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난,
허기지면 음식을 찾지만,

영혼이 허기지면 책을 들입다파지만,

마음이 허기지면 사람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또 한없이 그리워 하게 된다.

 

시를 자주 읽고 가끔 외우기도 하지만...내가 개인적으로 가까이 하게 되지 않는 시인이 있는데, 류시화와 이병률이다.
류시화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이고,
이병률은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와 여행산문집 '끌림'을 읽었었는데,
그의 글 전반적으로 묻어나는 쓸쓸함의 정서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가뜩이나 머리를 옵션으로 들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는터라,

그렇게 감성 충만한 글들을 읽다보면 나도 어느새 feel 충만하여져 무뇌아 취급을 받을 것만 같아서 라고 해야할까?

암튼 이병률은 그렇게 내게서 한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얼마전 내게 시집을 몇권 선물해주시겠다는 분이 계셨다.
그 분이 골라주신 시집은 이병률의 '바람의 사생활', 정끝별의 '시심전심',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였다.
'바람의 사생활'을 고르신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신형철'님이 해설을 하셔서라고 하셨고,

'시심전심'은, 내가 어디선가 정끝별을 좋아한다는 걸 본것 같은데...정끝별님이 직접 쓰신 시들은 아니니 내가 안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으셨단다.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는 절판이었다.
사실 정끝별님의 '밥'라는 시선집은 참 좋았지만, 요번 '시심전심'은 별로였었는데...
그 이유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이후로 쳐다보기도 싫어했던 그런 시 해석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였다.
나는 가뜩이나 시뿐만 아니라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고 의인화하는 걸 좋아하는데,
시를 갈갈이 나누고 헤쳐 분해하고 하는게, 로봇 분해 조립이나  과학상자 만들기같이 느껴져서 말이다.

(어찌되었건, '마음과 마음이 詩로 서로 통할 때'라는 부제는 참 멋지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내게 없는 시집들을 골라내기까지의 그 정성이 선물보다 고마웠다.

 

그동안 이병률의 시가 내게 겉돌았었던 것은 어쩜 시적자아가 여러명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적자아가 너무 여러명이다 보니, 어느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얘기는 다시하면 어느 누구는 A라는 시를, 어느 누구는 B라는 시를, 또 누구는 C라는 시를...취향에 맞게 좋아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어느 누구나 좋아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군가'의 자리에 나를 대입시키면 그를 깊이 좋아하기는 좀 힘 들었었다.

 

예를 들면,

그의 첫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의 주된 정서는 슬픔인 듯 보였었다.

 

 

벼랑을 달리네

 

문상 다녀오는 체감온도 영화 십육 도의 추운 밤

경사진 도로에서 차로 뛰어드는 여자를 보고 놀라 급히 차를 세우는데

뒷자리에 타자마자 '가양동 2단지'를 외치는

택시가 아니라 해도 슬프도록 코를 골며 잠을 청하는

화장품 냄새 술냄새 반에 전 난취의 여자

그래도 내리라 하지 않고 조심스레 몰 수 있었던 건

당신처럼 갈기갈기 사지가 찢긴 채

누군가 나를 데려다 눕혔으면 했던 의식을 부탁해왔기 때문이다

가양동 2단지 앞에 차를 세운 영하의 밤

잠든 여자를 깨운다 눈인사도 한마디 말도 없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던 목도리를 반듯하게 개어놓고

휘청휘청 아파트 단지 안으로 발걸음을 떼어놓는 여자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 건

나도 벼랑 끝에 살며 당신처럼 핏발의 냄새 풍긴 적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춥지 않다 싶게 집으로 되돌아오는 밤

무언가 하얗게 시야를 덮쳐 급히 차를 세웠더니

도로에 떨어져 휘날리고 있는 두루마리 휴지

인사 대신 남겨둔 여자의 목도리처럼

매운 바람 속에서 하얗게 몸을 풀며 구르다

놀라 멈춰 선 차를 감싸며 흐느끼고 있다

가지런히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차 안에서 눈 감을 수 있었던 건

나도 당신처럼 머리를 풀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

마지막인 양 파닥이고 싶었던 적 있기 때문이다

 

