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인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백승헌 지음 / 하남출판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리뷰보다는 어느 순간 페이퍼를 더 선호하는 입장에서 이 책은 고민거리였다. 생각 끝에 리뷰를 쓰기로 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오류 때문으로 말미에 언급하기로 한다.

 

최근 한의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사상체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상체질에 관계하시는 분이로구나 싶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 저의 체질은 어떻게 되나요?' 라고 여쭈었다.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전에는 체질과 관련하여 진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막상 진료를 해보니 단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는 환자들에게 체질에 관한 언급을 피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내심 기대를 했다가는 적잖은 실망을 했다.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인 사상의학이 독보적이라고는 하지만 東의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활용성을 점한 것은 아닌 듯 보이고, 대체의학계가 이를 수용하고 있는 입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의학계의 인정을 받든 아니든 간에,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이 흥미로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의(西醫)와는 달리 동의(東醫)는 애초에 만병의 근원을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 보았다. 타에 의한 마음의 상처 혹은 내적 발로의 상심은 당사자의 면역력에 관계하여 외부에서 오는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내적 질환을 만들어 낸다고 본 것이다. 양의에도 이를 흔히 스트레스, 즉 심인성 질환이라고 명명하고 있고 현대의 다양한 질환들이 이에 해당하는 실정이다.

 

우리말에 ‘환장(換腸),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있다. 환(煥)이라는 말은 ‘불꽃, 불빛, 빛난다’는 뜻이고 장(腸)은 창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두어야 할 점은 장(腸)이다. 창자를 뜻하는 장(腸)은 사실은 정(情), 즉 마음인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정신)의 상태가 크게 격동하여(煥)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당대(唐代)의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야우문령장단성(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울리는 풍경소리에 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구나, 라고 읊었는데, 장단(腸斷) 즉,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마음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동의는 인간의 감정을 중시했고,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희노우사비경공, 즉 칠정(七情)의 불균형에서 병이 깃든다고 보았다. 칠정은 사정(四情)의 다른 표현으로 중용의 첫 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사람의 감정(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中 이라고 하고,

발이개중절 위지화(發而皆中節 謂之和)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는 것을 和라한다”

 

이를 중용이 아닌 동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람의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 있다가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으면 和를 이루어 내는 법이지만, 발현하되 절도에 들어맞지 않으면 즉, 양극단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사람의 몸에 병이 깃든다, 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 싶다.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동물이듯, 그 마음도 늘 함께 움직이게 마련이다. 하여 중용에서 말하는 칠정이 中의 상태에 있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항상 발현하게 마련인데 몸(體)과 함께 각각의 정(情)들이 활발하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하여 칠정 중 어느 하나가 그 임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이 지나쳐도 몸이 상하고, 노여움이나 슬픔이 지나쳐도 마찬가지다. 이제마가 중용의 사정(四情)에 착안하여 사상의학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람의 체(體)와 질(質)을 4가지로 분류하여 임상 연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100 여년이라는 짧은 역사가 말해주듯 사상의학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하여 항간에는 8체질론이 나오고, 더불어 이 책에서처럼 28체질론으로 확장 보완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제마는 체질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체(體)는 육체, 즉 몸이고, 질(質)은 정신, 즉 마음을 의미한다.” 106쪽

 

이제마는 몸과 마음(정신)을 하나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이 아프면 칠정도 상하게되고, 칠정이 상하면 몸도 따라 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뜻밖의 사고를 만나 몸을 심하게 다치게되면 어디 짜증 뿐이겠는가. 쉽게 화를 내거나 노여워하고 때로는 낙심하여 풀이 죽는다. 부상의 정도에 따라 그 당사자의 심리 상태는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심적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의 경우 또한 병이 깃들게 마련이다. 욕심이 지나쳐도 마음의 병을 만든다. 이는 칠정이 그 임계치를 넘어선 결과이며 칠정이 양극단으로 치우친 결과물이다. 하며 예로부터 만병은 마음에서 온다했던 것이다.

 

체질론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간장의 상태가 좋은 사람은 자녀가 달려가다가 넘어졌을 때 웃어 넘길 수 있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진 사람의 경우 넘어진 어린 자녀에게 화를 낼 수가 있겠구나 싶다. 하여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떤 때는 웃어 넘기다가도 다른 때에는 화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간(肝)은 기쁨(喜)을 관장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다.

