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용의 장구가 주는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조선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흔히 선비라 일컫는 조선의 엘리트들은 유학을 백성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고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宋代 주희의 그것을 표본으로 하고 이에 한 치의 어긋남이 있는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휴는 중용의 장구를 새롭게 다듬었고 그 해석을 주희의 그것과는 다르게 시도했었다. 윤휴는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와 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등의 저술을 남겼고 이는 윤휴 빛나는 최고의 업적 중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주희의 해석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였던 송시열은 그런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갔고 이는 결국 조선 최고의 유학자 중 한사람인 윤휴가 사사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극단적인 예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당대의 풍토가 그러했던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고 주희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철저하게 매장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조선이었다. 같은 시가 중국에서조차 한물간 주희의 학문을 그토록 열열히 신봉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학이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기 때문이었다. 주희의 학문이 흔들린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권력이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기득권을 가진 집권세력에게는 참을 수 없는 권력과 재산의 손실을 의미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백성을 지배하고 왕을 견제하는 주요 무기로 사용했던 조선의 집권세력들의 유학은 실상 절름발이 학문이었으며 현대인들에게는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겠으나 유학의 순수성은 그 폐해만으로 평가 할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동양 고전의 가르침을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것이 후학들이 해야 할 책무임을 저자 김용옥선생이 강조하는 것이다. 더불어 중용의 해설을 시도한 김용옥선생이 중용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경전이라고 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용을 좀 읽었다고 리뷰를 작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교(敎)의 참된 뜻의 깨달음을 줌과 동시에 배움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비단 배우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향하는 중용의 가르침이 또한 지극히 간곡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세 또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르치는 장구 중 한 구절을 리뷰로 대신하고 싶다.



배우는 사람의 자세: 대학과 중용의 가르침 비교


大學에서 발전의 과정을 전하고 있는 8조목은 매우 유명한 문구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이 말을 어른이 아닌 현대의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로 재해석한다면 ‘격물치지-공부를 열심히하여 이치를 깨닫고, 성의정심-매사에 정성을 하다며 마음을 똑바로 쓰고, 수신제가-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으며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치국평천하-나라에 쓰일 훌륭한 재목이 될 수 있다.’ 정도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해석은 학생들에게 맞는 버전으로 해석한 것이지 원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이러한 발전의 단계라고 여기는 대학의 8조목과 견줄 수 있는 중용의 장구는 23장이다. 대학의 8조목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른데 그 뜻을 살펴보면 어떤 느낌의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주희의 대학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선비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문구가 친민(親民)이냐 신(新民)이냐이다. 원래는 친민이었던 것을 정자(程子)가 신민으로 바꾸었고 주희가 이를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친민과 신민의 차이는 뜻하는 바가 매우커서 신민으로 이해할 때 백성들은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정치이념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 곳은 다름아닌 조선이었다. 신민이라는 말은 무지한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는데 곧 글을 모르는 조선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백성들은 수신의 자격을 갖지 못하며 결국 치(治)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드는데 일조한 글자가 바로 신민이다.   

 

 

 

중용의 23장은 다음과 같다.

其次致曲

기차치곡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箸, 箸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唯天下至誠 爲能化.

