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에 대한 사적인 입장...


학문 혹은 사상은 결코 시대의 상황을 배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모든 사고는 시대가 요구하는 필요성에 부응하여 혹은 시대와의 갈등을 원인으로하여 발생하고 또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경제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경제를 배제시킨 역사인식은 분명히 절름발이 역사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상, 경제, 역사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 개인적인 입장이다. 이것이 좀 무리한 견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독자의 한 사람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는 그러하다...


최근에는 부쩍 동양의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비단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단순하게 동양의 고전을 공부를 하던 입장에서 일탈하여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것이 몇 해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과거 조선의 동양 고전 학습 방법은 텍스트를 줄줄이 암기하는 식이고 주희의 집주까지도 달달 외워 그것을 타자에게 증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마디로 내용을 암기하다가 침 한 번 꿀꺽 삼키면 훈장님의 회초리가 종아리로 날아오는 방식인 것이다. 한 번 침을 꿀꺽 삼킨다는 것은 학문을 게을리했다는 명징한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논술시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논술마저도 고전에서 인용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누가 고전에 등장하는 고례를 더 많이 아느냐의 문제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례를 하나라도 더 많이 아는 것이 상대방의 견해를 제압하는 도구라는 것은 지극히 권위의식을 근거로 한다는 뜻이다. 고례는 그것을 알고 있는 자에게 그만한 권위를 부여했던 것이고 현대의 학계에서도 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베이컨이 언급한 '극장의 우상'의 우를 범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남송의 탄생과 성리학

 

사대부는 중국 고대 주나라 때 천자나 제후에게 벼슬하던 사(士)와 대부(大夫)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대에서는 문관의 관직의 위치로 정착되었다. 사대부들이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것은 중국의 송나라 이후, 특히 남송 이후였다.


이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세계관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당시 남송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이기론을 통해 하나의 동일적인 원리로 파악하는 철학적 유학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중화사상의 중세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고대 유학과 비교하여 성리학을 중세 유학이라고 하는데, 성리학의 확립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하나는 송나라에서 발전했던 불교 선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송이 처한 정치적 현실이다. 고대유학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이론이었다면, 성리학은 중세 유학으로서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중국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이론인 것이다.


당시 송나라는 거란족인 요나라의 침입을 받았고, 단연의 맹약을 맺고 국체를 보존해야만 했다. 즉, 송과 요가 형제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명주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조공한다는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민족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은 송나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는 일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지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하여 송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끌어 들여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송나라가 금나라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킨다는 전략인 것이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가 매우 약한 나라라는 것을 간파하고 송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송나라의 상황이 전보다 더욱 나쁜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금나라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송나라는 중국의 중원 대륙을 금나라에게 내어주고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북송의 멸망을 의미하며 남송의 탄생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더더욱 나쁜 상황은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을 비롯 여러 왕족들이 금나라로 잡혀간 것이다. 금나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도강하여 송을 멸망시킬 것을 두려워한 송은 금나라에 막대한 조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임금의 나라로 모시는 사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리학은 바로 송나라의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는 정치적 시대적 상황에서 출현하게 되는 중국의 이데올로기 인 것이다.


성리학이 정통론과 명분론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바로 그러했다. 송나라가 중원 대륙을 빼앗기고 금나라에 사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는 있지만 정통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 체계가 바로 성리학인 것이며 주희가 정통과 명분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 말의 정치적 도구, 성리학

 

사상과 철학이 국가의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매우 긴요한 도구임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 항해 시대라 일컫는 유럽의 식민지 정책은 물론 세계 대전을 일으키며 대륙을 피로 얼룩지게 했던 독일이 그러했고, 동아시아를 자신들의 텃밭으로 만들었던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사상과 철학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대중들을 선동하여 이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도구임이 여실히 드러내는 역사적 증거물들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하여 때로 ‘권력의 시종, 철학’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되는 이유이다. 정작 사상가들 스스로야 이 표현을 불쾌하게 여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그 누구라도 부인 할 수 없는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던가...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용도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이 어쩌면 철학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진리를 자유케하라’는 모토가 허망한 메아리로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감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정녕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회는 아닐런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비철학적이며 비이성적인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성을 가진 지극히 비이성적 우리들의 자화상.... 도구로서의 성격을 지닌 철학적 진실을 알면서도 그 와는 정반대의, 무균실 안의 순수한 철학을 기대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스톡홀름 증후군을 철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자신들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패한 불교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현실에 대적할 상대적 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의 명분론을 가장 적합한 도구로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견해일 것이다. 성리학은 결국 현실을 지배하는 금나라가 정통이 아니라 송나라이듯이, 고려는 권문세족이 아니라 신흥 사대부가 정통이라는 이론인 것이다.     


