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페이퍼로 작성한 적이 있는 아래의 연주를 오늘도 이렇게 페이퍼로 쓰는 것은 그리모와 예르비에게서 느끼는 '경지에 다다름' 때문이다. 지금 이시간에도 지구의 그 어디에선가는 연주가 행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DVD 혹은 Blu-Ray등의 포맷으로 출시되고 있는 연주들을 헤아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내게 수도(修道)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연주는 흔하지 않다. 때로 몰아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연주들은 흔히 찾아 볼 수 있지만 이는 수도의 경지와는 또 다른 측면의 것이다.
동양에는 수도(修道)라는 말과 구도(求道)라는 말이 있다. 구도란 佛法의 용어로 道를 '탐구한다'거나 '구한다'는 말이므로 수도와는 구별되는 용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라는 말을 사용할까 한다.
동양의 수도(修道)라는 용어와 상응하는 서양의 용어를 찾기란 용이한 것이 아닌 듯 하다. 물론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겠지만 마땅한 하나의 용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도'라는 말은 명사로 인식될 수 있는 용어이지만 '도를 닦는다'는 의미로 보아 결코 명사라고만 주장 할 수도 없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중에는 명사이면서도 명사가 아닌 것들이 흔하다. '자연'이라는 말도 명사이지만 명사가 아니기도 하다. 그 뜻을 풀어보면 '스스로 그러하다'이기 때문이다.
서양에는 수련(training)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그 능력을 고양시켜 끌어 올린다'는 말 쯤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Training을 다른 표현으로는 풀어본다면 '단련, 훈련' 정도가 될 것이다. 피아노를 잘 치기위해서는 그러한 수련, 단련, 훈련 또는 연습(exercise)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반복적인 연습은 어느 한 분야의 경지로 끌어 올리는데 필수적인 과정일 수 밖에 없다. 수많은 형태의 운동은 물론 학교 공부도 일종의 연습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수도(修道)라는 의미가 함의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수련, 단련의 의미와는 확연히 다른 용어이다. 물론 우리들에게 수신(修身)이라는 용어는 매우 익숙하다. 이 수신이라는 말도 수도라는 말에서 사용하는 수(修)를 쓴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렇다면 수(修)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아마도 이 修라는 말이 '닦는다'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修는 '닦는다, 잘 가다듬어 고친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불어 한가지 기어해두어야 할 것은 '닦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즉, 修는 운동의 능력이나 피아노를 치는 등과 같이 후천적인 능력을 강화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동양에서는 자연의 상태를 완벽한 상태로 보았다. 자연의 섭리라는 그 이치를 완벽한 것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완벽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더러워지고 어긋나고 치우친 것들 닦아내고 바로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바로 수(修)이다. 그러므로 修를 행하는 길이 곧 修道인 것이다.
하여 동양에서는 '수련'이란 '원래대로 되돌아감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수련 혹은 수도의 과정이란 '자기 정화'의 작업이므로 그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보태어 크게 확장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오면서 잘못된 것들을 닦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버리는 과정이 수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수도의 과정을 바르게 거치면 어떻게 될까...물론 나는 수도를 한 사람이 아니라 알 수는 없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아집,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경지라 한다. 한마디로 수련이란 무너지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닐까..생각한다. 내게 그런 깨달음의 경지를 느끼게하는 연주가 바로 그리모와 예르비의 이 연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보고 또 볼수밖에는...
그리모의 특별수업은 자서전적 출간물이지만 일대기를 다룬 책이 아니다. 예술인으로서 느끼는 그 어떤 '벽', 혹은 '한계'에 다다르면서 스스로 마주하는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그리모 역시 피아노를 치는 예술가로서 그들이 느끼는 딜레마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이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리모 역시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 수업이라 한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특별한 것이며 타자 개개인들에게 그 스스로의 것들은 모두 특별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것이어서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것이므로 특별하다고 전하는 그리모는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저마다 특별한 일상이 있고 고뇌가 있고, 즉 삶이 있다. 그 삶에서 그리모는 어떤 것을 깨닫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리모의 깨달음은 우리 모두에게도 아주 필요한 깨달음이라는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불어 과연 그리모가 저렇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제는 알 것도 같다...그리모의 연주는 修를 보여주는 연주라고 느끼는 이유이다...그 얼마나 정갈하고도 그야말로 성스러운 연주인가... 나는 그리모와 예르비의 연주에서 늘 성스러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