 유천하지성 위능화


다음으로 힘써야 할 것은 치곡(致曲)이다. 치곡(致曲)은 아주 작은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곡진(曲盡)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간곡(懇曲)하다’는 표현에 낮설지 않다. 여기서 간(懇)이라는 말은 ‘정성을 다하여 마음 쓰고 노력을 다한다’는 뜻으로 성(誠)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치곡(致曲)은 바로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는 마음이 모든 곳에 이르도록 힘쓴다’는 뜻이 되겠다. 아마도 대학의 성의(誠意)라는 말은 중용의 曲과 같은 말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점은 대학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대학은 성의 정심에 이어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강력한 의무를 지운다. 조선에서 수신(修身)이라는 말은 매우 엄격하면서도 강력한 무기였다.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의 강역를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든 사건이었다. 조선의 세자였던 소현과 왕자였던 봉림 그리고 척화를 주장했던 대표 인물들을 비롯 약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는 조선의 자존심에 엄청난 수치와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청에서 돌아와 왕위를 물려받은 효종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북벌을 천명했고 이를 강력하게 추친 코자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은 효종에게 북벌의 덕목으로 수신(修身)을 강조하면서 효종의 손발을 묶어놓았던 것이다. 선비들은 조선의 왕에게 조차 수신이라는 말로 그 뜻을 뭉개버릴 정도였다. 그러니 글자를 모르던 일반인들에게 수신제가란 과연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말은 이렇게 조선의 백성들에게 넘을 수 없는 신분의 건널 수 없는 선 그어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용에서는 수신이라는 말로 이어 놓은 것이 아니라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는 말로 잊고 있다. 지극히 곡진하면 성(誠)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하면 誠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곡진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면 성(誠)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다음은 성즉형(誠則形) 이다. 모양을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정성을 다하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형체로 구체화된다. 현대적으로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멋진 모습을 갖게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형즉저(形則箸)이다.

간곡하며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말, 즉 저(箸)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상대방이 성심을 가지고 언행을 하는 것인지는 금방 드러나게 마련이다. 왜냐면 그 사람의 언행은 바른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사과나 감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마음으로 곡진한 마음으로 감사 또는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 눈빛과 태도를 보면 드러나게 마련 아니던가... 그러니 형즉저(形則箸)인 것이다.

  

이어지는 단계는 저(箸)하면 명(明)한다 즉 箸則明이다. 곡진한 마음을 다한 구체적인 개인과 사물의 형태가 드러나면 밝아지기(明) 시작한다. 좋은 일, 보람 있는 일을 한 사람의 얼굴에 밝아 보이는 이치와 같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반대로 나쁜 짖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밝을 리가 없다. 마음이 어두우면 얼굴도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밝은 얼굴이 그 얼마나 좋은 기운을 가진 얼굴이던지....


 명(明)하면 동(動)한다 즉 明則動이다. 말하자면 밝은 모습으로 매사에 임하고 친교를 나누는 사람들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모이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좋은 사람 좋은 것 주변에는 좋은 사람과 좋은 것들이 모이는 이치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들이 모이면 무엇인가 좋은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동(動)이다.

 

이렇게 動하면 변(變)하게 된다.  동즉변(動則變)인 것이다. 움직이는 힘은 변하게 마련이다. 간곡한 마음과 성실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꾀한다면 아니 될 일이 없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變이다.


마지막으로  變則化이다. 變과 化는 그 뜻하는 바가 다르고 한다. 變은 외형적인 변모를 뜻하고 化란 형질의 바뀜이다. 變을 이루어 내면 비로소 化에 이르게 된다. 化를 이루고나면 현재의 나는 이전까지의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온전하게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된다. 보다 더 훌륭하고 보다 더 인간적이며 보다 더 멋진 사람, 化를 이루어 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 즉 化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天下至誠, 오직 천하에 성(誠)만이 있을 뿐이다. 唯天下至誠 爲能化


인간이 이루어내는 化는 자신을 새롭고 훌륭한 한 인간으로서 키워낼 수 있다는 뜻이 되고 나아가 세상을 새롭게 바꾸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어 낸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化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化를 이루어 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曲, 誠이 아니면 불가능 하다는 뜻을 가르치는 고전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것이 공부이든 인격이든 무엇이든 간에 지극한 정성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는 중용의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大學에서 가르치는 修身齊家와는 전혀 다른 말씀이다. 오직 천하의 至誠만이 化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매사에 마음을 다하여 지극하고 곡진한 정성을 들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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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2-04-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이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저의 조잡한 리뷰가 부끄러워 집니다.
 
