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철학 연구
이현수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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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본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태극도(太極圖)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태극도(太極圖)는 중국 송나라의 주돈희라는 인물이 우주의 근본과 만물이 발전하는 이치를 도해(圖解)로 밝힌 것으로, 태극에서 시작한 우주의 음(陰)과 양(陽),  그리고 오행(五行)을 만물의 원리로 삼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우주관은 바로 그 태극도에서 출발하게 되었고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인간성 및 수신의 이치를 다룬 인문학으로 발전 전개된다. 성리학자들은 이론(理論)을 기론(氣論)의 상위 개념으로 인식∙확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성리학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혹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논쟁을 거듭해왔지만(전자의 대표 주자는 퇴계 이황이고 후자의 대표 주자는 율곡 이이이다) 이론(理論)이 중심론(中心論)으로 자리를 잡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거의 기론(氣論)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일련의 이기론을 둘러싼 논쟁의 과정은 조선의 붕당체제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동인(東人)들은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서인(西人)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율곡 이이의 문하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만물의 본질을 氣로 파악했던 화담 서경덕과 같은 인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성리학의 이기론이라는 쟁점이 정치, 즉 집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사상(철학)은 권력과 분리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정치적 사안이었던 것이다.


하여 흥미로운 것은 이기론이 흔히 말하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매우 원초적인 싸움과 다를 바가 없는 형태를 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론(理論)은 승자가 되었고 기론(氣論)은 패자가 된 셈이다. 결국 이론(理論)은 밝은 양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반면, 기론(氣論)은 어두운 음지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는 실정이다. 만물의 시작을 理로 파악하고 개념을 정립한 성리학의 승리는 상대적으로 못지않게 중요한 氣論을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학문에서 멀어지게 한 셈이다.


이 책의 제목이 ‘기철학 연구’라는 표제를 가지고는 있지만 이기론이 그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지 매우 명료하게 정리해둔 출간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철학 연구의 개념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 중국의 학자들의 이기론에 대한 주장과 상대론, 조선의 학자들의 주장과 그 상대론을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고 그러므로 이론과 기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갈라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학문 혹은 사상과 정치 혹은 권력과의 역학관계


 이 책은 결국 성리학의 본질에서 기론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성리학을 이기론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理論 중심의 학문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때, 태극도 라고 하는 같은 뿌리를 둔 학문이 서로 분리되고 상∙하위(上∙下位) 개념을 가지게 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뿌리를 둔 원류의 사유가 시대가 흐르고 변화하면서 주체와 객체로 분류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나마 氣論을 아예 성리학에서 도려내지 못한 것은 氣가 理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理를 상위 개념으로 사유하기를 바라는 성리학자들의 주장에서 실제로 氣 없는 理는 존재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론을 철저히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자신들이 가진 사상의 우위 선점은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인 토대가 되어준다. 따라서 자신들의 학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유자는 제거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언론의 통제와도 그 맥을 함께한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의 언론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백성 전용 언론 창구, 신문고와 격쟁


 조선은 왕이 통치하던 국가였다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전제 군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반정이라는 쿠데타의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 조선이기도 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참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회였다. 어쨌든 불구하고 혹자의 역사가들은 조선이 백성들과 매우 원활한 소통을 한 것으로 가르친다. 심지어 오늘 날의 언론 제도와 비교 손색이 없을 정도 였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실제로 있다. 과연 그랬을까...

 백성과 소통하는 창구로서 신문고와 격쟁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신문고는 중국 송나라의 ‘등문고’를 모방한 것으로 백성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기 위한 제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일반 백성들이 사용한 사례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비록 대궐 밖 문루에 달아 놓았다고는 하나 주관 부서는 다름아닌 의금부였던 것이다. 의금부는 바로 왕의 직속 기관이다. 과연 그 어떤 백성이 의금부의 힘을 넘어 북을 울릴 수 있었겠는가...

 

 신문고를 울리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절차를 필요로 했다. 예를 들어 서울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지역 담당 관청을 거쳐 사헌부에 먼저 호소해야 했다. 한마디로 사헌부의 허가를 받고 나서도 다시 의금부 담당 관리의 조사를 받은 후 신문고를 울려야 하는 것이다. 

