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냐고
-이성복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여기가 어디냐고?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
서점에 가는 일은 참말로 행복한 일이다.
서가에 줄지어 꽂혀 있는 책이 다 내 책은 아니로되,
보고 있는 동안은 모두 내 책이 될 수 있음이니.

문학과 지성사의 시편들은 모두 한결같다.
캐리커쳐를 사용하는 것하며 겉표지의 모양까지
그래서 더 정겨운 지도 모른다.
시집을 산 게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지
괜히 마음 찔려하며 이것저것 눈으로 훑어보는데
어김없이 아는 책에만, 아는 작가에만 눈이 가는 것이다.
반가운 이름들에 한 번씩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275번.. <아, 입이 없는 것들>을 꺼냈다.
첫 장을 열면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라는 시인의 말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여기서 무릎 한 번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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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이성복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
아주 어린 목소리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다.
누구냐고 물으면 조그맣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순식간에 엄지손가락이 입속으로 들어가고
내 몸은 점점 움츠러져 태아와도 같은 자세가 된다.
어린 양하는 폼이 아주 역겹다.

나이도 많은 주제에 덜 들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폼도 우습다.
이 나이에 아줌마라고 불리는 게 당연하거늘
누가 아줌마라고 부를라치면 뒤돌아보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모습에
쓴 웃음이 날 지경이다.
왜 이렇게 유치해지는가
누가 날 이렇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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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경은
-이성복

어떤 풍경은 늦게 먹은 점심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있다
주먹으로 누르고 손가락으로 쑤셔도
내려가지 않는 풍경,
밭 갈고 난 암소의 턱에서
게 거품처럼 흐르는 풍경,
달리는 말 등에서, 뱃가죽에서
뿜어나오는 안개 같은 풍경,
묶인 굴비 일가족이 이빨 보이며
노래자랑하는 풍경,
어떤 밤에는 젊으실 적 어머니
봉곳한 흰 밥과 구운 꽁치를
소반에 들고 들어올 것도 같지만,
또 어떤 대낮에는 ‘시집 못 간
미스 돼지‘라는 돼지갈비집 앞에서
도무지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워지는 풍경,
갈비 두 대와 된장찌개로 배를 채우고
녹말 이쑤시개 혀끝으로 녹여도 보는 풍경,
그러나 또 어떤 풍경은 전화 코드 뽑고
한 삼십 분 졸고 나면 흔적이 없다

***
“우리 어디 갈까?”
“어디?”“그냥 아무데나....동막 갈까?”
“그래. 각자 짐 싸들고 만나기로 하지 뭐.”
그렇게 모의는 이루어졌다.
동생과 나는 각자 가방 하나 씩을 뒷좌석에 던져두고
애들도 짐짝처럼 뒷좌석에 던져두고
길거리에서 제부를 픽업해서(“야, 타! 한 번 해봤다) 동막으로 떠났다.
어둠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완벽하게 거리를 제압하는 줄 몰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표지판을 보고 찾아 가는 길.
빙 돌아 제일 먼 길로 하여 우린 동막에 도착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민박집들이 거북해서 무작정 더 올라가본 그곳에서
아주 운치 있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거기도 민박집이란다.
베란다 문을 열고 보니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참 좋다.

갈매기 우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처음이지 싶다.
봄볕이 하도 따뜻해서 갯벌을 걸어다니는데도 춥지 않다.
물은 다 빠져서 멀리에서만 반짝였지만
군데군데 웅덩이를 보며 물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몸이 어찌나 큰지 송아지 보는 듯 했는데
이 녀석 물을 좋아하는지 주인이 부르는 것도 못 들은척
혼자 신나서 이리저리 풀썩거린다.
어김없이 '나 잡아봐라' 족들이 보이고
핸드폰에서부터 디카까지 카메라라고 생긴 건 몽땅 들이대며
증명사진들을 박고 있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왔다.

아직도 이런 풍경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몽땅 꺼내 햇볕을 다시 쪼여줄 수도 있는데
자꾸만 한 쪽 다리를 붙잡는 풍경은
싸움 구경하던 일이다. 점잖게 생긴 양반들이 서로 밀치고 당기던 풍경이다.
내가 다 부끄러워지던 풍경이다.

동막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전등사에도 올라갔다.
대나무 흔들리던 마당에서 차를 마셨다.
경내에 있는 찻집이라 꽤 운치가 있었는데
바람이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니 풍경이 댕그렁 화답하더만
그 풍경 꺼내 들고 와 바람 좀 불어주십사 부탁하고
싸움꾼들 앞에 그거 들려주면 조금쯤 정신이 맑아지려나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주말에 본 내 풍경을 꺼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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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안도현

군내 버스 때 절은 좌석 덮개 뒤에다
나도 삐뚤삐뚤
싸인펜으로 쓰고 싶다

애인 구함
나이: 16세
성격: 명랑 쾌활
TEL: 353~2698
많은 연락 바람
기다릴게요

**
나이: **세
성격: 소심, 삐뚤어짐, 지극히 부정적임.
아참 결혼도 했음
그래도 사귀고자 하는 사람은 연락바람
후후
이렇게 써서 붙이면 나더러 미쳤다고 할테지
가끔 이렇게 잠이 안 오는 밤에는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더러 나는 법이다

정말이지 열 여섯이라는 나이로 돌아가버렸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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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란 말인가
-이성복

한 잎의 결손도 없이
봄은 꽃들을
다 불러들인다
해 지면 꽃들의
불안까지도

하지만 뭐란 말인가,
저렇게 떨어지고 밟혀
변색하는 꽃들을
등불처럼 매달았던
봄의 악취미는?

****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아직도 약간 쌀쌀함을 느낀다.
맨 다리가 드러난 짧은 바지 위로 숄을 덮어주어야 할 만큼.
답답해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가 다시 닫는 그 순간에
나무들이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자목련과 꽃사과나무, 벚나무. 하나는 이름을 모른다.
늘 봐오던 풍경임에도 이름을 몰라 불러줄 수 없음이 안타깝다.
꽃사과는 하얀 꽃이 몽글몽글 피어 제법 귀여워 보이고
벚꽃은 이미 다 피었다가 벌써 지고 잎이 나기 시작했다.
자목련은 처참하다. 어릴 때 축구하다 걷어채인 허벅지 상처처럼
시커먼 멍을 달고 바람이 떨구어 땅으로 떨어뜨려주길 기다리고 있다.
꼭대기에 딱 두 개. 짧은 치마 입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의 뒷모습같은
상큼한 녀석도 있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멘트인 그 마당에
자목련이 아무렇게나 가래침을 퉤퉤 뱉어놓았다
치워버리지..보기 싫다.
버려진 꽃들은 보기 싫다.
나무가 다시 흡수해버릴 수는 없는 건가
그럼 굉장한 장관이 될 것 같다.
필름을 다시 돌리는 느낌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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