성리학은 원나라를 통해 고려로 들어온다. 충선왕이 연경에 세웠던 만권당이 그 역할을 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이제현은 만권당 출신이다.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채택한 또 다른 이유는 사회, 정치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남송이 위치한 양자강 유역은 풍부한 수량과 강우량을 자랑하는 지역으로 수전(水田)농업이 가능했다. 수전 농업은 지주와 전호를 두 축으로 하는 중세의 생산관계 체제를 가능케 했다. 남송의 지주는 당나라나 오대(五代)의 형세호(대지주) 와는 다른 중소지주였다. 남송의 지배적 생산관계는 중소지주와 전호였던 것이다.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들 역시 중소지주들로 경제적 기반은 남송의 지주들과 매우 흡사한 형태를 띄었다.


성리학은 바로 중소지주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한 사상 체계였던 것이다. 지주의 자리에서 우주와 사회 그리고 인간을 해석한 철학이 성리학인 것이다. 성리학은 또한 관료들의 학문이며 사상이었다. 성리학의 다양한 요소들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의 처지와 방향점에서 함께 만나고 있었다. 이것이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정치적인 배경으로 삼은 이유이다.


 

철저히 소외되었던 고려의 백성에게 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신돈은 공민왕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다. 신돈의 개혁정치가 실패하자 고려의 백성들은 다시 사대부들에게 큰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지지가 아니더라도 신흥 사대부들은 사실 권문세족과 힘겨루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권문세족들의 대농장이 신흥 사대부들의 토지를 침탈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문세족의 힘이 지속되는 한 신흥 사대부들은 중소규모인 자신들의 토지조차 지킬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결국 신흥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권문세족과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흥 사대부들이 불교를 비판한 이유는 사상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불교가 바로 고려 권문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개경에만 70여 개가 있었다는 거대한 사찰들은 순수한 신앙의 산물이 아니었다. 2,800 여 칸에 달했던 거대 사찰의 이름이 흥왕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찰 자체가 지배력이었던 것이다. 온건 개혁파 중 하나인 이색이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공민왕에게 올렸던 이유가 그것이다. 급진 개혁파는 불교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이를 방증하는 예인 것이다. 개국 이후 한글을 반포하면서 세종이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등의 불교서적을 출간했던 것은 불교라기 보다는 고려의 권문세족이야말로 극복의 진정한 타겟이었음을 또한 반증해준다. 


신흥 사대부들은 불교를 부정해야만 성리학을 내세울 수가 있었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확보해야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정치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토지였다. 역성 혁명파는 토지를 완벽하게 개혁하자고 주장했고, 온건 개혁파는 점진적으로 토지를 개혁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 후 역성 혁명파가 공양왕 2년 모든 토지 문서를 개경의 한복판에서 불질러 없앴는데 ‘여러 날 탔다(고려사)’라고 한 것은 권문세족들의 토지 장악실태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이다.

 

 

성리학이 조선과 남송의 주희에게 가지는 의미

 

이기이원론은 이(理)를 기(氣)보다 우선하는, 즉 理가 氣를 지배해야한다는 논리이다. 퇴계 이황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기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황은 氣가 理를 압도하는 정치적 상황을 올바른 현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황은 훈구파를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氣)집단으로 파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패한 고려의 권문세족들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역성혁명을 이끌었던 훈구세력들이 정권을 장악 한 후 권문세족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정치세력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국은 그 누가 보아도 올바른 정치 세력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앞세운 이익집단에의 의한 一國의 내정 혼란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부정과 부패의 정도가 심각한 것이 조선이었다.