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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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을 공부해보겠다고 덤벼든지 6개월이 지났지만 텍스트를 읽으면 읽을수록 중용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저 욕심에 중용의 텍스트를 싣고 있는 책만 여러 권 가진 꼴이 되고 말았다. 명심보감을 비롯 논어, 맹자, 대학등의 가르침을 깨달은 후에 중용의 가르침을 받으라 전하는 말이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중용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한다는 자체가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듯 하다.


‘동양의 고전은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지 않고 논한다면 그 것이야말로 큰 글을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학문이 깊은 지인의 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는 중용을 대하는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결코 중용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 이렸다. 하여 중용의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기 시작했지만 머리가 나쁜 탓에 그만 장구를 거듭해 갈수록 어리버리하고 만다.

 

이렇듯 감당하기 힘든 중용의 리뷰를 적을 자격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중용의 큰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심정으로 리뷰를 적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용의 리뷰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중용의 가르침 중 학생들을 대하는 한 사람으로 매우 귀감이 되는 구절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할까한다. 중용의 첫 장구는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라는 글로 시작한다. 첫 구절의 강렬한 인상도 인상이겠지만 지금껏 해온 일과 관계가 있는 교(敎)라는 글이 그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 말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중용은 위의 15글자를 통하여 性, 道, 敎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나는 교(敎)라는 말을 깊이 새기고자 한다. 하여 敎에 중점을 두다보니 장구의 시작을 거꾸로 이해할 수 밖에는 없다. 중용의 교(敎)라는 말은 첫 장구인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데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敎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절의 뜻으로 보건대 그 敎를 이해하기 위해서 道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그것 인데 이는 ‘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道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性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그것으로 이는 ‘天이 命하는 것 그 것을 일컬어 性이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天이란 우주의 이치 혹은 섭리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렇다면 天이 命하는 性이란 무엇인가... 이는 모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실체들 각각의 성질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EBS에서 황제 펭귄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적이 있다.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들은 꼼짝하지 않고 알을 품어 부화시키고 어린 새끼를 키우는 수고로움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을 품기 시작하여 새끼로 자라게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도 눈물겹고 고달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방송을 보신 분들은 황제 펭귄에게 새끼를 키운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을 낳자마자 어미는 아빠 펭귄에게 알을 건네고 먼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아빠 펭귄과 교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빠 펭귄은 엄마 펭귄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무려 4개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알을 품는다. 음식물은 전혀 먹을 수가 없다. 아차 실수하여 알을 놓치기라도 하면 영하 50도의 강력한 추위속에서 알은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펭귄들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알을 다시 품어보겠다고 기를 쓴다. 어디 이 뿐인가. 새끼를 또 아차 실수하여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새끼를 어미는 품겠다고 또 그렇게 애닯아 한다.

 

 어미가 먹이를 충분히 먹고 돌아오면 아빠 펭귄이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온다. 그 거리는 무려 100km가 넘는다. 일정 기간을 넘기면 아기 펭귄은 아사하고 만다. 엄마가 토해내는 음식물이 바닥이 나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펭귄들은 한계 시간대를 넘기지 않고 돌아온다. 그들에게 시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황제 펭귄은 그토록 연속된 시련의 행위를 왜 마다하지 않는 것을까...바로 天이 命한 그 性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이치는 황제 펭귄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을 부여한 것이다. 어쩌면 펭귄이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선택 마 저도 추호의 어김도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性 이기 때문이다. 뜻이 그러하다면 주희가 그 性에 주석을 달기를, "性은 곧 理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이 들 뿐이다. 


