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시절 나는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병원을 드나들었다.
병원에서 받아먹는 시럽이 달콤하니 맛있어 어느 때는 일부러 였던 것도 같다.

지금은 좀처럼 아프지 않다.
감기에라도 걸렸으면 싶은데 그러지도 않는다. 

얼마전 이 동네의 누군가가,
"아픈데가 없는데 타이레놀을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괜찮아요?"
하고 묻는 데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마음을 내가 아는데, 그 마음을 내가 알겠는데...다독여 주는 대신 엉뚱한 댓글을 달고 도망치듯 나왔었다. 

실은,
맥이 쑥 빠지고, 목이 아프고, 미열이 나고, 어딘가 허전한 것 같고,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때...
타이레놀ER 한두 알이면 몇시간은 거뜬하다는 걸 안다.
약 기운이 떨어지기 전 몇 알을 더 챙겨먹는 수고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떤 시련이 오는 걸 감지하고 습관적으로 먹는 타이레놀ER 한두 알 때문에, 
나의 사랑은, 나의 상처는, 나의 고통은, 그리하여 나의 삶은...몇 시간을 주기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폐암 기왕력을 가지고 계신 어머니는 내가 며칠 뜸한 틈을 타 폐렴에 걸리셨고,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주책맞은 남편은 이상한 자료를 들고와서 봐달라고 하는데, 저자가 중국출신이어서 우리말이 서툴다.
자료를 뒤집어 다시 쓰는 꼴이다.

한 사흘 감기나 앓았으면 좋겠다.
이불 뒤집어 쓰고 아무 생각없이 끙끙 앓았으면 좋겠다.
앓고 난 후, 조금은 퀭한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 아픈데가 없냐고 당신이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타이레놀 ER 따위는 던져버리고, 내 이마를 짚어주는 그 손을 고마워 하며 끙끙거릴 수 있을텐데 말이다.

아침 일찍 어머니께도 들러야 하고,
자료도 손봐야 하는데,
이 책 <어디 아픈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를 이리저리 야금야금 타이레롤 ER 대용으로 들추고 있다.

 

 

 어디 아픈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김선우 지음 / 청림출판 / 2011년 6월




*"나 좀 쉬려고요, 좀 지쳤거든요. 일단 쉬고 다시 잘 살아볼게요. 알았어요, 좀 쉬고 다시 잘 사랑해볼게요."
삶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다행이다. 조금씩, 병아리 눈물 만큼일지라도, 조금 조금씩,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은 거다. 산다는 게 영 녹록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갸륵한 수고, 아 좋은 날이다. (6쪽)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존재다. 어차피 존재의 고독은 혼자 감당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고, 고독은 행복의 반대편에 있는 말이 아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도 고독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행복한 사람일수록 존재의 고독에 명민하게 깨어 있고 고독을 잘 보살피는 것이리라. 그러니 고독은 존재의 자기 증명 방식이기도 하다. 고독을 잃어버린 삶은 영혼의 어떤 부분이 마모되어버린 삶일 것이다(46쪽)

*그녀는 '가장 중요한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로빌에 살면서 여러 일에 종사했는데, 최근에 하는 일이 바로 타운홀에서 마사지를 해주는 일이다. 오로빌리언 중에서 타운홀 근무자들은 외부인들을 상대해야 하고 비교적 많은 실무에 시달리는 편이라 내면을 돌볼 여유가 너무 없어 보였단다. 조는 화도 짜증도 자주 날 수밖에 없는 타운홀 근무자들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녀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91~93쪽)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은 금세 친해진다. '밥힘'이랄까. 커다란 식당의 내부와 외부의 식탁을 가득 메운 오로빌리언들은 음식을 통해서 이웃의 연대감을 확인한다. 함께 밥 먹는 이 솔라키친이 오로빌의 생활의 중심이기도 하다. 마트리만디르가 영적 생활의 중심이라면 솔라키친은 몸 생활의 중심. 둥근 두레밥상에 모여 앉듯이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일상의 소소한 대화들을 나눈다.(151쪽)

*사랑에 빠진 이들은 예쁘다. 지상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깊은 친밀감과 마법 같은 일체감. 사람이 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랑의 감정이 있기 때문일 터.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지루할 것이냐. 사랑하지 않는 순간은 손해다. 설령 사랑 때문에 아프게 될지라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남는 장사다.(166쪽)

