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용의 장구가 주는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조선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흔히 선비라 일컫는 조선의 엘리트들은 유학을 백성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고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宋代 주희의 그것을 표본으로 하고 이에 한 치의 어긋남이 있는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휴는 중용의 장구를 새롭게 다듬었고 그 해석을 주희의 그것과는 다르게 시도했었다. 윤휴는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와 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등의 저술을 남겼고 이는 윤휴 빛나는 최고의 업적 중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주희의 해석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였던 송시열은 그런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갔고 이는 결국 조선 최고의 유학자 중 한사람인 윤휴가 사사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극단적인 예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당대의 풍토가 그러했던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고 주희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철저하게 매장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조선이었다. 같은 시가 중국에서조차 한물간 주희의 학문을 그토록 열열히 신봉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학이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기 때문이었다. 주희의 학문이 흔들린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권력이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기득권을 가진 집권세력에게는 참을 수 없는 권력과 재산의 손실을 의미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백성을 지배하고 왕을 견제하는 주요 무기로 사용했던 조선의 집권세력들의 유학은 실상 절름발이 학문이었으며 현대인들에게는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겠으나 유학의 순수성은 그 폐해만으로 평가 할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동양 고전의 가르침을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것이 후학들이 해야 할 책무임을 저자 김용옥선생이 강조하는 것이다. 더불어 중용의 해설을 시도한 김용옥선생이 중용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경전이라고 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용을 좀 읽었다고 리뷰를 작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교(敎)의 참된 뜻의 깨달음을 줌과 동시에 배움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비단 배우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향하는 중용의 가르침이 또한 지극히 간곡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세 또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르치는 장구 중 한 구절을 리뷰로 대신하고 싶다.



배우는 사람의 자세: 대학과 중용의 가르침 비교


大學에서 발전의 과정을 전하고 있는 8조목은 매우 유명한 문구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이 말을 어른이 아닌 현대의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로 재해석한다면 ‘격물치지-공부를 열심히하여 이치를 깨닫고, 성의정심-매사에 정성을 하다며 마음을 똑바로 쓰고, 수신제가-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으며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치국평천하-나라에 쓰일 훌륭한 재목이 될 수 있다.’ 정도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해석은 학생들에게 맞는 버전으로 해석한 것이지 원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이러한 발전의 단계라고 여기는 대학의 8조목과 견줄 수 있는 중용의 장구는 23장이다. 대학의 8조목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른데 그 뜻을 살펴보면 어떤 느낌의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주희의 대학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선비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문구가 친민(親民)이냐 신(新民)이냐이다. 원래는 친민이었던 것을 정자(程子)가 신민으로 바꾸었고 주희가 이를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친민과 신민의 차이는 뜻하는 바가 매우커서 신민으로 이해할 때 백성들은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정치이념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 곳은 다름아닌 조선이었다. 신민이라는 말은 무지한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는데 곧 글을 모르는 조선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백성들은 수신의 자격을 갖지 못하며 결국 치(治)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드는데 일조한 글자가 바로 신민이다.   

 

 

 

중용의 23장은 다음과 같다.

其次致曲

기차치곡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箸, 箸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唯天下至誠 爲能化.

