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발이

-신경림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은,

 

어느 때부턴가는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

두엄더미 퀴퀴한 냄새를 되찾아 나서면서

싸리문 흔들던 바람을 되찾아 나서면서.

그러는 사이 나의 신발은 너덜너덜 해지고

비바람과 흙먼지와 매연으로

누렇게 퇴색했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아직도 세상 사는 물리를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퀴퀴하게 썩은 냄새 속에서.

 

이제 나한테서도 완전히 버려져

폐기물 처리장 한구석에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버려진 신발짝들에 뒤섞여

나와 함께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은 살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 년에 한 번, 봄을 맞아 내 인생을 새롭게 꾸며갈 수도 있고

매일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좋으냐.

 

얌전하게 내려앉은 먼지를 다 닦아 내고 일년내내 거들떠보지 않은 것들을

한꺼번에 추려 버리는 일을 하느라 하루종일 발을 동동거렸다.

필요할 것 같아서 욕심껏 갖고 있었던 자료들을 버리면서

무엇 하나 쉽게 쓰레기통으로 직행시킬 수 없었던 건 역시,

그걸 찾으면서 혹은 그걸 갖게 되면서 내가 가졌던 희열이 다시 떠올라서다.

그러면서도 10L짜리 쓰레기 봉투를 하나 가득 채우고, 재활용 박스를 두 개 정도 채우고 나니

어느 정도 내가 원했던 모양새가 갖춰진다.

이렇게 버려도 내년이면 또다시 이 짓을 반복하겠지만,

이 공간을 채우는 동안 나는 행복할 것임을 안다.

쇠가 바닥에 닿아 거슬리다가도 굽을 갈고 나면 누군가 신발을 감싸안아 발을 옮겨 주는 것처럼

바닥과의 마찰이 부드럽고 행복하게 느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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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 서대석 엮음, 신동흔 외 85명 지음/ 휴머니스트, 각 권 1만 5천원

뭐 좀 독특하고 재미난 우리 이야기가 없을까..한동안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녔는데

마침내 내가 찾던 게 나왔다.

4권이나 되니 책값이 엄청나지만, 그게 가져다 줄 즐거움을 미리 당겨 쓰고 있으니

비싸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석숭, 방학중, 민옹, 삼족구, 덴동어미 같은 생소한 인물까지  85명을

우리시대 내노라하는 고전문학계의 대표적인 연구자들이 새롭게 발굴하거나

재해석했다고 하니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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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닮은 아이 웅진책마을 18
오카 슈조 지음, 고향옥 옮김, 카미야 신 그림 / 웅진주니어 / 200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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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슈조의 또다른 작품인 <나는 입으로 걷는다>가 굉장히 유쾌하고 밝게 그려졌다면,

이 책은 조금 무겁고 ,생각을 왜 안 하느냐고 빨리 해보라고 자꾸만 채근하는 느낌을 준다.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글들이라 그런지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다다시'나 '뎃짱' '지로' 모두

얼마나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들인지를 가슴 절절하게 느끼게 해준다.

말은 안 통하고 무얼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이지만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작가는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휠체어와 빨간 자동차>의 경우에서는 이렇다 저렇다 섣부른 결말을 내기보다는

'자, 어떠냐. 지금 이런 것이 현실이 아니냐?' 라고 말하듯

장애가 있는 다치바나를 여러가지 면에서 못마땅해하는 어른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부터 출발해야 함께 어울려 살 길도 찾을 수 있을 테니

다다시나 뎃짱의 뒤를 조용히 따라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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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식 - 박정만

묵은 밭을 일구듯
내 속뜰을 다시 경작합니다.
스스로를 텅텅 비웁니다.
텅텅 비워 버려야
새로운 메아리가 울려옵니다.
소리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묵묵히 앉아서
안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며칠 전부터
숲에서는 휘파람새가 울고
구구구구 산비둘기 우는 소리도 들립니다.
밤으로는 무당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들립니다.
잠든 숲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촉촉히 봄비가 내리는데 올봄 내 뜰에는
매화꽃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간밤 갑자기 몰아닥친 설한풍에
꽃망울이 죄다 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
아침부터 박정만이라는 시인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속으로'
이거 기억하시나요?
그 유명한 종시입니다.
이렇게 멋진 종시를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시인
그의 쓸쓸한 어깨가 생각나는 음울한 날씨.
필화사건에 얽혀 허무한 죽음을 한 그 사람
사람보다 죽음이 먼저 생각나는 그 시인. 박정만
92년 1월. 석바위에서.
첫장 뚜껑에 이렇게 씌여있습니다.
한동안 죽음 냄새 가득한 그의 시에 빠져 지내던 시절이지요.
비가 내려서일까요?
오늘, 그의 이름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나는 사라진다.
언제쯤 나는 이렇게 사라질 수 있으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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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墨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
사람들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장석남의 이런 시풍을 좋아합니다
번진다.. 이 말을 꽤 오랫동안 입안에서 굴려봤어요
어감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의미심장하죠?
내 열정이 번져 아이들을 바꾸기도 하고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번져 다른 사람을 아프게도 하고
슬픔이 번져 죽음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도 하고
사랑이 번져 세상을 아름답게도 합니다

내가 뻗은 팔과 다리와 온 몸에 난 촉수들은
어디를 향해 번지고 있는 중인지.
혹여 남을 싫어하는 마음과 미움, 질투, 시기들이
사랑을 제쳐두고 저만 앞서 번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차분하게 앉아 먹물 곱게 갈고
화선지 가득 먹빛이 우아하게 번지는 걸 보고 싶습니다.
어둠이 그렇게 번지고 있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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