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집을 지나다가 발길이 멈췄다. 
미친 목련 봉오리가 맺혔던 그 집이었다.
대문 밖에 잘린 목련 가지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담장을 삐져나온 잔가지들을 잘라낸 듯 한데, 
가지도 제법 튼실하고 수북히 쌓인 품이 뉘집 마당쇠가 공을 들였나 보다. 

난 살아있는 생명에 좀 무심한 편이어서,
길 잃은 강아지나 들고양이가 됐다면 무덤덤히 지나갔을 것이다.
꽃을 피우지 못한 나뭇가지라면 죽은 나뭇가지라고 생각해서 그러했을텐데, 
수북히 쌓인 가지 더미에 매달린 목련 봉오리들이 눈에 밟혔다.
나뭇가지들이, 매달린 봉오리들이, 색깔없는 피를 흘리며 눈물을 매달고 누워 있는 듯 느껴져 한참을 서성였다.

2.  
주말에 드라마를 봤다.
고두심이 엄마로 나오는 드라마였는데,
"이 나이에 병 하나 없는 사람 없다더라.
 이만하면 다행이다."

 이 대목에서 색깔없는 피, 매달고 있던 눈물을 토해냈다. 

고두심은 아버지 산소를 찾아,
"정신 차리고 꿋꿋이 잘 살라고 이만한 병 주셔서 감사해요."
이러는데,
이 작가 누군지 홈페이지 찾아 들어가
백일섭처럼 '망할놈의 여편네'라고 호통을 치려다가 접었다. 

극중 고두심은 예순 근처로 짐작된다.
자궁암 설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목련 고목에 피어나는 미친 꽃 봉오리처럼 그냥 떼어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꽃 피우지 못한다고 해서 나무가 아니고 여자가 아닌가? 
과연 현실의 고두심이었다면, '이만하면 다행이다' 라고 할 수 있을까? 

3.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모든 살아있다가 스러져 간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강하고 화려하게 내뿜는 것들은 물론이고,
약하고 소박하더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에게도 감사해야 하겠다.
 
잘린 고목에서도 꽃은 핀다.
 

4.  
<시코쿠를 걷다>를 읽었다.
시코쿠에는 사찰을 돌며 순례하는 순례자만 있는게 아니란다.
순례자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내어주며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이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주러 오는 '오셋타이'수행도 있단다. 
받는 사람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감사한단다.

겨울 내내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쉽게 지쳤다.
내 삶 또한 내 몸과 비슷했다.
그렇게 겨우내 몸과 마음이 고달픈 뒤에야
나는 떠날 생각을 했다.

“몇 번째예요, 이번이?”
“여섯 번째. 시코쿠는 저의 병원이에요.”
“병원이라니요?”
“스트레스가 심해요,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그런데 여기 와서 며칠 걸으면
그게 씻은 듯이 사라져요. 신기하지요!”

순례에서 많은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한다. 몸과 마음의 크고 작은 질병이 낫는, 혹은 호전되는.
나 또한 겨우내 떠나지 않던 감기가 시코쿠에 온 지 이틀 만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나.

“순례는 저의 종합병원이에요. 여기 오면 온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요.
아마도 저는 죽을 때까지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은 순례를 다닐 것 같아요.”

동감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산책이든, 여행이든, 바다든, 산이든,
108배든, 기도든.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자기만의 종합병원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

5.
 

 

 

지현곤의 <달달한 인생>을 읽는다.
'시코쿠를 걷다'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함부로 남을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 것.
전혀 불행하지 않았던 그를 불행한 존재로 못박아 버리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지현곤 作 '노아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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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12-22 01:29   좋아요 0 | URL
함부로 남을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 것.
전혀 불행하지 않았던 그를 불행한 존재로 못박아 버리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너무 멋진 말이네요.^^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저도 말하고 싶어요.

sslmo 2010-12-24 09:04   좋아요 0 | URL
저도 이만하면 다행이다...말하고 살고 싶은데,

여기서 고두심 좀 마음 아프게 나와요.
좋아하는 찜질방을 돈 아까워서 못 간다고 나와요~ㅠ.ㅠ

마녀고양이 2010-12-22 08:29   좋아요 0 | URL
쫌!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이 문구는 좋아, 삶에 도움이 된다니까. 하지만
'모든 살아있다가 스러져 간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이 문구는 슬퍼지잖아요!
인위적으로라도 밝은 것만 생각해야,
감기 걸리고 직살나게 바쁘고 겨울 회색에 조금 우울해도... 덜 힘들지!

