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랫만에 참 좋은 책 한권을 읽었어요.
장르소설을 늘상 읽기는 하지만, 장르소설이야말로 기호를 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 누군가에게 권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침을 튀겨가며 이 책을 들이대요.
별 다섯개로 부족해요.
수려한 번역에 별 하나를 더해야 하고, 오탈자가가 반을 덜어내서 별 다섯개 반이예요.
오탈자까지 들먹인다는 얘기는 책이 다른 걸로는 흠 잡을 것 없이 훌륭하다는 얘기도 돼요.
(엊그제 출간된 책이 발행일 2010년 6월 30일은 좀 그래요, 뭐...그렇다구요.)

아, 이 책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긴장해서 말을 더듬게 될까봐, 감탄사를 빙자하여 생각을 정리해 봐요.
그래요, 반전은 뛰어나지만 화려한 액션이나 불현듯 공포감을 조장하지는 않아요.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치지도 않아요.
얘기가 어떻게 펼쳐져도 좋고, 어떤 결말을 맞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스트레스로 돌아가시게 생겼을때, 사망을 면할 수 있는 치료약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 속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있어요.

참 멋진 여자들과 남자들이 나와요.
작가 루이즈 페니는 이 멋진 여자들에게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그려넣었고,
멋진 남자들에게 함께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그려넣었다네요.
특히 아르망 가마슈 경감에게 자신이 결혼하고 싶은 남자의 성품을 부여했대요. 

그런데 읽다보니 처음에 들었던 멋지다는 생각을 잠깐 보류시켜야 할 것 같아요.
선한 사람들이 산다는 마을 스리 파인즈가 꼭 고인 물처럼 느껴졌달까요.
<스몰플레인즈의 성녀>의 '스몰플레인즈'라는 마을이, 영화 <도그빌>에 등장했던 마을 '도그빌'이 생각나지 뭐예요.
참, 얼마전 읽었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 등장하는 그 마을도 있구나.

이 마을들의 공통점은 적어도 한때는 선한 사람들이 사는 천국이나 다를 것 없는 마을이었다는 거지만,
여지없이 고인 물처럼 썪고 곪아 버려요.
전에도 말했지만 고여서 미동도 않는 물이 있다면 에너지 이동의 차원에서라도 한번씩 건드려 보기예요. 

마을에 모인 사람들은 상처가 두려워서 또는 아파서 모여든 사람들은 맞지만, 
이들이 상처를 치료했는지는 의문이예요.
상처를 감추거나 비껴가려고 하진 않았는지 되짚어 봤어요. 
상처를 긍정적인 에너지나 옹이로 만들던 제인 닐이 이제 없으니, 누가 그 역할을 할까 싶기도 하고 말이죠. 

제인이 했던 역할을, 제인의 자리를 이제는 누군가가 대신 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런 사람이 그대여서 다행이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제인이라면 울라고, 실컷 울라고 내버려두겠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접시라도 던져서 속을 풀라고 했을거야. 제인이라면 달아나지 않을거야. 제인이라면 큰 소용돌이 앞에서도 꿈적하지 않을거야. 그러고는 나를 안고 위로하고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게 해줄 거야.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하여 클라라는 가만히 앉아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았다. 서서히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클라라는 애써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클라라가 품에 안자 제인이 삐걱거리는 늙은 몸을 바로 세웠다. 클라라는 은총을 베풀어준 신에게 짧은 감사 기도를 올렸다. 우는 은총과 지켜보는 은총에 대해.(14쪽)

'...그녀는 제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녀에게 가면 다 해결되리라. 그 부드러운 가슴을 활짝 열어 그녀를 포옹하고 그 마법의 주문을 외리라. '괜찮아, 괜찮아.'(158쪽)

내가 이 책에 멋진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건 이런 이유에서예요.

"...제인을 좋아했고, 아마 사랑하기도 했을 거요. 하지만 미치진 않았지. 우리도 더러 사랑의 아픔을 겪지만 그런다고 자살을 하진 않아요. 아니, 그건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라오."(85쪽)

 이렇게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올리비에는 또 어떻구요.

"우리 모두 대외용 이미지가 있다는 겁니다."
올리비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게이들 사이에서 특히 그렇지 않은가. 그 세계에서는 재미있고, 영리하고, 냉소적이고, 무엇보다 매력적이어야 하니까. 늘 그렇게 보이려다가는 심신이 지치고 만다. 그것도 그가 시골로 달아나고 싶었던 한 가지 이유가 아니었던가. 스리 파인스에서는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그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었다.(94쪽)

멋진 사람하면 아무래도 가마슈 경감님을 빼놓을 수 없죠.
그를 쫒다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향하여 두런두런거리는 게 아니라...
우리는 누군가가 하는 얘기들을 가만히 들어주는(들어야 하는),
제인 닐이나 아르망 가마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생각만으로도 좀 숨막히는 거라서, 엉뚱한 일탈을 꿈꾸게도 하지만 말예요.
뭐, 가마슈가 싫은 건 아녜요.
이런 섬세함을 가진 남자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요.
그는 주검을 이렇게 관찰해요.