'기철학 연구'는 기철학만을 논한 저술이 결코 아니다. 이기론의 근원을 철저하게 밝혀주었고 동시에 기철학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매우 유익한 저술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기철학을 언급한 책이라는 오해를 살만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론이 없다면 기론도 없고 기론이 없다면 이론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해주고 어떻게 이론이 기론을 제압하고 현대에 이르렀는지 궁금해하는 분께는 참 좋은 책이다. 행여 이기론의 갑을 박론에 대한 매우 상세한 이해를 원하는 분이라면 적극 추천해드리고 싶다

 

결과적으로 이황에게 훈구세력은 七情이며 氣의 세력이었고, 士林은 四端이며 理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理와 氣는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며 理는 성리학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세계가 되고 氣는 극복의 대상인 현실 세계로 변모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황에게 세상은 理가 氣를 지배하는 형태로 바르게 교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즉, 사단이 칠정을 지배하고 사림이 훈구세력을 타파하는 주리론을 체계화 시킨 것이다. 조선을 장차 지배할 理氣二元論의 배경은 위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희가 자신의 입장과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피력하는 도구로서 성리학에 매진 한 것은 어쩌면 시대적 상황이 주는 필연적 동기가 있었음을 독자가 주지하는 것은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희는 성리학을 순수한 학문의 수단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키려는, 어쩌면 학문을 통해 스스로 위로하려는 목적으로서의 방법론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관찰 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주희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대륙을 지배하면서 남송은 신하가 되어 공물을 바쳐야 하는 시대적 상황과 직면해있었다. 남송이 금나라에 신사봉공해야 했던 당대의 상황에서 주희는 사단철정론을 정립하게 된다. 한(漢)민족이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요 四端인 반면, 漢족이 여진족의 지배를 받는 것은 칠정의 상황이라는 시각이다. 주희의 입장에서 이(理)가 되는 도심(道心)은 한족의 것인 반면 기(氣)가 되는 인심(人心)은 여진족이었다. 그러므로 理인 한족이 氣인 여진족을 지배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즉, 理가 氣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희가 당면한 현실은 자신의 생각과는 정 반대였다. 그리하여 주희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희는 자신이 처한 참담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理氣二元論과 人心道心論이라는 性理學을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도심과 인심을 분리하는 작업, 즉 이와 기를 분리하고 사단과 칠정을 분리하는 연구학문이 바로 주희의 숙원 사업인 성리학 연구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상이 가지는 일종의 본색을 목격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철학은 이미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 지 너무나 오래되어 우리는 그에 무감각해져버린 것은 아닐런지... 성리학 하면 언뜻 떠오르는 사유의 본질, 인과 예 그리고 수신, 위민이라는 용어들과는 애초에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어쩌면 철학의 본질이야 말로 권력의 시종이라는 말을 놀랍게도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편 조선의 이황은 남송의 주희와 시공을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금나라가 한족을 지배하는 상황이나, 훈구파가 조선을 지배하는 상황이 바로 그랬다. 이황은 주희의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조선의 대유였다. 그러니 주희의 성리학을 이황이 고스란히 받아들여 더욱 깊이 연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기호발설은 이황이 성리학을 그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증명해주는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 편, 율곡 이이는 이황의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완성시켜 조선 철학사의 큰 획을 긋는다. 이이는 이황의 학문을 한층 더 발전시켜 理氣一元論이라는 독창적인 조성 철학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견해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理가 氣를 지배해야 한다는 점에 두 사람의 입장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황과는 전혀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가지게 된다. 두 사람의 시간적 차이는 겨우 한 세대이지만 그들이 처한 정치적 시대적 입장은 완전히 달라져있었던 것이다.


 

이이의 상황은 이미 사림이 훈구의 세력을 타파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시기였다. 즉 이황은 야당이었고 이이는 집권당인 여당에 속해있다는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황은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이이는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개혁을 중요시하게 되는 전혀 다른 정치적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에서 율곡 이이는 이황의 理氣二元論의 주리론을 극복해야 했고 거듭되는 성리학적 연구의 성과로 율곡은 비로소 理氣一元論의 주기론을 창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동인들의 시조격인 이황의 후학들로 하여금 율곡에 대한 불만을 일으키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동인들은 스승인 이황의 주리론을 이이가 주기론으로 발전시켜 조선의 성리학을 제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학문적 라이벌로 인식하게된 것이다. 학문적으로 이원론을 온전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율곡은 뿌리는 이황과 같은 곳에서 출발했고 주희나 이황의 이원론의 궁극을 부정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는 엄청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은 힘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는 심리적 현실적 압박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내 놓는 것은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사실상 율곡 이이는 당파에 치우친 인물이 아니었다. 동인들의 스승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발동시켜 성토하다보니 이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서인으로 둔갑해버린 것이었다. 동인의 적은 곧 서인이라는 공식이 이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율곡은 동서인으로 붕당을 이루어 다투고 쌈박질 할 때가 아니라고 보았다. 율곡 이이는 그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위해 정부가 그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할 때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결과 율곡 이이는 백성들에 대한 복지 정책이 최우선 과제라고 여겼다. 신흥 사대부들이 조선을 건국한 후로 백성들의 고단함은 그리 변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민정책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이는 대미수공법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흔히 말하는 대동법이 그것이다.