 

 ‘道를 道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물론 이는 도가인 노자의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가의 중용에서는 분명히 道를 설명하고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바로 그것이다. 즉 天이 命한 그 性을 따르는 것이 바로 道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황제 펭귄은 도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性을 매우 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에게 도란 무엇인가를 말할 차례이다. 자연의 한 존재인 펭귄에게 性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에 합당한 性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도 역시 자식을 낳고 교육시키며 기른다. 뿐만 아니라 가족 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고 도우며 中과 和를 이루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공자가 말했다시피 인간은 仁을 행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함에 애틋하고 타인을 사랑함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어야 한다. 세상의 和를 이루는 것이 인간이 갈 길인 것이다. 그 길에는 仁, 義, 禮, 知, 信이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비로소 敎라는 말이 나온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가 그것이다. 결국 인간이 따라야 할 그 本性에 맞는 길을 가는 것 道이고 그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그렇다면 敎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敎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의 敎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의 첫 장구를 공부한 사람에게 敎란 인간 본연의 性을 충실히 따르고 행하며 갈고 닦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중요은 道 다음에 敎를 놓고 있다. 이 얼마나 敎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던가... 참된 敎를 이토록 의미심장하게 가르치는 고전을 또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敎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만 같다. 교라는 말 속에는 엄중하고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의 지혜를 가진 뜻이 담겨있으니 그 말의 아득함을 어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학교 내의 교권이 추락했다는 말이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敎의 權이 추락했다는 말은 敎에 權이라는 껍질을 하나 입혔기 때문에 생긴 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용에서 말하는 敎는 결코 추락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엄중함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말은 아닐런지...중용에서 가르치는 敎를 깨닫는다면 교권은 반드시 바로 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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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렇게 읽으신다는 게 어딥니까?
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근데 글씨가 커서 좋습니다.
글씨체가 뭔가요? 폰트는 10으로 키우신 건가요?
요즘엔 글씨 작으면 잘 안 읽게 되요.ㅋ

차트랑 2012-03-06 14: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저의 독서기록장에서 오른쪽 마우스로 복사해서
리뷰나 페이퍼를 작성합니다.
글씨는 한컴바탕이고요 폰트는 10입니다.
그런데 선명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듯 합니다.
테스트를 좀 해봐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또,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읽으실 수가 있습니다^

2012-03-06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2-03-0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용, 쉽고도 어려운 교훈 인 듯 합니다
 

드보르작은 체코의 작곡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작품활동을 하면서 미국인들의 환대에 보답하는 의미와 더불어 '신세계로부터' 라는 교향곡 9번을 작곡하게 된다. 'From the New World'라는 교향곡을 완성한 해가 1893년 있으니  미국을 신세계라고 생각할만 했음직하다.

 

우리들에게도 낮설지 않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이 가장 각광받고 있는 곳은 사실 호주이다. 호주땅에는 본디 '아보리진'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세계의 땅이란 땅은 모두 개척 혹은 탐험 혹은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인들의 발아래 무릅을 끓어야 했다. 그러한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여년 전 호주는 영국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1770년 영국의 쿡 선장의 배가 호주로 떠밀려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략 200여년 전 이 호주에 영국인 죄수 700명을 포함한 영국인 1300여명이 시드니에 도착하게되면서 호주의 역사는 급변하게된다. 애초에 호주는 영국의 악질 범죄자들의 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워낙 혼잡하고 자신들 스스로의 조상들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족들의 집합체이다. 특히 색슨족들은 매우 거친 민족으로 유명하다. 영국은 자신들의 기질이 매우 거칠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정화 작업에 나선다. 그리하여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되는 죄수들을 호주라는 먼 섬에 강제 압송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회 정화의 의지가 얼마나 컷던지 강제 압송된 죄수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린이가 그 어떤 강력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아일랜드 정치범, 살인자, 강도, 사기꾼등 범죄자들을 이렇게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목적은  사회를 정화하는 차원이었다. 하여 간혹 영국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호주로 갈래 아니면 죽을래?' 하는 식의 질문을 주고 받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덕분에 영국은 사회 질서의 안정을 찾았고 엄격한 교육(도둑질하는 어린이의 손을 자르는 등의)을 병행한 결과 현재 우리들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라고 알려지기 까지는 영국의 엄청난 자정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이후 80여년 동안 영국은 16만명에 해당하는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쓰레기'들인 범죄자들을 호주에다 내다 버리는 일을 추진한다.