언젠가 같이.. 산림욕이나 갑시다. 맛난 공기 먹으러.
(그래도.... 페이퍼는 이쁘네~)

sslmo 2010-12-24 09:05   좋아요 0 | URL
네~
새해에도 계속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절로 2010-12-22 09:28   좋아요 0 | URL
노아방주 그림..피식 웃음이 새는데요. 인간은 아니지, 방주를 사주한 신은 어찌 그리도 자기 중심적인지요.

저, 오늘 자유부인이에요(신랑 허씨가 연수갔데용~그것도 박으로다가~근데 이게 자랑질 거리가 되긴한가 모르겠네@@)

sslmo 2010-12-24 09:07   좋아요 0 | URL
같은 서울 하늘 아래라도 되야, 자유부인인게 자랑질로 들리죠~^^
둘이서 찜질방에서 만나 우리끼리 외박이라도 하게...
님과 전, 서울과 진주...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어요~ㅠ.ㅠ

저절로 2010-12-24 15:23   좋아요 0 | URL
힝! 불러만내봐요. 내가 어딘들 몬가나!

sslmo 2010-12-26 02:11   좋아요 0 | URL
하긴 그때 거기까지 왔다가신 걸 보면...한 액티브 하신 듯~!!!

서울 오실 일 있음 연락 주세요.
만사 제쳐놓고 나갈게요.
저도 혹 진주를 가게 되면 연락 드리지요~^^

잘잘라 2010-12-22 13:13   좋아요 0 | URL
겨울엔 꽃 나무를 알아보기 힘들어요.
꽃도 지고 잎도 지고, 옷 벗은 나무를 보고 왕벗나문지 단풍나문지? 또는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아, 벌써 딸리네. 이거야 원..) 그 수많은 나무가 겨울에는 다같이 그저 '겨울 나무'가 되버려요.

아아! 그렇지! 나무 하는 나무꾼 양철나무꾼님이 있었지!
겨울에도 우리가 사과나무와 은행나무를 구분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세요!!! 부탁이예요^^

sslmo 2010-12-24 09:09   좋아요 0 | URL
우와~메리포핀스님, 멋져요~
전 저렇게 많은 나무 이름 몰라요.
제가 님을 '싸부'로 모셔야 겠는걸요~!!!

2010-12-22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0-12-22 18:45   좋아요 0 | URL
미친 목련이라는 표현이 왠지 정감가는걸요.
가끔 저도 생뚱맞게 피는 꽃 보면서 그런 생각 하거든요. 말로 표현은 못하지만요.

오늘 차 라이닝만 고치러 갔다가 다른것도 고장났다고 해서 생각지도 못한 지출로 속은 쓰리지만 이만하길 다행이다 생각했습니다. 그 표현은 이럴때 어울리는거죠.
암은..결코 그렇게 만만한 병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에구.

sslmo 2010-12-24 09:17   좋아요 0 | URL
에고고~~~
속이 좀 쓰리셨겠는걸요.
브레이크 라이닝도 손수 고치러 다니시고, 굿 드라이버신가 봐요.^^
저도 살살 달래서 간신히 모시고 다니고 있어서 말이죠.

차에 '이만하길 다행이다'가 아주 어울리는 걸요~

세실 2010-12-26 16:48   좋아요 0 | URL
라이닝은 옆지기가 말해줘서 안거예요. 딱 거기까지만 ㅋㅋ
직장 옆이 삼성 서비스센터라 조금만 이상하면 바로 간답니다.

sslmo 2010-12-27 21:34   좋아요 0 | URL
ㅎ,ㅎ...저는 직장 아래층이 옛날에 현대자동차 서비스 센타였는데,
불경기라 요즘은 카 오디오센터로 바뀌었다는~ㅠ.ㅠ

비로그인 2010-12-22 22:16   좋아요 0 | URL
저의 종합병원은 한강변에서 자전거타기에요. 그래서 자전거 자주 타기가 힘든 한여름 한겨울이 길게만 느껴지나봐요.