 

'벼랑을 달리네' 같은 경우...
그 슬픔이 추운건지, 슬픈건지, 흐느끼고 싶었던 건지, 파닥이고 싶었던 건지...어떤 형태로 표출된건지 애매모호하다.
그림으로 그리라면 그리겠는데,
말로 얘기하라면...글쎄, 이쯤되지 않을까?
"음, 슬픔은 슬픔인데~. 그게 추운건지, 슬픈건지, 흐느끼고 싶은건지, 파닥이고 싶은건지...는 나도 모르겠어...ㅠ.ㅠ"


근데, 요번에 읽은 '바람의 사생활'에서는 좀 바뀌어 있었다. 
제대로 몰입할 수 있었다.
그의 정서, '바람의 사생활'에 실껏 몰입할 수 있었다.

 

어쩜 시인은 그대로인데...
신형철의 해설 덕에 시인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신형철은 좀 관조적인 시선으로,
전지자나 선각자의 그것으로 이병률을 바라본다.

일부분만을 옮겨보면 이렇다.

기어이 사랑하며 살아보겠다 하는 마음과 이냥 헤어지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이 번갈아 밀려왔다 밀려가며 파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 두 마음 중 어느 하나에 의지해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앞의 일보다는 뒤의 일이 더 아픈 일이다. 이병률의 일들이 그렇다. 이 사내의 내해(內海)를 드나드는 파도는 어찌 그리 심해파(深海波)이기만 한 것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길은 어찌 이리 먹먹한 먹빛인 것인가. 그럴 수도 있는가, 그렇게도 살아지긴 하는가, 내내 물어가며 그의 시를 읽었다.
ㆍㆍㆍㆍㆍㆍ

 

'바람의 사생활'에서 그는 좀 바뀌었다.

그 슬픔이...추운건지, 슬픈건지, 흐느끼고 싶은건지, 파닥이고 싶은건지...는 모를지라도,

그 슬픔이 '적어도' 아픈거라는 건 안다.

그래서 '바람의 사생활'에서는 그 '슬픔'이 제 살을 헤집는 아픔인 줄 느낀다.
아픔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은 그는, 슬픔 또한 타인에게 전염시키려 들지 않는다.
여기서 자신을 객관화하려 하고, 타자화하여 바라보려 노력하고...그 바람에 시가 한결 깊어진다.

 

 

 

 

 

 

 

 

Smiling & Waving
이엠아이(EMI) /

2001년 7월

 

이 앨범은 절판이다.

이 앨범의 열한 번째 트랙에 실려 있는 곡이었는데, 알라딘엔 열 번째까지밖에 공개가 안됐다.
아냐 가바렉은 재즈의 거장 얀 가바렉의 딸이라는데,

얀 가바렉의 딸이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는게 놀라웠고,

독특한 목소리로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 또한 놀라웠다.

우와~ 나랑 동갑이라는데...이런 목소리, 이런 몸짓을 구사할 수 있다니...그 또한 놀랍다.

 

I won't hurt you-Anja Garbarek

 

I've lost all my pride
I've been to paradise
And out the other side
With no one to guide me
Torn apart by a fiery will inside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m an untouched diamond
That's golden and brilliant without illumination
You're mouth's a constellation
Stars are in your eyes
I'll take a spaceship
And try and go and find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My pale blue star
My rainbow;
How good it is to know you're like me
Strike me with your lightening
Bring me down and bury me with ashes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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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1-11 09:49   좋아요 0 | URL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문장, 왜 이렇게 찔리는지.. 음.. 그 와중에 또 배는 고프고요. ㅎㅎ