 

 

 

 

그러던 1851년 어느 날...호주에서 금광맥이 발견되는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만다. 금맥의 발견은 호주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바꾸어 놓은 대형 사건이었다. 단순한 유배지가 아니라 골드러쉬가 시작된 것이다. 급기야 호주에는 600만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황금 전쟁이 시작된다.

 

호주는 이제 영국인들의 차지가 된것이다. 호주의 아보리진은 당시 약 500여 부족의 대략 50만명 (어떤 이는 100만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원주민의 인구가 무려 4만명이라는 수치로 격감하게된다. 만약 100만이라는 수치가 사살이라면 도대체....영국인들은 호주 원주민들에게 무슨 짖을 한 것이란 말인가...거의 90%이상, 아니 95%이상의 호주 원주민들이 영국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날벼력을 맞은 원주민들은 그 얼마나 억울했을까...

 호주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 때에는 원주민들과의 '화의'라는 기치하에 아보리진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기도 했다. 봉화 봉송주자들을 대거 원주민들로 구성해 넣었다. 그러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종 차별은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없다고들 한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소외계층으로 남아있고 들러리 비주류이다. 200여년 전 땅의 주인이 바뀐 후 원주민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억울했던 원주민들의 역사는 차치하고, 이 곳 호주로 이주해온 영국인들의 가슴에는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배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아프리카의 고향을 강제로 떠나 아메리카로 잡혀간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음악으로 달래듯이 호주로 이주한 영국인들은 이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으로 마음을 달래는 듯 싶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웬수와 같은 영국인들이겠지만 그들도 고단한 나날을들 보냈노라고 말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의 조상들은 고향인 영국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 향수는 대를 이었을 것이고 현대에 와서는 가장 애호하는 교향곡을 드보르작 9번 신세계로부터를 꼽고있다. 노래는 고향곡의 2악장에 노랫말을 붙야 세계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Go'in home, go'in home/  I'll be go'in home

Quiet light, some still day/  I'm just go'in home

 

It's not far, just close by/  Through an open door

Work all done, care laid by/ Go'in to fear no more


Mother's there xpect'in me/ Father's wait'in, too

Lots of folk gathered there/ All the friends I know

all the friends I knew


Nothing's lost, all's gain/ No more fret nor pain

No more stumbl'in on the way/ No more long'in for the day

Go'in to roam no more

 

 

Morning star lights the way / Restless dreams all done

Shadows gone break of day / Real life just begun


There's no break, there's no end/ just'a liv'in on

Wide awake with a smile / go'in on and on

Go'in home, go'in home / I'll be go'in home

It's not far, just close by/ Through an open door

 

I'm just go'in home / Go'in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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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3-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음악이 아침부터 멋지게 울리네요...
소년 합창단의 목소리는 종소리같아요.

세계의 역사에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세가 넘어서입니다.
정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유시민씨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아직도
고히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그렇기도 하구요... 사람 사는 사회란, 참으로 복잡하고
그리고 한 덩어리로 치부해버리기엔, 개인의 역사 또한 참 길다는 생각이 들어요.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3-05 11:58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신대로 역사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바른 역사를 알리려는 사람들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도 재고할 필요성이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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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들이 꼭 읽어야 하는 작가, 조셉 캠벨


필독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제는 필독가라는 말도 때론 성립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바로 조셉 캠벨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신화와 인생을 번역한 이윤기선생이 이 책을 번역하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조셉 캠벨은 참으로 멋진 생각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 어떤 현상도 조셉 캠벨의 사고 영역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그것이 종교이든 철학이든 간에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것들은 잘 버무려지고 융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격게 된다. 그야말로 ‘化’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무시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양성을 고스란히 보존시켜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맛을 주는 사고의 소유자인 것이다. 조셉 캠벨을 우리들의 20대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열린 사고


