로 박완식 선생의 이 중용은 참으로 귀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주자의 집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문제점은 공부하여 스스로 바로 잡으면 될 일이고,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은 글자 하나 하나의 의미를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다산의 중용강의보를 직집 읽을 수 없는 입장이라면 그 대안으로 매우 유용한 책임에 틀림이 없다. 집주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중용 장구의 완전한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저자의 역작이라 감히 평하고 싶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750여 쪽을 꽉 채우고 있는 박완식선생의 이 중용을 손에 드는 순간 몰아의 경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을 읽고자 하는 분들께 강력 추천드리고 싶다.

 

물론 막견이라고 읽는다고 해서 저자의 책을 읽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 이 글을 노트를 해 둔다거나 암기하여 사용하는 독자가 있다면 저자가 독자에게 정보를 잘 못 전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 할 수가 있어 지적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어쨌든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저자의 고독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저자가 소개한 잠과 명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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