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 - 1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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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책제목 : 토지 1부 2권

◎ 지은이 : 박경리

◎ 펴낸곳 : 나남

◎ 2008년 1월 3일 17쇄, 400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2권의 소제목으로 나는 '가엾은 남자 최치수'를 붙이고 싶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자랐고 그러느라 성정이 비뚤어진 남자. 성마르고 차가운 남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 남자가 허망하게도 죽었다. 구천이와 함께 달아난 아내를 좇기 위해 강 포수와 함께 산으로 돌아다녔으면서도 그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고, 좋은 마음으로 강 포수가 돈보다 더 원한 귀녀를 짝지워주려다 죽었다.

최치수의 아이를 가져 한 몫 단단히 챙겨보려던 귀녀는 칠성의 씨를 받아 애를 배는 데는 성공했으나 최치수가 강 포수와 짝을 지어주려 하자 쫓겨나기 전에 그를 해치우기로 한다. 함께 일을 공모했던 평산이 귀녀의 청을 받아 그를 교살했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또출네가 시체가 있는 누각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묻힐 뻔 했으나 들통이 났다.

'윤씨부인은 끊임없이 매질을 하던 형리(刑吏)를 잃었다. 생전의 최치수는 아들이 아니었으며 가혹한 형리였던 것이다. 그것을 윤씨 부인이 원했으며 또 그렇게 되게 만든 사람이 윤씨 부인이다.' (385쪽)

-구천이 별당아씨와 달아난 후 치수는 사람을 시켜 좇으려면 좇을 수도 있었다. 왜 좇지 않았는지, 치수는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소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증오, 보복,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사실을 구명하고자 하였고 또 구명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62쪽)

-'날이 새고 햇빛이 저 석류나무를 비춰도 소인이야 어디 갈 곳 있습니까? 이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억겁이 가도 소인은 이렇게 꼼짝없이 불사신 아닙니까. 강철로써도 끊을 수 없고 초열지옥의 화염으로써도 태울 수 없고 한빙으로써도 얼어붙게 할 수 없는 영원불멸이오. 아시겠습니까, 소인은 시각이요 세월이외다. 아시겠습니까?' '알다마다, 알다마다! 자넨 세월일세. 자네는 불사신이라 했겄다? 옳아, 헌데 나는 지금 자넬 잡아먹고 있지 않느냐? 일각 일각을 잡아먹고 있다 하겠지? 우리 그러지 말구, 자네는 자네대로 나는 나대로 숨을 쉬지 않겠느냐? 따로따로, 자넨 자네, 나는 나일세.'(194~195쪽)

-산에 와도 사냥꾼이 못 되고 마을에 가도 사내가 못 되고 서원에 들어서도 학자가 못 되고 만석꾼 땅문서는 있되 장자(長者)가 못 되고 어머님이 계셔도 아들이 못 되고 자식이 있어도 아비가 못 되고 계집이 있을 때도 지아비가 못 된 위인이 개화당이 되겠습니까, 수구파가 되겠습니까, 가동들을 거느린 의병대장이 되겠습니까. 신선이 못 되면 허깨비라도 되어야겠습니다만 무엇에 미쳐서 허깨비가 되오리까. 그럼에도 잡사(雜事)를 잊지 못하니…….(304쪽)

이런 마음을 갖고 사는데 사는 게 무에 그리 즐거울까. 딸에게조차 인자한 아버지가 되지 못한 최치수는 '밖만 싱그러우면 마음속의 쓰레기는, 자기만이 아는 쓰레기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344쪽) 귀녀와는 다르게 자기만이 아는 쓰레기로 마음속이 시끄러워서 숨조차 쉴 수 없는 사내였던 것이다.

김개주가 윤씨 부인을 겁탈하는 일만 없었더라면 최치수가 차가워진 어머니와 멀어져 그리 불쌍하게 크는 일도, 그래서 인생이 배배꼬일 일도, 구천이가 어미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 별당아씨와 도망자 신세가 될 일도, 윤씨 부인이 자애로운 어머니를 포기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김개주는 죽었지만 (사실 죽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지만) 성폭력자들은 최고로 중한 벌을 주어야 한다. 화가 난다, 화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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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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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책제목 : 토지 1권

◎ 지은이 : 박경리

◎ 펴낸곳 : 나남

◎ 2008년 1월 3일 17쇄, 41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우리의 계획은 이러하다. '2주마다 한 권씩 읽고 다 읽은 다음 평사리로, 구례로 여행을 간다.' 그것이 올바른 여행이 되기 위해서 제대로 읽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의 시기도 알맞아야 했다. 단풍철이 되어 사람이 북적이는 것도 피해야 하고, 너무 추워서 옹송그리고 다니느라 제대로 돌아볼 수 없는 날들도 피해야 했다. 그래서 내년부터가 아닌 12월말이 시작점이 되어 10월 7일로 끝을 맺는 계획표가 만들어졌다.


