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언젠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친구는 서구의 사고가 동양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어디 동양 뿐 이던가. 전 세계를 지배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의 요지는 서구 사상의 강력한 위대성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한창 서구의 철학에 깊이 침잠해 있었고, 한마디로 노닐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 친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타자를 지배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와 그 논리, 한마디로 서구의 ‘이성’이야 말로 얼마나 위대한 것이던가. 과학을 일으키고 각종 분야의 학문을 일으켜 전 세계의 사고와 관념을, 즉 우리의 세상을 완전히 딴 세상으로 바꾸어 놓은 사상이 아니던가.

 

하여 나는 과거 칭기즈칸과 그의 후예들이 80여 개국을 점령했고, 해가 지지 않던 나라였던 영국이 과거 지배한 땅의 2배, 그토록 위대하다는 알렉산더가 지배했던 땅의 7배가 넘는 땅을 강점하면서 무자비하게 휩쓸어버렸던 그 위대함을 말해 준 적이 있다.

 

 

때마침 몽골의 칸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프랑스, 독일 등도 北方之强(북방지강)의 그 강력하고도 거친 위대함 앞에 결코 무사치 못했을 것이며 현재의 유럽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유럽을 한창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던 몽골군은 차기 칸을 선출하는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철군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인도를 통해 몽골로 가고자 함이었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나선 것이지만 최종 목표는 몽골과의 무역 이권이었던 것이다. 몽골의 위대함을 실감할만한 대목이다.

 

 

 

 

목차를 비롯,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기대감으로 가슴을 부풀게 하는 책을 만나곤 하는데 신영복의 『강의』가 그 중 하나이다. 구입해놓은 지는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저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간간히 읽어볼 요량으로 미루고 미루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의 편견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저자의 글 전개방식이 눈에 띈다. 강의라는 제목이 말해주는가. 글은 논리정연하고 질서가 있다. 진도를 나가며 새롭게 되짚어 올라갈 필요가 없다. 명료하다. 교과서를 연상시키는 내용의 전개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의 장점이다.

 

한마디로 글의 전개 방식이 명료하고 글은 유려하며 질서 정연한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다. 더구나 내재하고 있는 온고지신의 창의적 사고는 나의 편견이 그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자각하게 한다.

 

고전 관련하여 출판되는 많은 도서들은 강의라는 형식을 빌어 짜깁기의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차만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밀도 있고 심원한 그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 말이다. 알고 보면 나의 편견은 이유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편견을 보기 좋게 깨트려주는 책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의 의도를 한마디로 약한다면 ‘동양 고전 독법’이다. 시대를 거슬러도 한참 거슬러 올라가는 동양 고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즉,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다. 고전이라는 매우 친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는 당연하다. 역(易)을 비롯 유․도․묵․법가와 그들의 생각을 텍스트를 통해 조명하며 큰 줄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경우라면 일반적인 것 이겠지만 이 책의 특징은 한 발 더 나아가는데 있다.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유도하는데 있다.

 

누군가로 하여금 사유토록 하기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쓴이의 창의적인 생각과 그 생각이 주는 여백, 그것이다. 나머지 여백은 독자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 물론 사유를 통해서다.

 

또 다른 장점은 서구의 역사를 지배해온 '생각'을 함께 사유토록 하는 점으로 그 의미가 크다. 저자가 대표적으로 던져주는 테제는 서구의 존재론, 동양의 관계론이다. 서구의 진리가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라면, 동양의 ‘道’는 ‘길’이다. 서구의 '도'는 사유 속에 있고, 동양의 '도'는 삶 속에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동서양 철학의 테제가 마무리되면 동양 고전의 주인공들을 목차에 따라 등장시킨다. 동양의 사유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가지는 사상의 특성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사유를 유도하면서 말이다. 역(易)도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易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易에 대한 독자와의 간극을 상당히 좁혀주는 역할은 한다. 역을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해준다. 더불어 남송대의 유자들이 유학을 연구 발전시킨 동기와 결과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뒤이어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공맹순노장, 그리고 묵․법가이다. 이들의 철학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相(상)이다. 반면 서양의 그 것은 絶(절)이다. 부연하자면 동양의 相對(상대)와 서양의 絶對(절대)인 것이다. 하여 동양의 고전은 관계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반면, 서구의 그것은 존재론으로 환원한다.

 

우리의 국민 정서는 종교의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반면, 서구의 명문법은 그 다양성을 인정을 하되 실질적으로는 이단을 용서치 않는 정서를 가지는 것은 이러한 사유의 차이다. 이러한 사유는 독선이 될 수가 있다. 존재론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절대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되버린다. 철학이 정치의 시녀, 혹은 부속품이 되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좋은 예이니 말이다.

 

하여 동양의 관계론은 실천이 뒤따른다. 반면 서구의 그것은 사유 속에서 맴돈다. 사유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틀을 깨는 순간 모든 것은 죄다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서양은 그것을 한 곳으로 모아서 가두어두려 한다. 서구의 과학이 ‘중력자’를 그토록 애타게 찾는 이유도 그것이다.

