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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 Rolling Home With a Bu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풍경달다/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이 영화를 보는 내내,정호승의 <풍경달다>라는 시가 떠올랐다.
좀 외로웠다.
아무리 임순례와 공효진을 외쳐대도 내 주변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이 영화를 같이 봐 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반면,내 주변엔 제목만 듣고도,'심우도'어쩌고 저쩌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가 말이다,에효~
암튼,부처님의 십대제자를 흉내내어 어떤 이가 지어준 별명'삐침제일'답게 한번 단단히 삐쳐주시고,혼자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는 처음과 끝이 같은 장면이다.
비탈진 밭에 소와 가족들이 모여 밭을 갈고 있다.
이들은 소에게 밭을 갈게 하는게 아니라,소에게 밭 가는 운동을 시키는 것 같다.
군대로 치면 영락없는 오합지졸이다.
근데 말이다,이들이 저 넓은 밭을 언제 다갈까 걱정스럽다기 보단,
마음 속 한구석에서 웃음이 배실배실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그런 느낌이다.
뭐랄까?
남이 봤을때 뭐라건 상관없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암튼,
아직 밭가는 소는 본 일이 없다.
그렇게 멋진 여행을 하는 소는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멋진 바다를 구경하는 소를 본 일도 없다.
그렇게 멋진 연기를 하는 그렇게 잘 생긴 소를 본 일도 없다.
(워낭소리의 그 소랑은 분위기가 많이 틀리다.)
막걸리를 먹는 소도 본 일이 없다고 쓰려는 데,남편은 어릴 적 술지게미를 먹는 소를 본 적은 있다면서 어릴적 추억을 술술 풀어 놓는다.
풍경을 워낭처럼 달고 다니는 소를 본 일이 있는가?
이 영화에는 풍경을 워낭처럼 달고 다니는 소가 등장하고,
맙소사 주지 스님은 워낭소리와 풍경소리가 원래는 같은 소리였다고 한다.
나이 40이 다 된 노총각이 있다.
시골에 귀향하여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짓는다.
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내가 보기엔 뭐 그닥 열심인 것도 아니다.
선호에겐 다른 직업이 있는데,시인이다.
그렇다고 시 잘 쓰는 시인도 아닌 것 같다.
아직도 트랙터 대신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가는 농가가 있다.
선호의 아버지가 그렇다.
선호의 아버지는 '소의 세월아 네월아'를 두고 선호를 탓한다.
소만도 못한 놈이란 소리를 듣기는 다반사이다.
홧김에 선호는 소를 우시장에 내다 팔려고 집을 나서고,
소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자,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는 이래저래 피곤하고 아프고 잔병치레를 하게 되고,
선호는 그런 소를 진심으로 돌본다.
그 여정에 7년전의 사랑,현수(공효진)가 등장한다.
-오랜만이지?
-난 아직도 니가 용서가 안돼.
로 시작한 영화는,
-그게 정말 괴로움인지,아니면 있지도 않은 괴로움인지,네 안을 잘 들여다 봐.
-아직도 넌 내가 밉니?
-미운 감정도 관심이 있을 때 생기는 감정이야.
를 거쳐,
-이제 그만 지지고 볶으러 집으로 가자.
에 이른다.
"세상 길은 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진리는 덤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영화를 백퍼센트 이해한다고는 못하겠다.
하나는 왜 7년동안 전화번호를 못 바꿨을까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꿈이 아니라 실제상황에서 등장하는 소를 찾아 다니는 父子였다.
만약 자기마음의 본성이나 견성을 찾으려 들었다면,차근히 그 길을 따라 걸어줬어야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쓰윽 지나간다.
'물 흐르듯이'라고는 못하겠다.
중간중간 가위질을 엄청 많이 한 영화를 보는 것 처럼 내용이 중간중간 뚝뚝 끊긴다.
(김도연의 원작은 어떨까?찾아 읽어봐야겠다.)

하지만,나는 선호를 시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술이 취해 자기집 똥개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
소를 닦이고 소를 치료하고 소와 대화를 나누고 꿈마저 공유하는 남자,
선호에겐 소가 詩이고,그가 소를 대하는 마음이 시를 대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렇게 애틋한 마음을 못 보았다.
살면서 사람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때도 있으니,
동물과 의사소통이 된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 일지도 모른다.
누구면 어떻고,
그게 생물이면 어떻고 무생물이면 어떤가 말이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면 의미가 되는 것이다.
들꽃이면 어떻고 바람이면 어떠랴.
꿈이면 어떻고 생시이면 어떠랴.
소는 그걸 다 되새김질 하느라고 위를 4개씩이나 가지고 어슬렁 거리는 거 겠지만,
사람은 일일이 다 되새김질 하다가는 홧병 걸려 죽기 십상이다.
그러니 되새김질은 적당히 할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은 것들에 너무 큰 가치부여를 하고 살기엔,남아있는 날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