 


이 책을 사들인 2008년에 나는 이미 21권을 다 읽었지만 다른 책들이 중간에 마구 끼어들었기에 거의 1년 가까이 걸렸던 걸 기억한다. 이젠 출판사가 바뀌어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오는 모양인데 표지부터가 나남 책이 훨씬 마음에 든다. 양장본은 무거운 게 흠이긴 해도 보관하는 데 이만한 게 없다. (잘 샀다고 스스로 머리 쓰다듬기)

설레는 마음으로 들여다본 1권은 낯익은 얼굴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와 반갑기 이를 데 없다. 윤씨 부인, 최치수, 봉순네, 길상이, 구천, 서희, 용이, 월선이, 함안댁 등 모두 기억 속 그대로다. 이때만 해도 내 기억력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역시 하루라도 젊은 게 도움이 된다.

배경은 경남 하동의 평사리. 대를 이은 대지주 최 참판댁을 중심으로 소작인들의 역사가 펼쳐진다. 동학운동이 한 차례 지나갔고 명성왕후가 시해된 어수선한 시기. 서울과 먼 이곳에서는 은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머슴을 살던 구천이 별당아씨를 데리고 도망을 가고, 다섯 살 서희는 고집스럽게 엄마를 찾아 봉선네를 힘들게 한다. 귀녀는 최치수의 아이를 가져 신분 복귀를 꾀하는데 그 뒤에는 노름에 빠진 몰락한 양반 김평산이 있다. 동학 장군 김개주와 윤씨 부인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1권은 마무리된다.

-사방을 팽팽하게 메운 진한 어둠과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섬진강 쪽에서의 바람이 맞부딪쳐 무시무시한 격투를 벌이는 것만 같은 밤에, 가랑잎에 발목이 묻히는 잡목숲을 헤치고 구천이와 별당아씨가 어디론지 종적을 감춘 뒤 사흘만에 최 참판댁에서는 바우 할아범의 상주 없는 장례가 있었다. (80쪽)

-최 참판네도 이제 망조 들었지, 망조 들어. 내가 그놈의 집 구석 종놈한테 뺨따구를 맞아서가 아니라 사대독자에다 이제는 비리갱이 겉은 딸아아 하나니께 절손 아니가. 아무리 삼신당을 뫼셔봐야 무신 소용 있을라고.(107쪽)

-벌써 항구에는 왜놈들 장사치들이 설친다 카는데 허수애비 같은 임금 있으나마나, 총포 든 놈이 제일 아니가. 흥, 동학당이 벌떼같이 일어서도 별 수 없었는데 몇 놈이 쑥덕거리서 우짤 기라? (132쪽)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거야 두 말 하면 입 아프고, 무엇보다 경상도 사투리가 찰지다.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되지만 인천 토박이인 내가 그 맛을 낸다는 건 어림도 없다. 갑자기 외국 작품 속에서 우리나라 사투리로 표현된 부분들이 떠오른다. 굉장히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그 작가도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이런 맛일 텐데 그렇게 나타낼 수가 없으니! 그래서 원문을 읽어야 하는 거다.

-세상에 별소리를 다 듣것소. 사램이 인덕이 없일라 카이 앉아도 말이고 서도 말이고, 우째서 나만 보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잡아묵을라 카는지 모르겄구마. 사램이 버부리가 아닌 바에야 말 안 하고 우찌 살 기요. 시답지도 않는 말 가지고 꼬타리를 잡을라 카믄 한이 있겄소? (89쪽, 귀녀가 봉순네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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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 혹은 침묵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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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그들의 말, 혹은 침묵

◎ 지은이 : 아니 에르노

◎ 옮긴이 : 정혜용

◎ 펴낸곳 : 민음사

◎ 2022년 4월 14일 1판 2쇄, 202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끊어지고, 쓰다 말고, 뒤틀리고, 누구의 목소리인지 명시되지 않은 채 앞뒤 설명 없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건너뛰는,

비문의 경계에 서 있는 문장들이 엉망진창 뒤엉킨 상태로 나뒹군다. 구사하는 어휘 역시 반듯한 표준어와는 거리가 멀다.