그의 깊은 갈색 눈이 그녀의 적갈색 점이 있는 갈색 손에 머물렀다. 정원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해서 거칠고 햇볕에 탄 손. 손가락에는 반지도 없었고, 반지를 낀 흔적도 없었다. 그는 갓 죽은 사람의 손을 볼 때면 언제나 아픔을 느꼈다. 그 손이 잡았을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상상이 되는 것이다. 음식, 얼굴들, 문손잡이들. 기쁨이나 슬픔을 표하기 위해 취했을 온갖 손짓. 그리고 마지막 손짓은 틀림없이 자신을 죽인 그 타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건 자기 눈을 가리는 흰머리를 무심결에 쓸어내 본 적이 없을 젊은이들의 손이었다.(54쪽)

 
숨막힘은 어쩜 지나치게 매력적이란 말과 동의어인지도 몰라요.

가마슈는 몸을 뒤로 젖히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했다. 지켜보는 것, 사람들, 그들의 얼굴, 행동을 빨아들이고, 가능하면 그들이 하는 말도 빨아들이려 했으나 사람들이 그가 앉아있는 잔디 위 나무 벤치에서 너무 멀어 많은 걸 듣지는 못했다.(70쪽) 
사냥에 대해서는 가마슈도 벤과 같은 감정이었지만 사람들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대화는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고, 그게 그의 일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 것.(77쪽) 

가마슈는 또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첫 대목이 생각났다. 올랜도가 몇 세기에 걸쳐 추구한 것은 부나 명예나 지위가 아니었다. 그렇다, 올랜도가 원한 건 단 하나, 진정한 사귐이었다.(112쪽) 

가마슈 경감은 자신의 장점, 이른바 매력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걸 자신의 훈련생, 즉 경찰이 사건 해결을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쯤으로 생각하고 조언하고 있어요.
근데 글쎄요, 경감님의 그것은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훈련생이 지켜보고 관찰하되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좀 그럴 것 같아요.
훈련생이니까 시행착오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그대를 만났을때...날 당황시켰어요.
나는 여지껏 하고 있는게 '지켜보고 관찰하되, 행동하지 않는 것'이거든요.
내 직업을 가진 이후로 누구를 향해서든 그랬죠.

다른 사람 어느 누구도 내가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편이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대는 내가 말을 아끼는 것을 갖고 불공평하다고까지 했었으니 말예요.
생각해보니, 내가 그대를 직업적으로 만난게 아닌데...전혀 무장해제를 하지 못했었던 거죠.
그걸 깨닫게 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지켜보네. 관찰해서 뭔가 알아차리는 걸 아주 잘하지. 그리고 들어. 귀담아듣는 거야. 사람들이 어떤 낱말과 어떤 목소리를 택해서 무얼 말하는지, 혹은 무얼 말하지 않는지. 그리고 이게 핵심이야, 니콜 형사. 바로, 선택이지.
...
배울 수 있지. 보고 들을 수 있고, 지시받은 대로 행할 수 있어. 자넨 훈련생이야. 자네가 뭔가 알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뭔가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돼.
...하지만 귀 기울여 듣기도 해야 해. 마을 사람들의 말, 용의자들의말, 소문, 자네 자신의 본능이 하는 말, 동료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 "(121~122쪽 발췌인용)

가마슈는 돈주고도 얻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몇가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어요.
지켜보는 것, 귀담아 듣는 법, 그리고 배우는 법.
특히 배우는 건 달라지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몸에 밴 걸 버려야 해요.

