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

보통은 '나'에 대한 소개를 하기 마련이지만

가끔씩은 '남'을 관찰해보고 소개를 대신 해주는 것도 좋다.

어제, 나를 너무나 잘 아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에 관한 것을 보고받았다.

나 스스로는 굉장히 주제 파악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모르는 부분도 많아서

사각지대를 못 보는 운전자와 비슷하더군.

 

그 친구가 한 말 중에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 건

'당신은 이제 왜 라고 묻고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제 나니까 라고 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입니다.'

 

그래, 어쩌면 나도 자해공갈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스스로에게 변상을 요구하는 바보같은 자해공갈단.

이제 그런 짓은 그만 두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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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 또 봄

          -김명인

 

저도 한 무늬라고

봄 바다가 펼쳐놓은 화판 위로

황사 바람 며칠째 객토를 싣고 들이닥치는데

이 욕설 어디다 부릴까, 육지 쪽으로

거품 물고 몰려가는 파랑 좇아

나 또한 버릴 生이 있다는 듯

멀건 낮달로나 간다. 봄은, 추억의 하역에만

몇 개 섬들이 생겨나리라.

저 수위 휘젓다 못해 구차한 흙덩이

황해 온통 이녕으로 끓이는데, 착시 탓인지

갈매기 몇 마리 경적 높이에서 사라진다. 또 봄!

출렁거리는 멀미 진흙에 섞으면

어떤 무늬 수평 저쪽까지

너울대며 번져갈까.

 

********

봐주는 것처럼, 내 건강을 챙겨주는 척 하며

슬쩍 마스크 뒤집어 씌우려는 봄.

별 수 없잖아. 불어오는 바람을 어떻게 막겠어.

싫어. 화장 지워지잖아. 그냥 내 폐 속에 먼지 좀 넣어주고 말지.

그래. 지금 나무를 열심히 심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하루에 10년치 씩 자라는 것도 아니고

국경에 유리막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일 테니

그저 내가 오는 한 징후로 느긋하게 받아들이던가.

아주 징그러울 정도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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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 신경림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러운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

그닥 잘 하는 놀이는 아니지만

가끔 포켓볼을 치러 당구장에 가게 되면,

음침한 가운데 보라색, 재색, 파란색, 빨간색, 녹색을 두른

당구대 위에 전등 세 개가 흔들리면서 색을 더욱 묘하게 만들어

평소보다 훨씬 근사한 빛깔로 내 시선을 붙잡는데,

기분 좋게 보라색이나 빨간색을 골라서 가보면

멀리서 봤을 때 느꼈던 그 빛깔을 절대 만날 수 없다.

멋으로 당구대 위에 담배를 올려놨다가

재가 떨어지면서 생긴 시커먼 구멍들과

당구알들이 굴러다니면서 이리저리 쓸어

본디 색깔이 나오려는 빛바랜 천들이

좋았던 기분을 급속도로 떨어지게 만든다.

숨어 있을 때 아름다운 색이었던 것을 내가 잊은 탓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부분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요즘 너무 드러내면서 살았다.

특히 아무 것도 채워진 게 없으면서 드러내는 것은

빈 소리 요란한 깡통이다.

경박하다.

얼룩이 드러나지 않도록,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어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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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아코디언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62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황사 또 봄

          -김명인

 

저도 한 무늬라고

봄 바다가 펼쳐놓은 화판 위로

황사 바람 며칠째 객토를 싣고 들이닥치는데

이 욕설 어디다 부릴까, 육지 쪽으로

거품 물고 몰려가는 파랑 좇아

나 또한 버릴 生이 있다는 듯

멀건 낮달로나 간다. 봄은, 추억의 하역에만

몇 개 섬들이 생겨나리라.

저 수위 휘젓다 못해 구차한 흙덩이

황해 온통 이녕으로 끓이는데, 착시 탓인지

갈매기 몇 마리 경적 높이에서 사라진다. 또 봄!

출렁거리는 멀미 진흙에 섞으면

어떤 무늬 수평 저쪽까지

너울대며 번져갈까.

 

********

봐주는 것처럼, 내 건강을 챙겨주는 척 하며 슬쩍 마스크 뒤집어 씌우려는 봄.

별 수 없잖아. 불어오는 바람을 어떻게 막겠어.

싫어. 화장 지워지잖아. 그냥 내 폐 속에 먼지 좀 넣어주고 말지.

그래. 지금 나무를 열심히 심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하루에 10년치 씩 자라는 것도 아니고

국경에 유리막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일 테니

그저 내가 오는 한 징후로 느긋하게 받아들이던가.

아주 징그러울 정도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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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미친' '미친다' '미쳐' 같은 말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라고 손가락질 받는 일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를,

이 세상에서 안 미친 사람(= 정상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산다는 일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떠올렸다.

동시에 별로 호감 가지 않았던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결국 이들도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날이 선 생각들이 조금씩 무뎌졌고

그들이 쓴 책, 혹은 그들을 평가한 책들에 호기심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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