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최승호

붉은 토마토를 먹은 내 몸뚱이가 거대한 토마토로
변신하지 않는 것은 토마토가 나를 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토마토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
하루종일 먹어댔다.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먹는 일에만 탐닉한 하루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의 과음을 핑계삼아 주스를 한 병 들이켜고
새로 밥 지어 시어터진 열무김치와 더불어 한 그릇을 비우고
커피 마시고 녹차 마시고 또 물 마시고
"야, 어디 갈래?"
동생에게 전화 걸어 괜히 들쑤셔 놓은 뒤
우린 모두 함께 오이도로 출발했다
내일이 휴일이라 그런지 도로 위엔 온통 차들..
꽉 막혀 가는 길이 참으로 더뎠다.
기껏해야 40분 거리를..

배고파 배고파 밥줘를 연발하는 아이들 입에 새우깡으로 막음을 하고
식당에 엉덩이를 걸치기가 무섭게 칼국수를 주문하고
조개구이도 大자를 시켰다.
세수대야만큼 많이 나오는 칼국수를 다 먹고
조개구이에 소주도 두 병이나 마시고 그래도 모자라 다시 小자로 주문.
그것마저 다 먹고
더 이상 들어갈 구석 없다고 배 두드리며 나오다가
"엄마? 산에 다녀오셨다구요? 저녁 하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엄마, 아빠까지 차에 싣고(?) 이번에는 버섯샤브샤브를 먹으러 갔다
배불러서 안 먹을 것 같던 사람들이 메뉴가 바뀌자
먹었던 기억도 사라지는지 잘도 먹는다.
배불러서 못 먹는다니까 하면서 사이다도 한 컵 마시고
커피 들어갈 데 없어 하면서도 커피 한 사발도 들이켰다.

아직도 소화가 덜 되었다.
이대로 자면 내일 아침 볼만 할 터이다.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고 내가 음식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음식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내가 그들을 먹은 탓이다. 음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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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냐고
-이성복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여기가 어디냐고?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
서점에 가는 일은 참말로 행복한 일이다.
서가에 줄지어 꽂혀 있는 책이 다 내 책은 아니로되,
보고 있는 동안은 모두 내 책이 될 수 있음이니.

문학과 지성사의 시편들은 모두 한결같다.
캐리커쳐를 사용하는 것하며 겉표지의 모양까지
그래서 더 정겨운 지도 모른다.
시집을 산 게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지
괜히 마음 찔려하며 이것저것 눈으로 훑어보는데
어김없이 아는 책에만, 아는 작가에만 눈이 가는 것이다.
반가운 이름들에 한 번씩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275번.. <아, 입이 없는 것들>을 꺼냈다.
첫 장을 열면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라는 시인의 말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여기서 무릎 한 번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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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이성복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
아주 어린 목소리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다.
누구냐고 물으면 조그맣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순식간에 엄지손가락이 입속으로 들어가고
내 몸은 점점 움츠러져 태아와도 같은 자세가 된다.
어린 양하는 폼이 아주 역겹다.

나이도 많은 주제에 덜 들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폼도 우습다.
이 나이에 아줌마라고 불리는 게 당연하거늘
누가 아줌마라고 부를라치면 뒤돌아보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모습에
쓴 웃음이 날 지경이다.
왜 이렇게 유치해지는가
누가 날 이렇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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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경은
-이성복

어떤 풍경은 늦게 먹은 점심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있다
주먹으로 누르고 손가락으로 쑤셔도
내려가지 않는 풍경,
밭 갈고 난 암소의 턱에서
게 거품처럼 흐르는 풍경,
달리는 말 등에서, 뱃가죽에서
뿜어나오는 안개 같은 풍경,
묶인 굴비 일가족이 이빨 보이며
노래자랑하는 풍경,
어떤 밤에는 젊으실 적 어머니
봉곳한 흰 밥과 구운 꽁치를
소반에 들고 들어올 것도 같지만,
또 어떤 대낮에는 ‘시집 못 간
미스 돼지‘라는 돼지갈비집 앞에서
도무지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워지는 풍경,
갈비 두 대와 된장찌개로 배를 채우고
녹말 이쑤시개 혀끝으로 녹여도 보는 풍경,
그러나 또 어떤 풍경은 전화 코드 뽑고
한 삼십 분 졸고 나면 흔적이 없다

***
“우리 어디 갈까?”
“어디?”“그냥 아무데나....동막 갈까?”
“그래. 각자 짐 싸들고 만나기로 하지 뭐.”
그렇게 모의는 이루어졌다.
동생과 나는 각자 가방 하나 씩을 뒷좌석에 던져두고
애들도 짐짝처럼 뒷좌석에 던져두고
길거리에서 제부를 픽업해서(“야, 타! 한 번 해봤다) 동막으로 떠났다.
어둠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완벽하게 거리를 제압하는 줄 몰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표지판을 보고 찾아 가는 길.
빙 돌아 제일 먼 길로 하여 우린 동막에 도착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민박집들이 거북해서 무작정 더 올라가본 그곳에서
아주 운치 있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거기도 민박집이란다.
베란다 문을 열고 보니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참 좋다.

갈매기 우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처음이지 싶다.
봄볕이 하도 따뜻해서 갯벌을 걸어다니는데도 춥지 않다.
물은 다 빠져서 멀리에서만 반짝였지만
군데군데 웅덩이를 보며 물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몸이 어찌나 큰지 송아지 보는 듯 했는데
이 녀석 물을 좋아하는지 주인이 부르는 것도 못 들은척
혼자 신나서 이리저리 풀썩거린다.
어김없이 '나 잡아봐라' 족들이 보이고
핸드폰에서부터 디카까지 카메라라고 생긴 건 몽땅 들이대며
증명사진들을 박고 있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왔다.

아직도 이런 풍경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몽땅 꺼내 햇볕을 다시 쪼여줄 수도 있는데
자꾸만 한 쪽 다리를 붙잡는 풍경은
싸움 구경하던 일이다. 점잖게 생긴 양반들이 서로 밀치고 당기던 풍경이다.
내가 다 부끄러워지던 풍경이다.

동막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전등사에도 올라갔다.
대나무 흔들리던 마당에서 차를 마셨다.
경내에 있는 찻집이라 꽤 운치가 있었는데
바람이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니 풍경이 댕그렁 화답하더만
그 풍경 꺼내 들고 와 바람 좀 불어주십사 부탁하고
싸움꾼들 앞에 그거 들려주면 조금쯤 정신이 맑아지려나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주말에 본 내 풍경을 꺼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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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안도현

군내 버스 때 절은 좌석 덮개 뒤에다
나도 삐뚤삐뚤
싸인펜으로 쓰고 싶다

애인 구함
나이: 16세
성격: 명랑 쾌활
TEL: 353~2698
많은 연락 바람
기다릴게요

**
나이: **세
성격: 소심, 삐뚤어짐, 지극히 부정적임.
아참 결혼도 했음
그래도 사귀고자 하는 사람은 연락바람
후후
이렇게 써서 붙이면 나더러 미쳤다고 할테지
가끔 이렇게 잠이 안 오는 밤에는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더러 나는 법이다

정말이지 열 여섯이라는 나이로 돌아가버렸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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