사상체질론은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한다. 체질에 따라 장기의 크기와 그 기운이 다르다고 본다. 물론 사람의 성격도 그에 따라 다르게 된다. 하여 체질을 약물치료나 음식에 적용시켜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첨언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사람의 장기가 선천적으로 크고 작음으로 실과 허가 정해진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화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태생적으로 간이 튼실하고 폐가 상대적으로 약한 태음인이라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간장이 허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폐가 일시적으로 승증을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간이 실하고 폐가 허한 사람으로 단정하여 치료에 임한다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적인 생각을 하게되었다.

 

체질론에 따르면 맛에 매우 민감한 소음인의 경우 비위가 태생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냄새에 더욱 민간해지는 순간을 만난다. 냄새에 가장 민감한 체질은 태음인이다. 태음인은 상대적으로 폐가 약해 공기 중의 산소율이 다른 체질의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소음인이 맛 보다는 냄새에 더욱 민감해지는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는 비위보다는 폐가 매우 약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경우 비위보다는 폐를 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약재를 사용할 때, 단정적이기보다는 당사자의 몸 상태에 따라 적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보는 이유이다.

 

또한 체질론은 체질에 따라 음식을 가려먹는 것의 이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분명 이점이 맞다. 그러나 건강이 매우 양호한 상태에서는 음식에 체질을 관여시키는 것이 꼭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몸이 대부분의 음식을 잘 소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체질과 맞지 않으며 기운이 강한 음식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체력이 약해진 상태이거나 심신이 지쳐있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병중이라면 체질론에 따른 섭생은 중요하다고 본다. 음인이 병중 일 때,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이다.

 

사상 체질론의 또 다른 어려움은 체질의 판단이다. 저자도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수학의 공식처럼 똑 떨어지는 정답을 가진 경우라면 문제는 없다. 체질의 판단에 오류가 날 경우 치료는 되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정확한 체질의 판단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책에서는 다양한 체질의 판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점 또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체질론은 분명 흥미로운 의학적 접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역사가 짧은 만큼 연구의 깊이가 아직은 미약해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제마의 체질론이 인간의 성정을 다루며 철학과 의학을 만나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실로 독보적인 관점의 접근이랄 수 있다. 서의는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애초에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연구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플라톤은 정신세계를 너무 애정한 나머지 물질을 중시하지 않았다, 아니 경시했다. 물질은 변덕스러운 존재인지라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항구적이며 영원불변한 세계, 바로 정신의 지고한 세계를 애정한 결과 이데아론을 제창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데아론으로 동의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동의는 변화 자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자연의 이치요 애초에 본질로 본 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장기 상태가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장기(臟器)는 그 장(臟)이 가지는 고유의 기(氣)을 담아 두는 그릇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다. 해당 장기의 균형이 깨면 그에 해당하는 정기(情氣)가 이상을 일으켜 격동하게 된다. 한마디로 칠정의 이상 움직임은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감정 상태가 몸의 건강 상태와 직결된다고 보는 사상의학은 분명 독보적인 관점임에는 틀림이 없다.

 

친구네는 얼마 전, 화장실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검사결과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사람은 죽겠는데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서의의 특징은 병이 겉으로 드러나야만 치료에 임할 수 있는 의학적 특성을 지닌 듯 하다. 물론 요즘은 서의에서도 심인성, 즉 심리적인 요인에서 병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질병과 마음(情)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외적, 내적인 병인을 다스리는 의학의 발달을 기대해보는 이유이다.

 

조선의 동의학계에 걸출한 인물, 구암이 있지만 사상의학을 의학적 관점이 아닌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좋은 이제마도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 각기의 장점들을 찾아 적절한 접목을 이루어 내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본 도서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다음의 내용이다.

 

 

처음에는 이 책이 28체질론, 즉 사상체질의 확장인고로 내용이 달라진 것인가?하고 의아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책의 나머지 부분들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저자의 집필의 실수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초판이 2002년임을 감안할때 그동안 전혀 수정을 거치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판본이 이어질 경우 교정이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알라디너들의 건강을 위해 한마디를 첨언하고 싶다.

반후행삼십보 불용개약포 飯後行三十步 不用開藥包

한마디로 식사후 삼십보를 걸으면 약지어 먹을 일이 없다, 라고 이해해면 되겠다.

직접 실험을 해본 결과 300―500보 정도를 걸었을 때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개인 차이가 있기마련이겠지만...

 

아파본 사람은 안다. 건강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