비속어,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하는 은어, 준말.

옮긴이의 말 중에서. 199쪽

딱 이렇다.

이와 더불어 옮긴이는 이 작품의 매력이 '안의 서사 자체보다는 표면에서 진행되는 청소년의 실패한 첫사랑과 그 이면에서 이루어지는 실패한 글쓰기가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완벽한 이중주에 있다.'(199쪽) 라고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은 지루했고, 짜증나며, 거북했다. 그래도 청소년기 아이가 겪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부모에 대한 경멸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는 별 세 개를 얹었다.

-칙칙한 유년기 내내 '그것'만 생각했는데, 말짱 꽝이라면, 더구나 죽을 게 뻔했다면, 예를 들어 전쟁 통이라면,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달려들었을 거다. 학교 친구들, 정 안 되면 보조 교사 프랑수아에게라도.(15쪽)

-그녀가 뭔가 흥미로운 말을 입에 올렸던 게 대체 얼마나 오래전이었던가. 7월 초에, 먹고 자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낼 때를 제외하면, 사실상 어머니가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32쪽)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부모란 그들이 바라는 자식의 장래 모습만을 바라보며 걷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일에 대해서 그렇듯이 졸보기가 되거나, 어쩌면 그들은 눈을 뜨기까지 시간이 필요한지도. (144쪽)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처녀를 고수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그리고 사회는 부숴 버려야 해. 난 오늘과 마찬가지로 햇볕이 침대를 비추던 어느 날 그걸, 자유를 보았는데, 그 자유라는 것, 그건 코딱지만도 못한 거였나 보다. 그들 역시 규범을 갖고 있었고, 난 그걸 몰랐다. (153쪽)

-내가 찾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7월 이래로 벌어졌던 그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왜 이제는 정말로 못 참겠는지, 이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인데, 그런 내용은 애정 문제를 다루는 상담 편지에 나와 있지 않다. (167쪽)

가난한 가정의 모범생 안, 중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을 기다리고 있는 그 기간에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남자와 자볼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대학생인 마티외와 경험을 하게 되면서 그 주위를 맴돈다. 그가 자신의 친구와 만났던 것을 아는 안은 자신도 마티외의 친구인 얀과 섹스를 하면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마티외는 그녀를 남의 손을 탄 물건 취급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주인공은 집중도 못하고 수업이 어렵기만 하다. '이제는 온갖 일이 다 겁나고, 마음속에 아주 모호한 뭔가가, 마치 구름이 낀 것 같다. 작문 과제를 절대 마치지 못할 텐데, 교사는 내게 빵점을 주겠지.'(191쪽)

아니 에르노의 다음 작품『세월』이 기다리고 있는데 솔직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노벨상을 받은 작가라지만 (그래서 훌륭한 작품인 것이 입증이 되었겠으나) 내 취향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어떤 것도 내게 울림을 주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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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핑 뉴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9
애니 프루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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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시핑뉴스 The Shipping News

◎ 지은이 : 애니 프루

◎ 옮긴이 : 민승남

◎ 펴낸곳 : 문학동네

◎ 2019년 6월 10일 초판발행, 50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작년 우리 책모임 송년회에서는 2022년에 읽은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저자라는 소리에 호기심이 일었는데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해서 완전 궁금해졌다. 하지만 부글거리는 궁금증과는 별개로 연말연초에 알콜 속을 헤엄치느라 바빠서 겨우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이 책은 1994년에 처음 『항해뉴스』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왔고, 2007년에 『시핑뉴스』, 세 번째로 문학동네에서 『시핑뉴스』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모두 다른 출판사였지만 역자는 세 번 다 동일인물이란다. 번역이 상당히 매끄럽고 깔끔하다 여겼는데 세 번째로 손을 보아서 그런 모양이다.

코일(Quoyle : 밧줄 한 사리coil) 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 이름이 그래서인가. 시작부터 참 꼬인 인생이다.