이런 율곡 이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김장생과 송시열은 율곡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판타지 소설을 율곡행장에 써 넣었다. 나아가 송시열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모든 주장들을 사문난적으로 치부하여 심지어는 주자와 다른 사유를 했다는 이유로 윤휴를 사사했다. 물론 자신들과는 달리 ‘진짜 북벌’을 주장했다는 혐의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효종대의 송시열은 가짜 북벌을 주장하며 효종을 기만하고 심지어 효종의 북벌 의지를 꺾으려 무던히 애를 썼던 인물이다. 노론에게 북벌은 정치적 전시물에 불과한 쇼였다.


양명학을 제거하다... 전형적 일당 독재 조선...

 

성리학으로 학문을 출발했으나 성리학의 문제점을 깨닫고 양명학에 전념하며 널리 전파하려 일생동안 애쓴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제두이다. 정제두는 박세채와 윤증등의 성리학자들을 스승으로 사사한 인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양명학은 조선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워낙 드세고 고압적인 성리학이 양명학의 싹을 잘라버린 탓이다. 양명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청과의 주화를 주장하며 인조대의 모든 허물과 치욕을 혼자서 짊어지고 갔던 역적 주화파 최명길을 만날 수 있다.


 대전의 송씨들은 자격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고 논술 답안지를 제출했던 송시열을 장원으로 뽑아 준이가 바로 최명길이라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주화파의 핵심인물이라는 이유로 최명길의 후손들을 아주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법에 의거했더라면 송시열의 답안지는 그 형식을 갖추지 않아 심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어야 했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조선을 구한 이가 바로 최명길이었건만 당시 최명길의 고육책은 제쳐두고 주화를 주장했다는 점만을 부각시켜 역적으로 몰아갔다...물론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만 과연 척화가 주화를 과연 비난 할 수 있었던 상황인지, 그리고 과연 착화는 시대적 상황에서 바른 것이었는지..행여 자신들의 명분을 백성들과 국가의 안위보다 더 앞세운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이는 학문적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사료들을 검토해보면 임진란을 겪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잘 대응했던 서애 유성룡이라는 인물과 마주침을 알 수가 있다. 서애집과 징비록은 이를 잘 증명해주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미 조선에 벌써 양명학이 스며들었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로 조선의 양명학은 17세기 조선의 식자층에서는 성리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밖에는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조선에서의 양명학은 이처럼 그 뿌리마저 불분명한 학문인 것이다.

 

학자 정제두가 양명학에 관심을 보인 것은 성리학의 배타성과 폐쇄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다. 어디 학자 정제두뿐이었을 까면 감히 양명학의 이치를 주장하며 고개를 쳐들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양명학을 주장하는 순간 자신의 목숨은 파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제두는 성리학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주지하다시피 성리학에서 가르치는 사상과 조선이 당명하고 있는 현실과의 괴리감은 가히 이해 불가능한 수준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을 가진 학자라면 누구나 이를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문제는 그런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학문을 겸비한 인재들은 대부분 제도권 안에 있었으며 세력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 이라는 점이었다. 요즘 말로 사회를 비판하는 발언은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재귀준거의 딜레마에 걸려들고 마는 행위였던 것이다. 스스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걷어 차내는 바보가 되어야 했다는 말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정제두는 과감하게 그 문제점을 들춰낸 인물인 것이다. 진정한 사상가라고 추앙받아도 모자란 인물이 정제두였지만 그의 순수성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정제두는 자신의 스승인 윤증에게 ‘왕양명의 학설은 정주와 다르지만 진실로 정주와 일치한다'고 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제자의 이 뜻을 물론 윤증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양명학을 허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글자는 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 학문이었는지는 성리학이 왕양명의 지행합일을 그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정제두는 그렇게 양명학을 연구하면서 탈진하고 에너지를 소진하여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다. 과연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아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노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어찌 정제두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특정 사상은 특정 시대를 장악해 왔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들은 최근 쏟아지는 동양 사상의의 철학서들을 답하기가 수월한 편이다. 그러나 그 학문의 뿌리는 정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조선에 이르러서는 남송의 처지를 학문적으로 돌파하려 했던 주희의 상황을 고스란히 답습한 학문이었다. 어쩌면 주희보다 훨씬 더 지독한 정치적 도구로 성리학을 앞세운 것이 조선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희를 공자(孔子)를 압도하는 신의 경지로까지 높이게 된다. 무결점의 인간...주희의 생각과 한 치라도 어긋나면 용서 받을 수 없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죽음으로 엄벌하여 다스리던 조선....학문의 자유로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었고, 사유의 자유를 완벽하게 차단했던 조선은 그야말로 언론 통폐합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전형적인 공산당의 전신을 보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가 아니던가....