 

 

 

독선이 불러오는 비극

 

동양이라고 해서 사유의 독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이 그러했다. 주희의 그것과 한 글자라도 다른 사유는 사문난적이며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서인들은 주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독선에 빠져 전체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당시 대 학자이자 실천을 중시했던 윤휴는 주자의 중용장구 주석을 다르게 고쳐 읽었다. 숙종실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자사의 뜻을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반적(叛賊)이다. 「숙종실록」 3년 10월 17일

 

결과는 뻔했다. 윤휴는 전체주의 집단의 집요한 모략과 음모를 견디지 못하고 난적도 아닌 반적으로 몰려 결국 사사되었다. 같은 유학자끼리도 이러한 독선을 적용시킨 것이 조선이었으니 사상이 다를 경우에는 어떠했겠는가. 조선 후기에 유일하게 노자주(老子註)를 집필한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박세당이 바로 그 냥반이다. 유자(儒者)로서 박세당은 도가(道家)인 노자주를 집필한 그 죄가 크다하여 또한 사사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박세당은 유자였지만 주희를 중심으로 교조화된 유학의 획일화를 염려했다. 실천, 즉 후대들이 실학이라고 칭하는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를 외치던 윤휴와 박세당은 그렇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숨을 강제당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왕필은 새파란 20대에 노자주를 완성했고 현재 그의 역작은 명저라 불리고 있지 않던가. 조선이 동양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적 독선에 빠지면서 사유의 다양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도․묵․병가에 실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사유를 강제당함으로서 폭 넓고 자유로운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가에 목을 매던 조선은 결국 제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타자의 생각을 수용하지 못하는 존재의 종말은 대개 이러하다.

 

서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언뜻 사유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서양인 듯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제 아무리 다양하다 한들 그 방향성에 문제가 있었다. 서구 사상의 특징은 지고한 사유의 최고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과학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아인시타인을 비롯 서구의 과학자들은 『궁극의 이론』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죄다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론, 그것이 바로 궁극의 이론인 것이다.

 

애초에는 불변이라고 믿었던 아인시타인이 특수상대론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의심을 받았고 새로운 이론을 필요로 한다. 이론들은 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발전인지는 판단할 수 없으나 한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서구의 과학은 『초끈 이론』에 다다른다.

 

만약 이 궁극의 이론을 입증했다고 치자, 그 이론이 모든 이론의 종말이라는 것, 즉 진정한 궁극의 이론이라고 과연 누가 절대 확신 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그들의 사상은 어떻게 정치에 영향을 끼쳐왔던가.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빼앗아 왔다. 선의의 경쟁이란 그들만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고,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미국 독립선언문) 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자신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타자들은 완벽하게 제외된 평등과 권리이며 자유와 행복의 추구였던 것이다.

 

이정도면 애교에 가깝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면서 타자를 학살했던 독일을 보면 더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핵심이 고전 독.법.인 이유

 

제 아무리 양서를 많이 읽고 사유한다 한들, 그 방향성이 바르지 않다면 오히려 독선이 되고 비극을 불러올 수 있음은 분명하다. 저자가 이 책을 易(역)의 이해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양 사상의 출발점인 易은 애초부터 변화로 시작하여 변화로 끝을 맺는다. 세상은 무한한 변화의 연속이고 상호 관계한다. 절대(絶對)란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에 절대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변화를 해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동양의 생각이다. 변화는 바로 창조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가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확장한다하더라도 그 존재는 의미를 찾을 길이 없다. 다른 그 어떤 존재가 있어주어야만 자신의 존재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동양의 생각인 것이다. 상대가 없는 ‘나’는 의미가 없다. 혼자서 하는 운동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속하기가 힘들다. 몇 일 혼자 하다가도 영 흥이 나지 않는다. 혼자서 할 수 밖에 없는 수영도 그 어느 상대와 어울릴 때 만이 흥미를 더하는 것이 아니던가. 여럿이 하는 축구도 마찬가지다. 한 팀만 있어가지고는 흥이 나지 않는다. 여러 팀이 우승을 놓고 대(對)를 할 때만이 신이 나는 것이다.

 

 

여기서 對(대)라는 말은 敵(적)이라기보다는 짝(對)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가 우리의 짝이 되어줄 필요가 있다. ‘그대’가 있음으로 ‘나’가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그리하여 짝짖기를 한다. 짝짖기는 어찌보면 창조의 본능이다. 짝을 이루지 못하면 창조를 이루어 낼수가 없다. 상호 짝을 이룰 때 만이 창조는 가능한 것이다.

 

하여 相交(상교)라는 것은 동양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고 바탕이 된다.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서로 비긴 바둑을 화국(和局)이라고 할까. 서로는 同(동)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화(和)는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독법인 이유이다.

 

하여 『강의』는 우리에게 고전을 관계라는 소통을 염두에 두고 읽도록 권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이다. 저자가 주인공들을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소개하다보니 읽고 싶어지는 책이 한둘이 아이다. 흔히 말하는 四書는 물론이요 도가, 묵가, 법가등이 그러하다. 책에서 책으로의 전이를 불러일으키는 책이 바로 『강의』인 것이다. 책이란 자고로 이래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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