*풀잎을 닦아주는 여자라니!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 난도 아니고, 전체가 나무며 풀 천지인 숲에서 특별해 보일 것 없는 덩굴풀의 넓적한 잎사귀를 닦아주는 여자! 가까이 다가가는 내 기척을 느끼자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여자는 내 게 아주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이내 풀잎 닦는 자세로 돌아간다. 매우 매우 평화롭고 맑은 에너지가 그녀 주변에 흐른다.(205쪽)


 

 

 

[수입] Bob Marley & The Wailers - Live Forever [2CD+3LP][Super Deluxe Edition]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ob Marley & The Wailers) 노래 / Island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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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6-15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 선우라면 시를 쓰는 그 김 선우, 맞나요? 에세이도 시처럼 초감성으로 썼을까요? 타이레놀을 원하는 그분에게 인간 타이레놀을 찾아보라고 댓글 달았더랬는데, 여기 종이 타이레놀이 있었네요. ER 정도가 아니라 PR (permanently의 p ^^) 어디 없을까요?
호흡곤란이 와서 중환자실로 가신 시어머님도, 사흘만 앓아누웠으면 좋겠다는 양철댁님도, 잘 버텨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양철댁님의 이마를 짚어주는 손길들이 여기 많이 있지 않을까요?

양철나무꾼 2011-06-16 06:08   좋아요 0 | URL
ㅎ,ㅎ...인간 타이레놀과 종이 타이레놀이요?
기발하세요.
하긴 extended release정도론 부족하죠.
제겐 김선우와 어제 읽은 신형철만으로도 어느 정도 쭈욱~ 지속될 듯 해요.
님도 감사하다고 인사드릴 많은 분들 중 한분이시지요~^^

루쉰P 2011-06-15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하기 전에 양철댁님께 들려 잘 계시나 보고 갈려고 했더니 이건 왠걸...더 힘 빠져서 머리가 복잡한 양철댁님을 뵙네요. 중환자실에다가 자료라...날카로워진 신경을 잠재울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신 건 아닌지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그 복잡한 와중에 타이레놀 대신에 책을 읽으시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구요. ^^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마를 짚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네요. 어디 아프신지 물어도 보고 싶구요. 여러 가지로 지치게 만드는 모든 일 속에서 꼭 헤쳐나가시기를..

양철나무꾼 2011-06-16 06:09   좋아요 0 | URL
교주님을 우울하게 만들어서 어쩐대요?
오늘은 좀 나아졌어요, 덕분이예요.^^

루쉰P 2011-06-16 11:47   좋아요 0 | URL
교주는 절대 감정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신자의 고통에 동화하는 것 뿐이지요. ㅋ
그래도 좀 나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뭔가 하는 것은 없지만 말이죠. 고민을 그리고 떨어진 기분을 어떻해야 다시 정상 알파파로 만드는가 그게 요즘 제 고민이에요. ^^ 저도 좀 기분이 다운돼 있다고 느끼거든요. -.-

양철나무꾼 2011-06-19 16:35   좋아요 0 | URL
기운이 좀 다운되셨었구나~
제가 기운 내시라고 그 동네를 향하여 염력을 마구 날렸으니,
지금쯤 바닥을 치고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고 계시겠죠?

날씨가 덥고 꾸물꾸물하지만,
나의 교주님이라면...쿨하고 멋진 하루 하루를 만드실 수 있을거예요.
기운 내세요~^^

루쉰P 2011-06-22 20:49   좋아요 0 | URL
넵! 충전!

2011-06-15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6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6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6-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나는 하벤 먹는데.... ㅠㅠ
먹으면서 먹을 때마다 반성하지.... ㅠㅠ

솔직하게 말하면, 우울증 약도 병원에서 받아놓은 상비약으로 20회치 정도 있음....
아마 머리 아프고 졸린 부작용 없었으면, 그것도 남발하고 살지 않았을까, 그러면 안 되는건데 하면서 말이지.

힘내. 글구 남편 일, 남편 얼굴에 딱 집어던지면 안 될까? 안 된다구? 그럼 내가 머리 마사지 해줄게,, 이리와.
어머님의 빠른 쾌차를 기원합니다.

양철나무꾼 2011-06-16 06:18   좋아요 0 | URL
머리 마사지 보다 더 멋진 처방을 내 어제 들었지, ㅋ~.

남편 일은 아냐.
남편이 중간에 낀 내 일이야.
중국 전통 비방 같은 거...좀 야한데, 재밌었어.^^

마노아 2011-06-15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치료 전용 타이레놀이 필요해요.
어머님도 걱정이고 양철댁님은 더 걱정이에요.
그저 기운내시란 말만 더 보탭니다. 그 손 꼭 잡아주고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1-06-16 06:21   좋아요 0 | URL
우와~승환 오라버니 멋져요.
실루엣이 장난이 아녜요, 예술이예요. 아흑~.

