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은 뜻밖의, 정말 의외의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책을 만나는 순간 그 기쁨과 희열은 비할 수 없이 크다. 알라디너라면 그러한 책을 만난 적이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라 여긴다. 내게도 그런 책이 있다. 밀도 있고, 정렬적이며, 정성을 들였고, 온 힘을 쏟아부었구나 싶은 이 책이다. 사적으로 매우 귀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책, 바로 「생태주의 시학」이다.
생소한 제목의 책이지만 내용은 그만 감동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몇몇 우리의 시인들은 이미 생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걱정과 우려로 그들의 아픈 가슴을 시로 써 나아갔다. 지극히 대중성을 지닌 시들이지만 실제로는 대중적이지 못한 시들이 많다.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어쩌면 그 제목들은 어디선가 들어보았음직 한 것들이기도 하다. 물론 별로 널리 읽히며 팔려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시가 그러했듯, 이 책 역시 별로 알려지지는 않은 듯하다. 10년이 지났지만 리뷰하나, 아니 페이퍼하나 없다. 이유는 자명하다. 저자가 돈벌이가 되지 않는 내용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닌 생태주의가 우리들의 뇌리 속에 뼛속 깊이 자리잡지 않은 탓이던가, 이토록 아름다운 책은 알려지지 못한 채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생태, 친환경을 외치는 사회에 살고 있고,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에 큰 관심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각 국가의 정책은 자본 중심이고 우리의 건강에 관심을 줄 여유가 없다. 이에 홀로 고독한 경종이라도 울리듯, 저자는 외롭고 쓸쓸한 생태주의를 노래한 시인들의 시를 정밀하게 분석해낸다. 역시나 고독하게..아, 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것이었구나 싶은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밀려온다. 모름지기 책이란 이처럼 저자의 땀과 피나는 노력과 정렬, 그리고 자신의 진정성을 가득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아니 독자로하여금 그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해야 한다. 사람들은 시를 어려운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관념을 산산히 부서주거나 혹은 역시나 겁나게 어려운 것이 시라는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해주거나! 어쨋거나 친환경이니 에코이니 하는 말은 이제 인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서울의 하늘은 평소의 하늘, 평소의 공기가 아니었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었고 그 공기는 우리들의 폐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숨을 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대기가 숨쉬기에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더 과거에는 황사를 으레 그려니 했고 지금처럼 그리 폐해가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몇일 전의 공기는 정녕 최악이었다.
자연보호는 초중등학교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고, 매체는 에코, 그린, 혹은 친환경을 외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낸 슬로건일 뿐, 그 내면은 마케팅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알고보면 환경에 해악을 끼칠 수 밖에 없는 상품에 기업은 죄다 그런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고 있으며, 정작 알아보아야 할 우리는 기업이 환경을 위해 애를 쓰는 줄로 안다. 학교도 기업도 말로는 자연보호를 외치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자연을 생각해 본 적이 과연 있던가. 자연보호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전두엽을 손상시켜 인지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치매 혹은 암을 유발시킨다는 초미세먼지를 우리의 자녀들이 마시게 했다. 기성세대는 공범이나 진배없다.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물과 공기를 더럽혀왔으니 말이다. 아니 의식의 부재로 되려 오염을 부추겨왔다. 사실은 국가도 기업도 국민도 모두 공범인 것이다. 그러나 영문도 모르고 자신을 해치는 공기를 마시고 있는 저 어린 아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조만간 중금속으로 가득 한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라 한다. 그들에게 이제는 생화학전용 방독면을 권해야 할 때가 온 것인가. 그들의 조상들이 만들어 낸 오염으로 찌든 공기가 폐로 들어가 그들의 온 몸을 병들게 하고 말 것이니 말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2500년 전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쳤고, 서구에서는 그 족보를 들추면 니체를 만날 수 있다. 니체는 정신 뿐 아니라 육체의 중요함을 설파했다. 육신이 병들면 그 정신이 온전할 수 있겠느냐 외쳤던 것이다. 동양은 본디 천지인을 하나로 인식했으니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서구도 자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고 동양보다 더 자연을 생각하는 언론과 단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글쎄올시다 이다. 자연의 파괴는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이 아닌, 기계의 힘을 이용하던 그 시점부터 자연의 파괴는 시작된 것이다.