 

 지방의 백성들은 더 어려웠다. 지방 거주지의 원에 가서 억울함의 절차를 밟았다는 확인서를 먼저 받아야한다. 다시 도의 관찰사에게 같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리고 한양의 사헌부를 거쳐 다시 의금부로...과연 그 어떤 백성이 이와 같은 절차를 밟아 신문고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글을 못 배운 백성들이 과연 서류하나 제대로 작성 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북을 울린 대부분은 서울의 관리들로 토지나 노비의 소유권 다툼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알고 보면 지방 관리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신문고였다. 하물며 힘없는 백성들임에랴.... 사실상 조선의 신문고는 백성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전시행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신문고는 폼이나 다름이 없었던 장신구였던 것이다.


신문고가 폐지되고 격쟁이라는 것이 신설되었다. 격쟁은 왕이 궐 밖으로 외출을 하는 찬스를 이용해 징이나 꽹과리로 큰 소리가 나도록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였다. 왕이 매일 궐 밖로 나가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정말 이것을 진정한 소통의 창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억울하다고 모두 격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격쟁의 내용에도 제약이 따랐다. 그 효과가 미미했다는 점에서 신문고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위해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형식에 불과했던 제도로서 그 실용적인 가치를 찾아보기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고등부의 교과서에서 조차도 신문고와 격쟁을 일컬어 ‘일반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라고 고백하고 있을까...




식자들과의 소통 창구, 상소


다른 소통의 창구로 조선은 상소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일반 백성이 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 관직에 있는 관료나 혹은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 전용으로서 그 형식이 구별되는 제도이다. 상소는 그 내용이 왕에게 바로 전달되는 방식이다. 하여 그 절차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각 고을의 수령이 상소를 받고, 해당 도(道)의 감사에 이를 올린다. 감사는 접수한 상소를 다시 사헌부에 올린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에 불리한 내용들은 흔히 걸러지기 일쑤였다. 실질적인 상소들은 권력자들이 배후에서 조종한 하급 관리나 선비들에 의해 작성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알려진 바대로 고급 관리들의 직접적인 상소의 비율은 크게 낮았다. 간혹 ‘도부상소’라 하여 도끼를 메고 상소를 올린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소(訴)가 못마땅하면 그 도끼로 자신의 목을 쳐 달라는 결의에 찬 상소였다. 그러나 실제로 상소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상의 여론, 삼사

 

흔히 조선의 여론이라 하면 삼사의 중론을 말한다.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라는 삼사의 의견인 것이다. 삼사는 각각 부정 부패등 부정한 관료들을 탄핵하는 기능과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공론을 중시한다는 것이지만 이는 실제로 백성을 위한 여론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집권층의 공론일 뿐이었다. 백성들을 위한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100 여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준다. 여론은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 바로 백성으로부터 나와야 진정한 여론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여론은 사실은 권력의 내부에서 돌고 돌았던 것이다.

 

 

조선 학문의 폐쇠성


이러한 조선의 언론 시스템으로 본다면 조선의 언론은 매우 폐쇄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학문과 사상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선비 혹은 관료 출신들의 자제가 아니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공직자의 가문이 아니면 관리로 나가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공부를 할 수 있는 일반 백성이라도 먹고 사는 일이 더 시급했다. 그러므로 성리학의 논쟁도 그들만의 것이었다. 권력자들의 학문과 사상이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놔야 하는 위험천만한 짖 이었다. 


이는 성리학의 理論이 그리 쉽게 우위를 선점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결국 理는 氣를 누르고 기득권을 지켜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氣를 중시했던 학자들은 대부분 실학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실학파이며 경세치용 학파라 부르는 여유당 정약용의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담 서경덕과 율곡 이이를 만날 수 있고 잠곡 김육 그리고 하곡 정제두를 만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부국을 꿈꾸던 실학파들은 백성의 경제활동을 중시했다. 백성의 경제력은 곧 국력이라는 인식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실학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조선의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조선이 마지막 회생의 찬스를 놓친 것은 바로 정조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이 현대 학계에 끼친 영향