저도 제 자신이 염려스럽지만,
너무 많은 분들을 걱정시켰네요.

잡아주시는 손, 꼭 붙들겠어요~^^

좋은날 2011-06-1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책 주문해서 꼭 읽어야겠어요.

양철나무꾼 2011-06-16 06:22   좋아요 0 | URL
네, 좋았어요.
신형철과 같이 종이 타이레놀 permanently정도 될 것 같아요~^^

섬사이 2011-06-1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도 저는 김선우 시인의 시집보다 산문집을 더 좋아해요.
그래서 저 책에도 마구 끌리네요.
사흘만 앓아 누웠으면 좋겠다는 양철댁 님 말에 후유~하고 한숨이 따라나와요.
부디 저 책이 양철댁 님께 힘이 되어주기를..

양철나무꾼 2011-06-16 06:26   좋아요 0 | URL
저는 김선우 님은 감성을 약간 불편하게 뒤흔들어 놓는 솔직함이 좋아요.
살잧에 소름을 돋게 하는 바람이 때론 위안이 되는 것처럼...

이런 위로가 있어서 자주 엄살 떨고 투정 부리게 되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잘잘라 2011-06-15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주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어
마음이 무너질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못하는 노래지만, 마음을 담아 한 곡 부르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1-06-16 06:27   좋아요 0 | URL
ㅎ,ㅎ...이거 라이브로 듣고 싶어요.
라이브로 들음 살만해질 것 같아요~^^

穀雨(곡우) 2011-06-1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고 나면 약간의 어지러움이 있지만 개운한 느낌이 있어요. 아픈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면역력이 증강된 느낌..
하지만 진짜 이유는 외로움이더라는...어릴 적 아플때마다 온전히 엄마를 차지할 수 있는 특권...다시 하기엔
너무 먼 현실입니다.ㅎㅎ

양철나무꾼 2011-06-16 06:30   좋아요 0 | URL
저는 앓고 나면 하나를 마무리하고 새로 시작한다는 그런 느낌이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옛날에 이불 뒤집어 쓰고 땀 흘리고 나면...베게랑 이불이랑 꼬슬꼬슬한 새거로 갈아줏는 게 너무 좋았어요.

님도 아프지 않고도 면역력이 증강되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는 처방은 종이 타이레놀인데...나름 괜찮았어요.

머큐리 2011-06-15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잇몸이 너무 쑤시고 아파서... 자다 깨어 타이레놀ER을 먹었더니...정신까지 말똥...오늘 오후 졸려서 헤롱거리다 이 페이퍼를 봅니다... 고통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웬지 약은 안먹는게 좋을거 같아서 참고 있는데...치과가기전 타이레놀을 달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ㅎㅎ

양철나무꾼 2011-06-16 06:32   좋아요 0 | URL
타이레놀 드시지 마시고, 시간 내서 치과를 가시죠~^^
혹, 치과가 더 무서워 타이레놀을 드시는 건 아니시죠?^^

2011-06-15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6 0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1-06-15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금야금 읽고 계시다는 김선우의 에세이가 눈길을 사로잡네요. 김선우의 감성에 위로가 되었다면 좋겠어요.
양철댁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아프지 않은게 제일이에요. 너무 안타까워요. 가까이 살면 소주라도 한잔 하자고 할텐데 말이죠.

양철나무꾼 2011-06-16 06:3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부디, 제발, 플리즈, 포 더 피스 오브 올 맨카인드...아팠으면 좋겠다니까요.

저도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소박하니, 둘이 소주 한병이면 충분할텐데 말예요.^^

아이리시스 2011-06-16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너무 많이 먹어 소화가 더뎌서 늘 머리가 어지러워요. 타이레놀도 몇 번 먹었는데 사실은 컨디션이 안좋은 날이 더 많아서, 체력이 안좋은 날이 더 많아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요. 어쩜 병을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간혹 들 때도 있는데 뭐 설마요.^^ 아프지 마세요.

양철나무꾼 2011-06-19 16:43   좋아요 0 | URL
병을 키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어도, 적어도 몸무게는 키우고 계시군요,ㅋ~.

님도 공부하느라 쉬이 지치실텐데...
이럴때일수록 맛난 음식 챙겨 드시고 아프심 안 되는 거 알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