 젊은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의 열린 사고이다. 저자는 큰 줄기의 종교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신화들을 연구해온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기독교, 불교, 유학, 도학등은 물론 일반인들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아메리카 부족을 비롯 아프리카의 원주민에 이르는 그들의 신화를 연구해왔다. 어쩌면 전 세계의 신화란 신화는 죄다 섭렵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자신 스스로 기독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원론적인 기독교적 이론들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때로 조셉 캠벨을 지극히 동양적 사상에 물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절대자와 인간의 간극인 넘볼 수 없는 종교적 금기사항을 저자는 무참히도 무너뜨린다. 이원론적 사고 혹은 사상은 기필코 대척점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구도로 이해하는 그에게 이윈론이 자리 잡을 여지는 결단코 없다. 캠벨에게는 정신적 작용력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정말 멋진 독서법


이토록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저자가 젊은 독자들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함은 독서의 좋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캠벨이 조이스와 토마스 만 그리고 슈펭글러를 읽다보니 니체를 언급한 장면이 나오고 그렇게 니체를 읽는다. 니체를 읽으려면 쇼페펜하우어를 읽어야하고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킨트를 읽어야 한다.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매우 힘들다. 그리하여 괴테로 돌아간다. 조이스가 쇼펜하우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이스의 시스템에서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슈펭글러의 사고 시스템과 조이스의 것이 매우 밀접하다는 점을 칼 융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버무리는 작업을 해내는 것이 캠벨의 독서방법인 것이다.


사실 동양의 고전을 읽을 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중용을 읽다보면 대학, 논어, 주역 혹은 맹자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독서의 역량이 늘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방식이 아니던가... 젊은 20대들에게 캠벨은 결혼 혹은 인생의 의미 뿐 아니라 진정한 독서의 방식과 그 가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왕성한 독서력을 발휘할 수 있는 20대들에게 이 책은 매우 귀중한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캠벨, 중용과 만나다...


  동양의 사상을 약간을 신비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인 아쉬움으로 남지만 ‘인간은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동양의 고전인 중용의 장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에는 ‘지성여신’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이다.’라는 말이다. ‘지성여신’이라는 문구 앞에는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직 천하의 지성이라야만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둘을 합치면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자신의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고 그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조셉 캠벨의 이야기와 흡사한 말이던가...인간은 신성으로 가득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조셉 캠벨의 말은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인 중용의 한 장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아파치족의 이야기는 지극히 물권을 인정하고 있다. ‘모든 사물들은 살아있고, 그 사물들은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사물을 인간이라는 방향에서 출발하여 사고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주체로하여 사고한 말이다. 중용에서도 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인권이 중요하듯이 물권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능진기성 위능물지성’이 그것이다. 천지인의 조화로움과 일원론을 주장하는 동양사상에서 물권의 중요성을 제기한다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의 사상으로는 설파하기 매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캠벨은 우리의 젊은 독자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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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글러선생은 2007년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한국의 서점가에 출간했도, 한 해 뒤 '탐욕의 시대'를 출간했다.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하 왜)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도 필독서로 추천을 할정도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반면 많이 읽히고는 있지만 '탐욕의 시대'는 '왜-'만큼은 아닌 듯 하다. 두 책을 모두 읽던 당시  '왜-'보다는 '탐욕의 시대'가 훨씬 더 의도를 전달하는데 성실하고 더 집중해서 쓴 책이 아닌가 생각했다. 같은 저자의 유사한 책으로 정보 전달력에서나 글쓴이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탐욕의 시대'가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상대적으로 약한 '왜-'보다 인지도면에서 뒤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                                2007년

 

 

두 책의 비교

 

                                           세일즈포인트   표시가      할인율    알라딘판매가     쪽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96,583         9,800원   30%      6,860원       201 쪽

탐욕의 시대                        :   11,138         15,000원  50%     7,500원       362 쪽

 

