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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필립 M. H. 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12 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니 12개의 전투를 골라 전투 양상과 의의를 개괄하는 그렇고 그런 책이겠거니 했다. 표지를 보니 마치 20년 전에 나온(!) 책인 듯했다. 하지만 이 책은 2011년에 나온 최근 책이었다(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한다는 뜻이다). 번역은 2012년에 됐다. 차례를 보면서 ‘아 괜찮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고른 12개의 전환점은 다음과 같다.
1 히틀러의 득세: 프랑스의 붕괴, 1940년 5-6월
2 “가장 좋았던 시간”: 영국 전투, 1940년 7-9월
3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의 소련 공격, 1941년
4. 진주만, 1941년 12월: 세계대전이 되다
5 미드웨이 전투, 1942년 6월 4일
6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7월-1943년 2월
7 호송선과 잠수함: 대서양의 결전, 1943년 3-5월
8 “압도적 힘의 적절한 이용”: 공장들의 전투
9 테헤란 회담, 1943년 11월 28일-12월 1일: 대연합을 위한 전환점
10 D-데이와 노르망디 전투, 1944년 6-7월
11 “운명적인 회담”: 얄타, 1945년 2월 4-11일
12 일본의 패배와 원자폭탄, 1945년
중요한 전투를 적절히 골랐을 뿐만 아니라 군수품 생산, 연합국의 막후 정치 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읽으면서 기대를 초월한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중요 전투의 전개 양상과 전쟁에서의 전략적 의의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전쟁의 흐름과 당시의 정치 상황 등이 잘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2차 세계대전사에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좋은 책이 없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너무 많은 전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큰 흐름을 따라 갈 수 있고, 그 배경이 되는 전략적, 정치적 상황들이 언급되며, 개인의 일기까지 인용하는 전쟁사 책: 별 다섯이 아깝지 않다. 4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에 이러한 정보를 담은 저자의 필력에 감탄한다. 저자인 필립 벨은 영국 리버풀 대학의 명예 역사 교수라고 하는데, 아마 평생의 독서와 연구가 이 책으로 나왔으리라 짐작한다.
저자가 결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지나고 나서 보면 2차 세계대전은 결국 연합국이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고 보통 생각하지만, 전쟁이 언제 어떻게 종결되는지와 그 결과에 따른 세계정세는 매우 유동적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만 해도 날씨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만약 실제 일어났던 것처럼 하루만 연기된 것이 아니라, 다음에 상륙이 가능한 날짜인 2주 정도 연기되었다면 아마 실패의 가능성이 매우 컸으리라고 지적된다. 그렇다면 나치의 패망은 더욱 느려졌을 것이고, 심지어는 항복이 아니라 강화로 전쟁이 끝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마 현재는 PKD의 소설 <높은 성의 사내>에 나온 것과 같은 세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소련이 점령한 유럽의 영토가 더 넓어져서 서유럽까지 공산화가 됐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도자와 국민 여론의 중요성이다. 아무리 물량으로 우세해도 국민이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저자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소련의 아프간 전쟁을 그 예로 든다). 종종 간과되는 이러한 사실도 전쟁과 역사를 사람이 일구어간다는 측면에서 보면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역자는 기자 출신의 번역가인데, 번역 용어 선택에서 간혹 아쉬운 측면이 있다. 가령, 일본해군의 ‘항공모함 1사단, 2사단’의 표현이 있는데, 영어로 carrier ‘division’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사단’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일본 원어를 따라 ‘항공전대航空戰隊’라고 쓰던지, 아니면 요즘 표현으로 ‘항모전단航母戰團’이라고 쓰는 것이 나을 것 같다. torpedo bomber는 ‘어뢰 폭격기’라기보다 ‘뇌격기’로 적는다. 독일군 탱크의 이름도 영어식으로 ‘타이거’, ‘팬더’로 적었는데, 통용되는 이름은 독일식으로 읽은 ‘티거’, ‘판터’이다. ‘마르크 IV’ 탱크도 보통 ‘4호 전차’라고 적는다. 종종 ‘통신’이 언급되는데(예를 들어 ‘통신선’, ‘통신 센터’) communications을 통상적 의미로 번역한 모양이지만, ‘병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도, 이 책은 매우 유용하고 좋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투 및 전쟁의 전개 양상을 빨리 파악하고자 할 때, 국내에 번역된 책 중 이것보다 좋은 책은 없는 것 같다. 3권의 <2차 세계대전사>로 번역된 책을 쓴 제러드 와인버그의 입문서 <World War II: A Very Short Introduction>도 괜찮은데 번역은 아직 안 되어 있다. 와인버그의 입문서는 전체 전쟁 양상을 다루는데 중점을 두므로, 개개 전투의 세세한 전개 양상은 거의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