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다섯 번째 주제는 ‘선과 악은 어디서 오는가?Where do good and evil come from?’이다. 글은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3살짜리 아이가 엄마의 팔에서 빼앗겼다. 그리곤 이마를 물어 뜯겨 살해당하고, 잡아 먹혔다. 아이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어느 엄마와 딸이 한 짓이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적어도 두 건의 유아살해 및 식‘인’에 연루되었다.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연쇄살해는 정말 ‘악’이라고 부를만한 짓이다. 단, 여기서 피해자와 공격자들은 탄자니아의 국립공원에 사는 침팬지들이었다. 우리는 침팬지를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다른 경우,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선과 악의 문제는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씨름해 온 문제이다. 선과 악은 나눌 수 없는 쌍둥이일까? 어떤 일이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과학이 답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왜 동물들은 이타적인가?’, ‘왜 침팬지들은 때때로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다. 선과 악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자연선택이라는 중립적 손이라는 것이 과학의 답이다.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의 진화생물학자인 버나드 크레스피Bernard Crespi 교수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다. 왜 어떤 동물은 어린 동생을 돌볼까? 자기 자식이 아니어도 공통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수준에서는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는 이기적 행동이다. ‘선한 행동’은 종종 ‘숨겨진 이득’을 동반한다. 물론 유전자 수준에서의 이득이다. ‘악한 행동’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유아살해한 침팬지들은 식량과 자원 획득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었음이 이후 드러났다. 이 경우 유전자 수준에서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 이득이다.


물론 모든 악행이 유전자 이득으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인간의 많은 경우가 폭력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결과도 있으니까. 이러한 과학의 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선과 악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이러한 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할 수 있다: 진화적 압력이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평화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배부르고 등 따스운데 누가 싸우고 싶겠는가? 이것이 선과 악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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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네 번째 주제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What is the meaning of life?’이다. 이 질문에 대한 냉정한 답은 ‘아무 의미도 없다’이다. 우리 각자에게 인생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생이란 무심한 우주 속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인생이 끝나면 내 주변의 몇몇은 얼마 동안 나를 기억하겠지만 이들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 역사책에 나올 커다란 일을 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내 공헌은 점점 잊혀질 것이다. 인류는 멸종할 것이고 지구와 태양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최후에는 우주도 종말을 맞는다. 이러한 끔찍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실은 왜 사람들이 종교(신에 대한 믿음)를 갖는지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종교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해서 존재의 잔혹함을 완화시켜준다. 어떤 신학자들은 신이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어떠한 ‘객관적’ 증거도 현재로는 없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주제에서 다뤄진다.)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는, 우리가 관찰할 때 우주는 존재하게 되며 관찰 행위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다음에 무엇이 발생할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좀 더 가설적 해석은, 선택할 때마다 우주는 나누어지며 다른 가능성은 다른 우주에서 펼쳐진다고 말한다. 이게 사실이면, 나 때문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하, 이게 종교와 뭐가 다른가 하는 질문이 문득…)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실제적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심리학자들이 찾아냈다. 그냥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얼마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인생보다 더, 자신의 인생에는 의미와 목표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대답에 어떻게 객관적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비판에, 미주리 대학의 로라 킹Laura King 교수는 어차피 객관적 답이 없는 질문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오히려 넌센스라고 답한다. 내가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데 누가 나를 판단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 모두 제멋대로,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좀 더 충만한 삶인지,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는지는 각자 고민해야 하겠지만,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리다고 말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결국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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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10-0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택할 때마다 우주가 놔눠진단 설명에 멀티 유니버스가 연상됩니다. ㅎ
영생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자신이 만든 기업 등에 상속 등으로 영생과 존속에 집착한단 얘기도 기억납니다. ^^

blueyonder 2016-10-09 22:25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물리학자들이 `믿는` 가설이랍니다. 상속이든 뭐든 결국 없어질 우주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때때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전우주적으로 관점을 확대할 때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합니다. ^^
 

<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세 번째 주제는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는가?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이다. 이러한 의문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유신론적으로 표현하면, 왜 신은 번거롭게 우주를 창조했을까? (여기에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인간적 게으름도 내포되어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쉬운' 과학적 대답은 이렇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진공'이라는 것도 사실은 무가 아니고 입자와 장이 마구잡이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활발한 공간이다. 현재는 이러한 무작위적 요동의 하나가 우리 우주를 만들어냈다고까지 생각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없는 것이 더 어렵다.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무언가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는 더 '어려운' 질문을 제시한다. 양자 요동이 있는 진공은 진정한 '무'가 아니다. 진정한 무란 무엇일까? 양자 요동이 없는 진정한 진공이라도,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팽창하고 휘어지고 (블랙홀과 같은) 구멍이 생기는, 마치 물질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고전 물리조차도 진공이 한 가지 속성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크기'가 그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물체를 담고 분리시키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다. 그럼 진정한 무란 무엇일까?