Forgettable. 2012-01-11 11:57   좋아요 0 | URL
히융 이런 글도 괜찮을 때나 읽을 수 있지, 마음 상태가 말이 아니니 공감을 넘어서 버겁네요.
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혼자라는 기분에 즐겨 읽지 않아요. 요즘은 아예 모든 글을 즐겨읽지 않나;;; ㅋㅋ

책가방 2012-01-11 13:47   좋아요 0 | URL
접힌 부분이 펼쳐지지 않네요. 요즘 제 컴이 좀 느려지긴 했습니다..^^
시라는 거..
전 잘 안 읽어지던데.. 이렇게라도 시를 접할 수 있어 좋네요.
혼자 남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 엄마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년초에 친정갔다가 9일에 돌아왔거든요.
시끌벅적하다가 모두 가버린 후 혼자남을 엄마가 새삼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2012-01-11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케 2012-01-11 15:05   좋아요 0 | URL
저도 류시화는 노코멘트.. 이병률의 글과 시는 글 잘쓰는 여고 3학년생 분위기여서 늘 저에게 약간의 닭살을 ㅋ
아직 엄동지절이라 '對影成三人'의 즐거움은 봄까지 미루셔야 겠습니다.ㅎㅎ

다락방 2012-01-11 15:30   좋아요 0 | URL
(생뚱)저 몇년전에 소개팅했을 때 애프터를 받고 또 만났던 남자가 그 두번째 만남에서 약속시간에 좀 늦었거든요. 밤샘근무를 하고 오후에 나오는거라 좀 늦었다고 했는데, 그때 그가 들고 나왔던 책이 이병률의 [끌림]이었어요. 착한남자였는데, 어딘가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잘 살고 있는지 이 페이퍼를 읽다보니 문득 궁금해지네요. 그런데 그의 이름도 생각나질 않아요, 이제는.
전 이병률이란 이름만 들으면 바로 그 남자로 연결되어 버려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인데도 말이지요.

Forgettable. 2012-01-11 16:08   좋아요 0 | URL
나도 누군가의 차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요. 근데 이름도 얼굴은 커녕 누군지도 잘... -0-

라로 2012-01-11 15:43   좋아요 0 | URL
님 덕분에 시를 읽게 되네요,,,요즘 왜 이러고 사는지,,,^^;;

2012-01-11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1-11 16:48   좋아요 0 | URL
새해부터 시집을 즐거이 읽으셨네요.
즐거이 읽는 시집은
마음을 잘 달래 주지 싶어요.

프레이야 2012-01-11 21:38   좋아요 0 | URL
'바람의 사생활'은 이상하게 마음에 착착 감기질 않았어요.
'그늘과 사귀다'는 표지가 달라졌네요. 이 시인의 시 좋던에요

근데 전 마음이 허기져도 먹는 것 찾아 마구 먹어요.ㅎㅎ
거짓허기라지요. 운동은 안 하고 먹기만ㅠ

cyrus 2012-01-11 22:02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이 주신 책 선물 덕분에 송경동이라는 시인의 글을 알게 되었어요, 나무꾼님 덕분에
요즘 시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있어요. 저도 류시화 시인을 좋아하고 이병률의 <끌림>을 감명깊게
읽었는데 다시 한 번 류시화의 시집을 읽어보고 싶네요 ^^

마녀고양이 2012-01-13 17:35   좋아요 0 | URL
"나도 벼랑 끝에 살며 당신처럼 핏발의 냄새 풍긴 적 있기 때문이다"
나 이 구절 너무 좋아, 왜냐하면 나 역시 핏발의 냄새를 풍긴 적 있으며, 지금은 택시 기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핏발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그때 누군가 나의 택시 기사였으면 싶기 때문에..... ^^

글구, 전에 불에 가까이 가면 화상만 입을 뿐이니 적절한 거리에서 쬐어야 한다는 문구 정말 맘에 안 들었는데,
이번에 그 밑의 문장들을 보니....... 너무 기뻐, 한아름 내려놓은 것 같아서. 내가 기뻐하는거 보여?


2012-01-18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23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