학문과 사상의 상대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정조 사후, 조선의 학문과 사상은 유일하게 성리학의 것이 되어버렸다. 공자와 주희는 조선 성리학의 교주나 다름이 없었다. 조선 땅에서 성리학이 교조주의적으로 흐른 탓이다. 마치 이단을 배척하듯이 조선의 유학자들은 여타의 이론(異論)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백성들의 삶에 훨씬 더 접근해있던 양명학은 아예 뿌리조차 내리지 못했다. 그 결과 양명학에 대한 현대의 연구가 시원치 못한 상태이다. 신유사옥은 이러한 탄압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정조는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이었으나 정조 사후 노론은 정순왕후를 앞세워 신서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천주교의 탄압이 곧 신서파를 제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이러한 사상적 환경에서 다양한 학문적 논의는 불가했다. 국지적으로 존재했던 학문적 논쟁은 그마저도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氣論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득권을 버리며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시대가 바뀐 현대에도 조선의 폐쇄적인 학문적 환경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의 견해나 주장과 다른 것들은 무차별 공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환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학계의 환경은 국민의 사유와도 밀접하게 관계한다. 식자들이 출간하는 도서는 곧 국민의 독서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의 발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지금껏 理와 분리될 수 없다는 氣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된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비록 연구가 있다 하더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氣에 대한 올바른 개념도 아직 자리 잡지 못했을까..



사상의 독점이 부르는 비극


氣에 대한 개념의 부재와 인식의 부족은 물리학적 연구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氣論은 서양의 물리학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이는 물질과 현상에 대한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물리학 연구에서 동양을 압도한 서구는 과학의 힘을 사용해 세계에 커다란 수난을 안겨주었다. 아메리카를 비롯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강력함 힘 앞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상, 즉 생각의 방법론에서의 차이 때문이다. 조선과는 달리 서구는 다양한 학문적 사고를 해왔지만 사상적 배경은 매우 편협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사유를 해왔던 것이다. 결과는 자신에 대한 이익만을 추구함과 동시에 타자에게는 초유의 비극을 불러왔다. 비록 학문의 다양성을 확보한 서구였지만 사상이 한 곳으로 쏠리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제각기 사상의 독점적 현상은 서로 동상이몽을 꿈꾸도록 했다. 이렇듯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심각한 문제점과 그 폐해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일단 타자를 제압하려는 강제력을 행사하게되고 그 우위를 선점하고 나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는 주로 부정적인 것이 권력의 법칙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왔다.

 

어찌 옳은 것이 하나 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학문과 사상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치가 어디 학문과 사상 뿐 이겠는가.. 균형 있는 발전의 중요성은 또한 지역 발전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빈과 부의 차이를 좁혀내는 것도 바람직한 사회상일 것이다. 결국 학문과 사상의 균형 있는 연구와 발전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 모든 영역에 깊이 관계하고 있기에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학문과 사상의 올바른 개념을 다수가 공유하고 인식하는 힘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주체인 우리가 인식해야 할 과제는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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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문과 사상의 상대성,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시에 타자에게는 초유의 비극을 불러오는,

저는 이 두 문장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win-win이라는 개념, 저는 참 좋아요.
게임 중에, 가위바위보를 내서 같이 주먹을 내면 별점 네개, 한 사람만 보를 내면 별점 여덟개, 두사람 모두 보를 내면 별점 0개인 게임있잖아요. 언뜻 생각해서는 둘 다 주먹을 낼거 같은데 잘 그러지 못 하는, 상대에 대한 신뢰 게임이요... 저는 그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신문고나 격쟁의 의도는 좋았으나, 역시나 행하는 제도 상에는 문제가 있었군요.
빛좋은 개살구 같은 느낌이네요. 음... 요즘 검찰을 보는거 같기도 하구요. ^^

구구절절 와닿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7-05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고양이님의 글에 답을 드리지 않았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게되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요 ㅠ.ㅠ

요즘 독서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게되었습니다.
다양한 조건들 덕분이지요.
저의 화두는 '독서가 인성에 과연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입니다.
중요한 것은 독서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독서를 이유있는 깨달음의 수단으로 삼는 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과연 그럴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들구요..
단지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만 본다면 그럴 수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여전히 저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