어떻게 지내세요? 연말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네요..

sslmo 2010-12-24 09:22   좋아요 0 | URL
저의 종합병원은 '찜질방'이예요~^^

찜질방 가서 땀 쏙~빼고,
구운 계란이랑 식혜도 먹고,
두런 두런 낄낄거리다 보면 세상이 좀 살만한 곳이 되어 있더라구요~

연말, 전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어요.
1월까지는 정신이 좀 없으시겠네요.
그럴때일수록...건강 챙기셔야 하는 거 아시죠?^^

cyrus 2010-12-23 00:07   좋아요 0 | URL
<시코쿠를 걷다>라는 책의 표지를 보니 갑자기 수풀이 무성한 산에 혼자 가보고 싶네요.
나무꾼님이 언급하신 드라마 내용을 보니 주말 드라마 <결혼해주세요> 군요,
저희 어머니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죠. ^^

sslmo 2010-12-24 09:25   좋아요 0 | URL
시코쿠를 걷다, 어머니에게 권해 드려요.
님은 '시코쿠' 말고 유레일 패쓰나 시벨리아 횡단 열차가 좋지 않을까요?^^

비로그인 2010-12-23 01:50   좋아요 0 | URL
자기만의 종합병원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곰곰이 생각해봐겠는걸요. 나만의 종합병원은 과연 무엇인지 말예요^^

sslmo 2010-12-24 09:27   좋아요 0 | URL
제 종합병원은 조 위에서 '찜질방'이라고 말씀드렸고,
후와님의 종합병원은...그러니까...저도 궁금한걸요~^^

카스피 2010-12-23 11:29   좋아요 0 | URL
이런 한마디 하셨어야죠.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것이 틀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꿋꿋이 잘 살라고 이만한 병 주셔서 감사해요."라니 웬만한 성인군자 아니면 힘든 말입니다요^^;;;

sslmo 2010-12-24 09:31   좋아요 0 | URL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성인군자'를 감싸안고도 남지만 말이죠~^^

2010-12-23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2-23 16:20   좋아요 0 | URL

조만간 성탄이네요~ 집에서 조용히 만화책이나 배 깔고 누워서 보고 싶은데

아는 형이 결혼한다고 급작스럽게 연락해서 전주에 내려가게 됬네요 ㅎㅎ

올 한해 잘 갈무리 하시고~ 건강하시길 ^^

sslmo 2010-12-24 09:37   좋아요 0 | URL
전주 좋은 동네죠, 잘 다녀오세요.
근데 서울 날이 이렇게 추우면 그쪽은 눈이 많이 오던데,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부럽군요~^^

같은하늘 2010-12-23 18:09   좋아요 0 | URL
드라마를 안봐서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있을까요? 항상, 모두, 언제나~~~ 현실은 달랐다......

sslmo 2010-12-24 09:4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드라마를 오다가다 봐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몰라요.
다만 어머니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자라는 건 간과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여~ㅠ.ㅠ

비로그인 2010-12-23 19:15   좋아요 0 | URL
훔..
색깔 없는 피, 매달려 있는 눈물.

양철님은 12월에 좀 민감하신 것인지.. 아님 체력 저하이신지..
많은 분들의 댓글로 기분 업 하시길 빌겠습니다. ^^

sslmo 2010-12-24 09:4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얘길 듣고보니 또 그렇네요.
살아있는 건 모두 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데,
그렇게 간과하게 되는 게 속상했어요.

음~
한마디 더 보태자면, 어머니도 여자거든요.

바람결님의 댓글로 '훅..' 업 됐습니다~^^

風流男兒 2010-12-24 14:09   좋아요 0 | URL
댓글보다 지도편달 보고 잠깐 웃고가요
매맞을 편
매맞을 달.

sslmo 2010-12-26 02:17   좋아요 0 | URL
제가 잠깐이나마 風流男兒님께 웃음을 드렸다니,
저도 잠깐 웃게 되네요.

달리는 말에 채찍질 중요할까요?^^

글샘 2010-12-25 03:08   좋아요 0 | URL
오셋타이... 맘에 들죠?
주는 게 덕을 쌓는 수행이란 말... 메리 크리스 마스~

sslmo 2010-12-26 02:20   좋아요 0 | URL
시코쿠를 걷다, 님 서재에서 봤는걸요~^^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됐어요.

2010-12-28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9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