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에 대하여

-장석남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

이 시인이 65년 생이니까

우리랑 비슷한 연배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내 생각과 맞아 떨어진다

 

어제, 퇴근길에 교보문고에 잠깐 들렀다가

늘 먼저 눈길을 주던 신간소설 코너에서 눈을 돌려

시집코너에 가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거기, 장석남의 시집이 맨 끝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원래 시 열 편 정도는 읽어봐야 골라들고 나오는데

어제는 이 시 한 편으로 결정했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라니..기막히다. 정말..

 

내 얼룩은 어떨까?

내가 여태 만들어온 얼룩은 행여 너무 추하지는 않을까

보기 싫도록 악취나도록 힘들어 보이는 얼룩은 아닐까

앞으로는 어떤 얼룩을 남기게 될까

이런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내 앞으로의 얼룩은

누군가가 가만히 쓸고 지나가도 향기가 남는

누군가가 자꾸만 만지고 싶어지는 그런 얼룩으로

만들어야겠는데..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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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이라..

딱딱해진 하얀 길.

 

아스팔트는 차가 지나다니기 좋은 길이고

내가 좋아하는 길은 먼지 풀썩이는 흙길이거나

시멘트를 부어서 밤이 되면 하얗게 빛나는 그런 시골길이다.

언제였던가

다른 곳은 어슴푸레한 밤 기운이 가득한데

짐승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

보안등이 좁게 비추어 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는

하얀 시멘트길이 너무나 유혹을 해서

그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만 싶었다

 

다음 번엔 용기를 내어 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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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딸만 넷.

지금은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옛 기억을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사진으로 버젓이 남아 있는 증거물에 의하면 내 머리카락은 늘 짧았다.

심지어 어떤 때는 사내아이의 그것처럼 바짝 잘라 여자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거라곤

입고 있는 치마 덕분일 경우가 더 많았다.

그에 반해 우리 언니는 항상 머리카락이 길어 양갈래로 땋거나 긴 머리 위로 멋진 모자를 쓰고 있기 일쑤였고,

내 밑에 바짝 줄을 선 동생도 나와 같은 처지여서 짧은 머리카락,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는 막내동생은 언니와 똑같은 스타일의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여자아이 네 명의 머리를 아침마다 빗겨서 학교에 보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중간에 끼인 우리 둘은 항상 머리카락이 짧았고 그 때문에 나는 변변하게 핀 한 번 꼽아본 적이 없이

이 나이를 먹게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날 지배한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기를라치면 이 머리카락들을 어떻게 정리해줘야 될 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그만 내 성질을 못 이겨 미용실로 달려가 이제 막 어깨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머리카락들을

죄다 싹둑싹둑 잘라버리니 여간해서는 긴 머리카락을 갖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봄바람에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휘날리며 걷고자 했던 바람은 결국 오늘 또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런 사태의 원인제공자인 엄마한테 한 번 따져봐?

나도 어릴 때 머리카락을 좀 길러줬으면 좋잖아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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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 사이에는

-신경림

철물점 지나 농방 그 건너가 바로 이발소,

엿도가에 잇대어 푸줏간 그 옆이 호떡집, 이어

여보세요 부르면 딱부리 아줌마 눈 부릅뜨고

어서 옵쇼 내다볼 것 같은 신발가게.

처음 걷는 길인데도 고향처럼 낯이 익어.

말이 다르고 웃음이 다른 고장인데도,

서로들 사는 것이 비슷비슷해 보이고.

 

그러다 내 고장에 와서 나는 남이 된다,

큰길도 골목도 달라진 게 없는데도.

너무 익숙해 들여다보면 장바닥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로 가득하고,

술집은 표정 모를 얼굴들로 소란스럽다.

말이 같고 몸짓이 같아 외려 낯이 서니

서로들 사는 것이 이렇게도 다른 걸까.

 

나와 세상 사이에는 강물이 있나보다.

먼 세상과 나를 하나로 잇는 강물이, 그리고

가까운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

***

며칠 전 상갓집에 다녀왔다.

들어가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상주에게 맞절을 하는 것까지야 갖춰진 형식이니 따라하면 그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 마음을 다독일 방법을 몰라 괜히 어정거리다가 어쩔 줄 모르고

혼자 지레 얼굴 붉히고 서서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그곳 찾기는 정말 꺼려지는 일이다.

이번에는 그런 감정에 더하여 거북스럽고 불안한 마음까지 드는 게 나 스스로도 이상했는데

따져보니 내 주위에 나이가 제법 지긋한 어르신들이 계신 탓이었다.

조만간 내게 그런 일을 치뤄야 한다는 압박감이 무섭게 다가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낙타>를 꺼내 쭈욱 훑어보고 있노라니

얹혀서 안 내려가는 체증처럼 쌓였던 두려움들이 한 줌씩 사그라들더니

지금은 흔적만 가늘게 남겨둔 상태로 변해버렸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이신 선생님의 달관한 듯한 시가 나를 다독인다..

에너지의 변환일 뿐이지만 윤회는 계속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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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별 글쓰기 - 전국국어교사모임 현장수업 실천사례 2
반숙희 외 지음 / 나라말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알차게 잘 꾸며놓은 책이지만 갈래별 글쓰기라고 해서 무턱대고 골랐다가 낭패를 봤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쓸 수 있는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중학생 이상 되는 친구들과 수업을 할 때 쓰면 딱 좋을 만한 책이다.

게다가 일선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수업을 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중간중간 가져다 쓸 만한 보기글도 많고 뒷 부분에 부록으로 제시되어 있는

쓰기 글감표, 쓰기활동계획표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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