진정한 무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물리법칙도 없는 것이다. 왜 물리법칙은 있는 것일까? 왜 물리법칙은 없으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이 있는 것일까? 이 대답에 대해 가능한 답은 '다른 물리법칙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중우주'라는 요즘 유행하는 이론은 이러한 모든 가능성(물리법칙이 없는 경우까지 포함한 다른 물리법칙)이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옥스퍼드 대학의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 교수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철학적 질문"일 뿐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음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심지어는 궁극적 해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생각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니까. 학자다운 답이다. 일면 동의가 된다.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면 그 이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지도. 도이치는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한다: "왜 무언가 있냐구요?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불평할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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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두 번째 주제는 '의식은 무엇인가?What is consciousness?'이다. 앞의 주제와 연결되는 이야기로서, 정말로 존재하든 시뮬레이션으로 존재하든, 결국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는 있다는 얘기인데,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히 잘 알고 있다.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나'는 물질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불멸의 영혼'일까? 아니면 단지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정보를 처리할 목적으로 만든 뇌로 인한 부산물일까? 과학에서 무엇이라고 생각할지는 아마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결국 '나'라는 느낌, 넓게 얘기하면 '의식'이라는 것은 실체라기 보다는 환상, 신기루라는 것이 과학적 입장인데, 그럼 뇌가 어떻게 이러한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하는 것이 과학이 시도하는 바가 되겠다. 뉴런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네트웍이 어떻게 물질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만들어내는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결코 과학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 어려움을 뉴욕 대학의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교수는 1970년대에 이렇게 말했다: '박쥐 뇌의 모든 물리적 작용을 이해할지라도 박쥐인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박쥐 뇌를 완벽히 이해할지라도 내가 박쥐가 된 느낌을 알 수는 없다, 내가 박쥐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내가 남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은 '내'가 '환상illusion'일 뿐이라고 말한다. 뇌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도 '나'는 환상인 것이 맞다. 나는 '우주'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우주와는 별개인 존재, 우주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존재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내 손을 바라보면서 나와는 상관 없는 객체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내가 죽은 후 뇌와 몸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주'는 남아 있다. 이것은 과연 '내'가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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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첫 번째 주제는 '내가 존재하는지 어떻게 아는가?How do I know I exist?'이다. 내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누군가의 시뮬레이션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마치 매트릭스 영화처럼, 내 경험을 누군가 만들어서 그냥 넣어주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이게 다 꿈이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가 되겠다. 이것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므로 기사는 질문의 의미를 바꾸어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누가(어디서) 만드는가'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결론을 바로 말하자면 우리의 뇌가 주변의 정보를 종합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실마리로 언급되는 것은 코타드 증후군Cotard's syndrome이다. 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는다고 한다.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브레인 스캔을 통해 밝혀낸 바로는 이러한 증후군을 갖는 사람들은 뇌의 특정 부분에 이상을 보이는데, 이 부분은 보통 우리 몸과 감정 상태를 인식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뇌가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뇌란 일종의 예측기계prediction machine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뇌는 우리 몸과 주변의 신호들을 종합해서 무엇이 이 신호들을 야기시키는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예로, 우리가 만약 절벽 위를 걷고 있다면, 뇌는 이대로 계속 걸어갈 경우 절벽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인지(예측)해야만 한다. 정확한 예측을 위해 뇌는 사전지식을 가지고 자기 모델의 정확성을 계속 테스트해야만 한다. 독일 마인츠 대학의 메칭어Metzinger 교수는 "뇌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시스템이다"라고 말한다.


어려운 질문에 대한 실제적 대답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우리 존재란 뇌가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나'는 뇌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 이 모든 연구, 이 모든 세상, 내가 얻는 모든 경험이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누군가'는 하나님일 수도, 기사에 따르면 '악마'일 수도 있다. 데카르트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우리를 속일 리가 없다'는 결론을 얻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확실히)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현대과학적 표현으로 바꾼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 같다: '나는 뇌가 있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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