혹자들은 조선 붕당의 출현을 현재의 양당제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일당 독제보다 훨씬 진일보한 정부의 형태이며 어쩌면 영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훨씬 앞서는 정치적 사건이라고 떠들어 대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의 학문을 보라...과연 조선이 민주주의의 고전적 형태로 볼 수 있는 단서를 그 어느 하나라도 가지고 있었는지....

 

 

집기양단 용기중어독, 바른 독서의 목적

 

 이렇게 동양의 고전과 그에 바탕을 둔 사상인 성리학은 남송에서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일련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조선에서는 시대를 장악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더욱 강력하게 구축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조선에서는 특히나 그 목적을 이루는데 매우 성공을 거든 학문이다.

 

  그러므로 과거 성리학이 해당 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인식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서 독서에 임한다면 보다 더 유익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독서는 자신의 정신 능력을 한층 더 고양시키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매유 유익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아고기 집기양단',  이때 '고'라는 말은 두드린다는 뜻 이라고 한다. 즉, '나는 모두 두드려 보아서 양쪽을 잘 살핀다'는 뜻이다. 이 '집기 양단'이 바로 중용의 덕목인 것이다. '집기양단 용기중어민' 이라는 말로 이어지는 중용의 덕목은 '양쪽을 모두 잘 살피어 이를 백성들에게 적용시키셨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독서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양 사상을 공부함에 있어 '집기양단'하고 '용기중어독서'한다면 독서를 통해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론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서는 분명 자기 발전의 방법임에 틀림이 없지만 독서를 많이 했다고해서 자신의 아집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토록 깊은 학문을 연구하고 그 도달 수준이 드높던 조선의 선비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그러하다. 분명 발전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고립 혹은 폐쇄성 현상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이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조선의 성리학이 보여주는 결과물 처럼 자신을 무장하고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는 목적이라면 제 아무리 많은 독서를 한다한 들 그 유용함은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날카로운 검의 날보다 강력한 학문을 익혀 상대방에게 휘두르는 것은 학문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 목적이 바르게 설정되어 있지 않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다수가 될 수 있다. 분명 학문은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써야 할 것이지만 그 목적이 불순하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타자들에게 떠넘겨 지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자신의 목적과 입장을 올바르게 투영시키고 바른 지향점을 가진 독서야말로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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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6-19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반-합,
어느 것이 올바르다 하기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한편으로 다른 한편으로 그러다 합쳐지고
다시 편향으로 흘러 다른 편향으로, 저는 예전에 정답이 있기를 바랬으나 점점 흐르는 것이 정답일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반성과 성찰과 사유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때보다 상당히 성가시고 힘든 일이지만, 그렇기에 변화할 기회가 주어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方, 제 페이퍼에 다신 의미를 알겠습니다.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독서가 아닌 풀 한포기에서도 세상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방향성을 모르기에
제가 내내 책에서 무엇인가 찾으려는 것은 아닌지, 말씀처럼 철학이 사회와 역사의 시종이 되어버리는게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페이퍼를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정말 덥네요. 봄은 어디간걸까요?

차트랑 2012-06-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르는 것이 정답이라...이 말씀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이야기인데요^^
흐르는 것이 순리일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정말...

봄은 이제 여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나 봅니다^^
계절이 흐르듯 모든 것도 따라 흘러가나봐요

그런데 제가 답글을 달았다고 생각했는데...글쎄...
답글을 달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된 거있죠?
요즘 제가...정신이 없는 걸요^^

마녀고양이님의 생각처럼
작은 것에서도 진지한 자세로 임한다면
세상의 이치는 그 안에 담겨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는 요즘입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2012-06-21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1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1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