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그렇게 하여 송시열은 역사의 소인배로 낙인찍힌 최명길 덕분에 장원의 영예를 안고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묘∙병자호란의 치욕을 고스란히 지켜본 인물이다. 치욕의 현장을 낱낱이 목격한 그는 실의에 차 낙향을 결심하고 10수년간 학문에 몰두한다.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이어받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율곡 학문의 적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효종은 복수설치(復讐雪恥)로 가슴에 불을 지피고...
효종은 왕에 오르자 그 치욕을 씻고자하는 불타는 가슴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다. 이름 하여 복수설치(復讐雪恥)이다. 이는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회복하고 설욕한다는 뜻이다. 이 때 효종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정계로 불러낸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송시열은 출사하면서 효종에게 기축봉사를 올리는데 이 장문의 기축봉사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존대주의에 의거하여 청나라를 명나라와 구분, 복수설치를 역설한다. 효종은 북벌이라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함께 이룩해 갈 인물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송시열을 지목하고 그 기대에 부응해주기를 소망한다. 송시열 역시 그동안 치욕을 가슴 깊이 묻고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송시열은 이를 증명해주는 글씨를 하나 남긴다. 바로 치(恥)이다. 필체에는 글을 쓴 사람의 마음과 정신자세가 드러난다고 한다.
아래의 사진으로는 송시열이 쓴 치(恥)자가 어떻게 보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액자 속의 치자를 바로 앞에서 바라보면 당시 송시열이 어떤 심정으로 이 글을 썼는지 공감이 갈만도 하다. 그야말로 국가적으로 치욕스러웠던 당시의 심정이 그의 붓끝에서 올올이 느껴진다. 그만큼 치욕스러웠다는 뜻이되겠다. 글씨의 크기도 매우 큰데다가 좌에서 두툼한 머리로 시작하여 우로 보다 가늘게 뻗어 올린 솜씨는 묵직하지면 강렬하다. 또한 날카롭게 삐쳐 올린 두 획은, 마치 목표를 정확하게 겨누고 매서운 장검을 휘두르는 듯 천천히 내리 치다가는 마지막 순간에 빠르게 치켜 올린다. 확실하게 끝맺음을 하려는 듯한 무인의 기질을 느낄 수 있는 삐침이다. 이 순간의 송시열은 강하지만 매우 날카로운 장검을 사용하는 용맹한 장수와도 같은 모습이다.
효종은 뜻을 함께 이루어줄 신하인 친명배금의 송시열은 효종에게 백만 대군과 같은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인물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효종의 설레는 가슴은 그렇게 부풀어만 갔다. 힘을 얻는 효종은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고 은밀한 군사훈련을 지시했다. 양송(송시열과 송준길)에게는 군비를 확충하라고 명하였다. 효종은 자신의 꿈을 이룰 날 만을 고대하며 살아갔다. 효종은 여색을 탐하지 않은 보기 드문 왕이었다. 북벌이라는 대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힘을 여색에 낭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 이외에 단 한명의 부인인 안빈 이씨를 두었을 뿐이다. 효종의 북벌의지는 절대로 정치적인 쇼가 아니었다. 그가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감내해야 했던 고초와 그 치욕을 씻고자 하는 마음은 조선의 그 누구보다 더 크고 간절한 것이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
효종의 부분 꿈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시열은 효종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당대의 정치적으로도 경제적 상황으로도 조선의 국내 정세는 북벌을 감행 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전 국토를 유린당한 임진왜란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정묘 병자호란이라는 강한 펀치를 맞은 조선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후유증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전형적인 농업국가의 형태였던 조선의 농(農) 체제가 거의 붕괴되다 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효종은 북벌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북벌에 대한 의지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쉽게 말로는 북벌을 외치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북벌 불가지론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효종이 이러한 송시열을 불러 북벌을 재촉하자 송시열은 수신을 강조하면서 북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답답해진 효종은 송시열에게 북벌을 하자는 뜻으로 초구를 하사한다. 기온이 몹시 차가우므로 하사한 초구를 입고 나서자는 강렬한 뜻이 담긴 하사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북벌의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효종은 그 뜻을 따라주지 않는 신하들을 바라보며 혼자 고민고민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다가는 그만 뜻밖의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숙원인 북벌을 가슴에 뭍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등극하지만 무려 1년도 채 되지 않아 현종마저 사망하고 숙종에게 그 임무가 넘어간다. 숙종은 그 술수가 빼어난 인물이었다. 당론을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적절히 활용한 인물이었고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숙종도 표면적으로 북벌을 내세우고는 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현실을 직시하는 인물이었고 북벌의 의지는 할아버지만 한 것이 못되었다. 그렇게 시대적 흐름은 불벌 불가지론이 대세를 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청나라의 국가 정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흔히 삼번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오삼계의 난이 발생했던 것이다. 오삼계는 한인으로 명망한 명나라의 재건을 명목으로 청나라에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나름대로 자치세력으로 독립된 형태를 띄고 있던 번을 강희제가 그 자치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강희제는 번의 독립성을 불안해 했던 모양이다.
하여 청은 정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한바탕 전쟁에 돌입할 위기의 상황을 맞는다. 이러한 청나라의 상황을 조선의 윤휴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매우 불안한 청나라에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그동안 연구해온 신무기등을 도입해 북벌을 단행하자고 나선 것이다. 윤휴의 북벌의지는 효종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북벌을 위해 군사, 무기등을 연구하는 등 병법에 밝은 사람이 또한 윤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