"...나이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인성문제죠. 그녀는 노력하지 않는다면 쉰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거고, 오히려 더 나빠질 걸요. 그녀가 배울 수 있느냐고요? 물론이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녀가 그동안 배운걸 잊을 수 있느냐는 거예요. 몸에 밴 태도를 버릴 수 있느냐."(161쪽)
"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걸 써야지. 그런데 자넨 쓰질 않아. 보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고 듣지만 귀 기울여 듣질 않아."(235쪽)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더 많은 팀원들을 만나면서 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야. 그런 사람들이 있지. 일대일일 때 아주 잘 하는 사람들. 스포츠로 치면 개인종목 선수라고나 할까. 그런 사람을 팀에 집어넣으면 끔찍하지. 니콜이 딱 그 꼴인 것 같아. 협력해야 할 때 경쟁을 하거든."(263쪽)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헛소리요.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시간은 그 사람이 원할 때만 치유하는 거지. 나는 아픈 사람의 경우에 시간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보았어. 그들은 충분한 시간이 있으면 사소한 일을 되새기고 곰곰 따져서 결국 재앙으로 만들어 버리지."(349쪽)

이 책에 나오는 심리상담사도 비슷한 얘길 해요.

"저는 환자들과 공감을 상실했어요. 스물다섯 해 동안 그들의 불평을 듣다가 마침내 꺾인 거죠.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었는데 한 내담자 때문에 몹시 속이 뒤틀리는 거예요. 마흔셋인데도 열여섯 살 짜리처럼 행동하는 사람이었는데, 매주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왔어요. '어떤 사람 때문에 속상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삼년 동안 이것저것 권해 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그 소리를 듣고는 퍼뜩 깨달은 겁니다. 그가 변하지 않는 건 그 자신이 변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는 변하려는 마음이 없다. 이후로 이십 년이 흘러도 우리는 똑같은 헛수고를 하고 있을 거다. 그때 내담자들 대다수가 그와 똑같다는 걸 깨달았죠."(205쪽) 

한때는 나도 선한 사람들이 사는 스리 파인즈를 꿈꿨던 적이 있어요.
외로운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제인 닐이 되고도 싶고,
가마슈 경감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지켜보고 관찰하고도 싶었어요. 
선한 사람들끼리 모여살면 악이 물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던 거죠.
"악은 특별하지 않고 언제나 인간적이어서, 우리와 함께 자고 우리와 함께 먹는다."
오든을 깜박했었던 거죠. 

실행불가능한 상상들을 혼자 하지만,
혼자 상상하는 것만으론 죄가 되지도 않고 남한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고 자위하며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갔었던 거죠, 뭐. 

이제는 알겠어요.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고, 내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그 사이의 여백과 여운들도 중요하다는 걸 말예요. 
그걸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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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6-28 09:08   좋아요 0 | URL
네 양철댁님 저도 아주 즐겁게 읽었어요. 인성이 정말 모든 것이죠.

느티나무 2011-06-28 09:13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의 심미안을 믿으니까 구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며칠 전에 도그빌-세 번째-을 봤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6-28 12:31   좋아요 0 | URL
네, 알았어요. 다음 주문 때 꼭 사서 볼께요. 잘 계시죠?^^

하늘바람 2011-06-28 13:17   좋아요 0 | URL
오 그래요 아주 궁금해졌어요

비로그인 2011-06-29 09:34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봐야겠군요. 안그래도 양철댁님과 좀 더 독서 목록이 겹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어요. ^^

마녀고양이 2011-06-29 09:59   좋아요 0 | URL
아이고, 완전 지름신 서재구나, 양철댁님....
그냥 빠져드네.. ^^

항상 건강 챙기라고 잔소리하는거 알죠. 요즘 그대, 감탄스럽고 멋지더라. 원하는대로 잘 되어가길.

프레이야 2011-06-29 19:04   좋아요 0 | URL
여기서 스틸은 '여전히'의 그 스틸인가요?
여전함,이란 말이 새삼 다가왔더랬어요.
여전한 삶, 그것의 소중함, 그것의 행복을 미처 몰랐더랬어요.^^
오늘 어떤 분, 교통사고로 온몸이 부서져서 공중에 들어올려져 매달려있어도
그렇게 아파도 죽어지지가 않더란 말이 맴돌아요. 그래서 아파죽겠단,말을 그 이후론 절대 안 쓴대요.
사랑의 아픔으로도 죽지는 않지요. 그냥 교통사고 정도일 뿐이겠지요.

루쉰P 2011-06-30 09:49   좋아요 0 | URL
힘든 날 어떤 것을 털어버릴 수 있는 책을 만나셔서 다행이에요. ^^ 그 어떤 고통도 고난도 숨 쉴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으로 버틸 수 있겠죠. 이 책 극찬을 하시다니 안 볼 수가 없네요. 미친듯한 비에요. ^^ 비 조심하세요.

2011-07-01 20:16   좋아요 0 | URL
안 읽을 수 없겠네요. 알라딘의 매출은 이렇게 오르는 것이 아닐깡. 올 여름에 꼭 읽겠다고 결심했어요. (여름엔 좀 한가해지리라 기대하며~)

2011-07-04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