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책들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6년 11월
1,
이 책의 서문에서 김중혁은 '어릴 때부터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고 시작하는데,
나는 어릴때부터 의심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의문이 많은 아이였다.
이 말은 김중혁의,
'세계의 이치를 캐묻는 질문은 전혀 없었고,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물음이 대부분이었다.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른들은 바빴다."넌 대체 왜 그런 게 궁금하니?"라든가 "그런 건 나중에 차차 알게 된단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많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어른들도 답을 몰랐던 거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시지. 답을 피했던 어른들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답을 해주어야 하는 처지의 어른이 되었건만, 답을 해주는건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알고 있는 걸 대답해줄 때도 난처하긴 마찬가지다. 가끔 누군가의 질문에 답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게 정말 답이 맞을까? 다른 답은 없을까? 또 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답을 하면서도 질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4쪽)
라는 구절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고 반박이기도 하다.
나의 의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저 먼 우주를 향해 망원경을 펼치는 것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일일이 현미경을 들이대는 소심한 작업이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사람 몸의 땀구멍은 몇 개인가 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의 갯수는 몇개인가 따위,
다른 사람이 봤을때 하나도 중요하거나 심각하지 않을 것들이 궁금했다.
때문에 대놓고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행여 의문문의 형태를 띄었더라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쯤에서 질문과 의문은 비슷한 형태를 취하지만,
질문은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고, 의문은 자기 자신의 안에다 품는 것이다, 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한때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책에 모든 해답이 들어있으리라 생각하고 책을 읽었으나,
답을 얻지 못할 때도 있었고,
선문답마냥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답이어서,
그게 답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적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질문들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걸 김중혁은 이렇게 얘기한다.
'빨간책방'을 함께하면서 질문하는 법에 대해 많이 배웠다. 답을 구하지 않는 물음이더라도 질문은 정교해야 한다는 걸 배웠고, 질문의 꼬리를 무는 질문을 묻는 법도 배웠다. 어쩌면 가장 즐거운 대화는 답도 없이, 밤새도록 질문하는 방식일지 모른다. 시간제약이 없었다면, 그리고 배가 고프지만 않았더라면, 목이 말라 맥주 생각만 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방송을 했었더라면 밤을 새울 수도 있었다.(5쪽)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다는것은 질문이든 의문이든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질문을 부풀리며 바깥으로의 세계를 확장하든, 의문을 품어 안으로의 세계를 공고히 하든 것이든,
답을 찾는게 목적이 아니라, 더 많은 질문이 생겼으면 좋겠는 것이라는 걸 알겠다.
바로 다음 장,
이동진은 서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니까, 좋은 책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좋지 않은 책은 간단하고도 명확한 답변을 자신있게 제시하지만, 좋은 책은 늘 에둘러 가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긴 꼬리를 가진 질문을 남긴다. ㆍㆍㆍㆍㆍㆍ그러니 부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제기된 물음에 연이어서 물을 수 있기를. 물음에 물음을 얹어가며 치열하게 물을 수 있기를. 물음의 연쇄 속에서 지치지 않고 계속 물을 수 있기를. 그리고 물음의 반향에 서로 귀 기울여가며 함께 물을 수 있기를.(6~7쪽)
그러면서 여러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그중 내가 건드린 책은 '총, 균,쇠',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정도이고,
읽은 책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작가란 무엇인가'
8권 중 4권이면 선방이지 싶다.
뒀다가 나머지 4권을 읽을 때마다 들여다봐도 좋겠다.
2,
어르신 한 분이 며칠째 내 책상 앞을 떠나가지 않으시면서 쌓아 놓은 책을 눈여겨 보시더니,
"책을 참 많이 읽으시네요."
하면서 말을 걸어온다.
"아, 네에~"
하고 말끝을 흐리자, 작정을 하고 달려드신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책을 선물받았는데, 읽어볼라우?"
라고 하시길래,
"제가 책 편식이 심해서요, 책은 제가 직접 골라 읽어요."
라고 했더니,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 각하 때문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됐고..."
어쩌고 하는 일장연설을 하시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벌써 몇 주째 박사모 집회에 참여했으며, 요번주에도 참여할 거라고 하시면서,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책 몇권을 갖다 주시겠다는 거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데, 강요하시는 건 아니죠~!"라고 했더니,
몇번 더 이렇게 저렇게 말을 부치다가 삐쳐서 가버리셨다.
3.
당신의 정원 나무 아래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프랑스 소설은 좀체로 안 읽는데, '프레드 바르가스'는 좋았던 기억이 있다.
'당신의 정원 나무 아래'라는 이 책은 예전에 '죽은자들이여 일어나라'의 개정판이다.
얘기가 될려고 그랬겠지만,
이 책속의 남편은 아내 소피아가 없어졌는데도 심드렁해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쥘리에트'가 열심이다.
개인적으론 '소피아'란 캐릭터가 매력적이어서,
좀 더 오랫동안 등장했으면 싶었는데 너무 일찍 죽어버려 안타까웠다.
책을 읽어가며 관심은 자연스럽게 '소피아'에게서 '쥘리에트'에게로 옮아갔는데,
'소피아와 친구가 될 수 있었겠냐'고 의심하는 형사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서라고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책을 읽는 건 어쩌면 다른 뭔가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죠.'
라고 소피아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관심이 더해졌다.
한가지 혼란스러웠던건,
프레드 바르가스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인데,
그녀의 가정사를 의심하여야 할지 프랑스란 나라의 가정사가 원래 이런 것이지 혼란스러웠는데,
제대로 된 가정이나 가족이 없다.
해체된 가정이나 가족관계가 일반적인 것처럼 등장한다.
인간 관계 따위, 배려와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면 이런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싶어 아쉬웠다.
쥘리에트를 빌어,
'...고독하게 살던 몇 년동안 그놈의 고독과 씨름하기 위해 내가 수천 페이지의 책을 읽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예요...'
라고 하는 부분에서 한 때 고독했었을 작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암튼 쥘리에트가 책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책읽기엔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해 읽은 책으로 지식습득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인격형성에서는, 적어도 고독과의 씨름에서는 실패하였으니 말이다.
고독과 맞서든 고독과 친구가 되든 각자의 몫으로 남겨놓고,
알라딘 서재가 좋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알라딘 서재 이곳에서 수많은 알라디너들을 만난다.
때로 리뷰나 페이퍼를 읽다보면,
겉으로는 당차고 씩씩함을 가장하나,
뭐라도 한마디 하려고 다가가려 하면,
급정색을 하고 방어막을 치는 걸 보게 된다.
그건 댓글과 덧글에서도 나타난다.
나도 양쪽에 가변적으로 적용된다.
지식습득을 위해서라면,
책을 읽으면 되고,
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질문을 하면 된다'고 얘기하는 책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지레 방어막을 치게 되면,
그 방어막에 차단 당하는 입장에선,
한걸음 다가가야지 싶다가도 부질없지 싶어 안으로 움추러들게 된다.
내 나이가 일부러 누군가에게 싸움을 걸거나 방어막을 부수려 달려들 나이는 아니다.
그러고보면, 책이고 음악이고 그림이고 그냥 읽고 듣고 보기만 해서 되는게 아니라,
그런 것들중 어느 것이고 어떻게든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마음을 울리게 되어,
변화시키는데에서 의미를 찾아야 겠다.
더디고 미미할지라도~!
오늘의 '1일 1그림', 제목은 '이쁜 그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