단순히 표면적인 비교로보아 '왜-'의 인지도가 '탐욕의 시대'보다 훨씬 압도적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는 지표이다. 물론 알라딘 세일즈포인트로 본다면 출간 년도로도아 '왜'가 1년이라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2007년에 출간된 책(왜-)의 할인율이 30%이고 2008년에 출간된 책(탐-)의 할인율은 50%라는 할인율로 볼때 현재 판매 지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책은 즉, 인지도면에서 '왜-'가 앞세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탐욕의 시대'가 그 목적을 전달하는데 훨씬 더 좋은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현실과 직면하게된다...왜 이런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고민거리가 없으니 별걸 다 고민한다 싶겠지만 사실은 '탐욕의 시대'가 '왜-'보다 훨씬 더 좋은 도서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름대로 생각해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책의 이름이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린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는데 매우 충실한 표지어는 누가뭐래도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다. '탐욕의 시대'는 '왜-'와 내용에서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이라는 용어가 매우 광의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 용어라는 점이다. '탐욕의 시대'는 경제적으로 강력한 부를 일군 초강대국들이 아직 개발 중에 있거나 개발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국가들의 양털을 어떻게 깍아내는지 매우 잘 전달해주고 있고, 그 작용력의 원리를 훨씬 더 세부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는 '왜-'와 그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다. 

 

 한마디로 '탐욕의 시대'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아이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고개를 왜면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이 경제적으로 나아질 수 없는 환경속으로 자꾸만 밀어넣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훨씬 잘 표현되어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렇다 치더라도 '탐욕의 시대'는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조차도 비교적 덜 알려진 느낌이다. 이는 가독성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있다. 가독성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추천 대상서적으로서 중요한 참고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독성을 따진다면 단연 '왜-'보다는 '탐욕의 시대'를 권하고 싶을 정도이다.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왜-'를 압축한 형태로 저술했다. 반대로 탐'욕의 시대' 안에는 좀더 많은 정보를 담아두어 독자들이 읽어나가는데 훨씬 유리하도록 했다. 왜 초강국들이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들을 그토록 못살게 구는가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인터넷 주문이다. 인터넷으로 읽을 책을 구매하다보면, 받아보고나서... 이게 아닌데...라는 경험을 한 번 쯤 하게 마련이다. 독자들의 리뷰가 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같은 책에대한 평가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신간이라면 리뷰를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읽는데는 시간이 소요되고 읽는 독자 중 리뷰를 쓰는 경우는 그 비율이 많지 않아보인다. 하여 때로는 땡스투를 누를 기회도 없이 책을 사야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책방에가서 직접 책을 골라 선택하는 경우라면 분명 '탐욕의 시대'와 '왜-'의 상대적 우위는 아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생각하는 이유이다.  

 

모든 면에서 보아 단연 알라딘 세일즈포인트에서나 할인율에서 단연 우위를 점해야 하는 '탐욕의 시대'를 50% 할인한 가격으로 내놓는 모습을 보니 이름도 잘지어야 겠구나 싶다. 또한 좋은 책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에 뜻하지 않은 페이퍼를 쓰게되었다...

 

물론 제대로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책이 어디 이 책 뿐이랴...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들 중 그 자격이 없는 책이 베스트셀러 행세를 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책의 가치 평가는 개개인이 하는것이지 객관적인 잣대로 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 혹은 고전이라는 대접을 받는 책들은 많이 팔린다고해서 그 자격을 얻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만한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인정받는데 어려움이 있는 책들이 여전히 많다. 독자들이 득서를 하는 이유와 그 목적이 서로 다른 것이 이유일까...여하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더 좋은 책이 밀려나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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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베스트셀러라고 다 좋은 책은 아니라니까요.
서점의 논리는 시장의 논리와 같아 기본적으로 잘 나가는 책을 밀어주지
좋은 책을 밀어주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좋은 책은 일케 독자에 의해 입소문을 타야한다는 거죠.ㅋ

차트랑 2012-03-02 00:00   좋아요 0 | URL
시장의 논리가 서점가에도 적용이 되다니...
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시장의 논리가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게 하는 이유인데...말이지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