 유천하지성 위능화


다음으로 힘써야 할 것은 치곡(致曲)이다. 치곡(致曲)은 아주 작은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곡진(曲盡)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간곡(懇曲)하다’는 표현에 낮설지 않다. 여기서 간(懇)이라는 말은 ‘정성을 다하여 마음 쓰고 노력을 다한다’는 뜻으로 성(誠)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치곡(致曲)은 바로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는 마음이 모든 곳에 이르도록 힘쓴다’는 뜻이 되겠다. 아마도 대학의 성의(誠意)라는 말은 중용의 曲과 같은 말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점은 대학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대학은 성의 정심에 이어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강력한 의무를 지운다. 조선에서 수신(修身)이라는 말은 매우 엄격하면서도 강력한 무기였다.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의 강역를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든 사건이었다. 조선의 세자였던 소현과 왕자였던 봉림 그리고 척화를 주장했던 대표 인물들을 비롯 약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는 조선의 자존심에 엄청난 수치와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청에서 돌아와 왕위를 물려받은 효종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북벌을 천명했고 이를 강력하게 추친 코자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은 효종에게 북벌의 덕목으로 수신(修身)을 강조하면서 효종의 손발을 묶어놓았던 것이다. 선비들은 조선의 왕에게 조차 수신이라는 말로 그 뜻을 뭉개버릴 정도였다. 그러니 글자를 모르던 일반인들에게 수신제가란 과연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말은 이렇게 조선의 백성들에게 넘을 수 없는 신분의 건널 수 없는 선 그어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용에서는 수신이라는 말로 이어 놓은 것이 아니라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는 말로 잊고 있다. 지극히 곡진하면 성(誠)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하면 誠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곡진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면 성(誠)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다음은 성즉형(誠則形) 이다. 모양을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정성을 다하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형체로 구체화된다. 현대적으로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멋진 모습을 갖게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형즉저(形則箸)이다.

간곡하며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그 모양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말, 즉 저(箸)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상대방이 성심을 가지고 언행을 하는 것인지는 금방 드러나게 마련이다. 왜냐면 그 사람의 언행은 바른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사과나 감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마음으로 곡진한 마음으로 감사 또는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 눈빛과 태도를 보면 드러나게 마련 아니던가... 그러니 형즉저(形則箸)인 것이다.

  

이어지는 단계는 저(箸)하면 명(明)한다 즉 箸則明이다. 곡진한 마음을 다한 구체적인 개인과 사물의 형태가 드러나면 밝아지기(明) 시작한다. 좋은 일, 보람 있는 일을 한 사람의 얼굴에 밝아 보이는 이치와 같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반대로 나쁜 짖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밝을 리가 없다. 마음이 어두우면 얼굴도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밝은 얼굴이 그 얼마나 좋은 기운을 가진 얼굴이던지....


 명(明)하면 동(動)한다 즉 明則動이다. 말하자면 밝은 모습으로 매사에 임하고 친교를 나누는 사람들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모이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좋은 사람 좋은 것 주변에는 좋은 사람과 좋은 것들이 모이는 이치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들이 모이면 무엇인가 좋은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동(動)이다.

 

이렇게 動하면 변(變)하게 된다.  동즉변(動則變)인 것이다. 움직이는 힘은 변하게 마련이다. 간곡한 마음과 성실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꾀한다면 아니 될 일이 없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變이다.


마지막으로  變則化이다. 變과 化는 그 뜻하는 바가 다르고 한다. 變은 외형적인 변모를 뜻하고 化란 형질의 바뀜이다. 變을 이루어 내면 비로소 化에 이르게 된다. 化를 이루고나면 현재의 나는 이전까지의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온전하게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된다. 보다 더 훌륭하고 보다 더 인간적이며 보다 더 멋진 사람, 化를 이루어 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 즉 化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天下至誠, 오직 천하에 성(誠)만이 있을 뿐이다. 唯天下至誠 爲能化


인간이 이루어내는 化는 자신을 새롭고 훌륭한 한 인간으로서 키워낼 수 있다는 뜻이 되고 나아가 세상을 새롭게 바꾸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어 낸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化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化를 이루어 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曲, 誠이 아니면 불가능 하다는 뜻을 가르치는 고전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것이 공부이든 인격이든 무엇이든 간에 지극한 정성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는 중용의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大學에서 가르치는 修身齊家와는 전혀 다른 말씀이다. 오직 천하의 至誠만이 化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매사에 마음을 다하여 지극하고 곡진한 정성을 들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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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2-04-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이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저의 조잡한 리뷰가 부끄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