이 책으로 니체는 정신만을 유독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구의 사상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플라톤 이후 서구는 정신세계의 정수라고 일컫는 이데아의 사고속에서 같혀 살아왔다. 상대적으로 물질 세계를 경시했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렇게 철학이 정신의 미학에 도취되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물질(자본)을 숭상하는 서구의 이율배반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서구의 기형적 철학에 염증을 느껴던 것일까. 니체는 그 결과 편협된 사고의 불균형을 이제는 바로잡아야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서구는 도대체 왜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만을 강조하고 주입시키냐고 반기를 들었다. 대.지.를 제 몸뚱이라로 기어다니며 인식하는 나의 친구 '뱀'을 홀대하지 말라 외쳤다. 짜라투스트라는 독수리의 눈과 뱀의 몸뚱이리가 조화를 잘 이루어야한다고 일갈했던 것이다. 니체에게 대지는 치유의 대지였다. 당시 서구는 짜라투스트라의 이러한 직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깊은 감명을 받은이가 있었으니, 바로 Richard Strauss였다.
자본주의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이념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양산해온 주범이며, 불평등의 최고 기여자라는 점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마시는 물과 공기를 오염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더 소중하고 귀중히 여기는 이념' 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돈을 가장 숭상하는 이념'이다. 국가와 기업은 대중 앞에서는 사회로의 환원과 재분배 그리고 평등을 강조하지만 뒤로는 귀중한 돈을 쫒는다. 신을 숭상하는 종교는 사실은 역시 돈을 숭배한다. 물론 종교가 죄다 그렇다는 말 아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인 각 국가와 각 종교의 작동 원리는 알고보면 자본주의, 즉 돈이다.
생명은 물과 공기에서 온다고 했다. 과학자 ‘밀러’와 그 동료 ‘유리’라는 두 냥반은 물, 메테인, 암모니아, 수소를 사용한 실험을 했다. 일주일 간의 실험 끝에 그들은 탄소가 유기물로 합성된 사실을 알아냈다.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이 합성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중 미소량의 탄소가 아미노산의 한 형태라는 것이었다. 아미노산이 무엇이던가. 살아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합성하는 생명의 중요 물질이 아니던가. 우리 신체내의 DNA는 아미노산을 특정한 위치에 배치시켜 단백질을 만들어내게 한다. 그렇다면 아미노산의 결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자명한 일이 아니던가.
원시 대기에서 그런 아미노산의 발생을 매개했던 것은 바로 물과 공기가 핵심이었다. 이제 생명의 근원인 그 물과 공기가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더 이상 마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공기도 곧 우리를 질식 시키려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물을 병에 담아 팔고 사기를 20여년 이상 해왔다. 기업은 그렇게 물로 돈을 벌고 있다. 우리가 마실 수 없는 오염수가 더 증가하고 지독해질수록 기업은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일 것이다. 사실 물이 기름 값과 다름이 없는 가격이 아니던가. 이대로라면 앞으로 더 비싸질 것이 뻔하다.
우리의 처지가 이러하니 압축 공기주머니를 구매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가정집에 공기 정화기가 대세인 요즘이다. 앞으로는 개인 휴대용 공기 정화기 가지고 다니거나 공기 주머니를 차고 다닐밖에... 과연 양질의 공기를 얼마에 팔고 사게되는 것일까... 양질의 물과 공기가 더욱 희박해지고 고갈 될수록 그 값은 점점 더 비싸질 것이다. 물과 공기를 살 돈이 모자란 사람들은 중금속이 가득한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그렇게 죽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돈이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은하철도 999를 타지만 그 고층 도시의 아래, 지독하게 오염된 곳에서 거리의 서민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 은하철도 999말이다.
얼마 전의 언론 기사에 의하면 인도 인구의 절반이 질 나쁜 공기의 덕분에 3년의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이는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세상이 이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단 말인가....혹자는 말할 수 있다. 굶어 죽으나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고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라고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염수를 마시고 사는 물고기들의 몸이 변형되어 찌그러진 상태로 태어나고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독면을 착용하거나 압축 공기주머니를 몸에 지녀야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살아야하는 것인가? 나아가,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생산하게 될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