'겨울멜론 같은 머리통에 목은 아예 없고 불그스레한 머리카락은 주름장식 같았다. 게다가 이목구비는 오종종하게 몰려 있었다. 비닐 빛깔의 눈동자. 얼굴 밑에서 마치 괴상한 선반이 툭 튀어나온 것처럼 흉측한 턱.'(13쪽)

어떤 문학작품속에서도 보지 못할 주인공의 외모다. 아, 노틀담의 꼽추는 빼고. 그런데 외모만이 아니다. 작가는 작심을 한듯 그를 완전히 바닥으로 끌어내려버린다. '아버지는 개헤엄을 배우는 데 실패한 막내아들의 모습에서 마치 악성 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듯 다른 실패들이 증식하는 것을 보았다. 말을 똑똑히 하는 것도 실패, 바른 자세로 앉는 것도 실패,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실패, 태도도 실패, 야망도 능력도 실패, 사실상 모든 것이 실패.'(12쪽)

이러니 세상이 그에게 녹록치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자동판매기용 사탕 배달원, 편의점 야간 근무 점원, 삼류 신문기자를 전전하다가 어찌어찌 겨우 여자를 만났으나 그녀는 다른 남자들을 만나느라 바쁘더니 애 둘을 남긴 채 자동차 사고로 죽고만다. 실직자 신세가 된 코일은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고모를 따라 조상들이 살던 곳 뉴펀들랜드로 이사하기로 결정한다.

친구 소개로 그 지방 신문사인 개미 버드에 기자로 취직한 그는 아직도 아내를 잊지 못하고 슬픔에서 허우적거리지만, '해운소식 shipping mews'란을 맡으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기사를 쓸 수 있게 된다. 천천히 그곳 생활에 적응하는 코일과 두 아이, 그리고 그들 삶으로 스며들어오다시피한 웨이비와 그녀의 아들 해리.

코일은 버릇처럼 일상에 기사 제목을 붙인다. '숙취에 시달리는 남자, 배 만드는 작업의 변수들에 대해 들어.' '흰 개를 두려워하는 소녀, 가족을 혼란에 빠뜨려' 그러다가 편집장이 된 후부터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데, 주위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던 그가 비로소 편안해지고 정착된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돌출된 제목이 아니라 내용 그 자체가 삶이 되었다고나 할까.

'이곳에서 그는 인생을 보다 깊고 분명하게 보도록 해주는 편광렌즈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모킹버그에서 너무나 우둔했던 그는 자기에게 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그러니 사랑이 그의 심장과 폐를 관통하여 내출혈을 일으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353쪽)

그 섬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코일가의 놀런 아저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건지 그런 척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코일이 사는 집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며 해로운 매듭을 만들어 주술을 건다. 그 탓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정말 큰 바람이 불어 집이 바위 위에 있던 집이 날아가버린다. 조악한 배를 샀다가 바다에 빠져죽을 뻔도 하고 집도 날아가버린 것은 태생부터 그를 옥죄었던 조상들의 사악함을 청산하는 의미로 보고 싶다.

-그렇다면 사랑은 돌아가면서 하나씩 꺼내 먹는 종합 사탕 봉지 속의 다양한 사탕 같은 것이고 우리는 사탕을 맛보듯 사랑도 이것저것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혀에 톡 쏘는 맛을 남기는 것, 밤의 향기를 일깨우는 것, 속이 쓸개처럼 쓴 것, 꿀과 독을 섞은 것, 금방 삼키게 되는 것, 그리고 평범한 눈깔사탕과 박하사탕 틈에 희귀한 것들도 섞여 있다. 독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들 한두 알과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을 주는 것. 지금 그의 손은 그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의 사탕을 집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455쪽)

부드러운 기쁨을 주는 사탕을 쥐듯 웨이비와 결혼한 코일은 아마도 행복해질 것이다. '잭 버깃이 피클단지에서 벗어났다면, 목이 부러진 새가 날아갔다면, 또 어떤 일이 가능할까? 물이 빛보다 먼저 생겼을 수도, 뜨거운 염소 피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깨질 수도, 화산이 차가운 불을 뿜어낼 수도, 바다 한가운데에 숲이 나타날 수도, 게 위로 손만 가져가도 그 손 그림자에 게가 잡힐 수도, 매듭 속에 바람이 갇힐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488쪽)

-바람의 명단에도 들어 있지 않은 지독한 바람. 무시무시한 강풍 블루너더와 블라스트와 랜드래시의 친척. 한가운데가 불그레한 작은 구름으로 시작되는 불스아이 스콜의 사촌. 북유럽의 전설에 등장하는 빈드그니르와 뉴잉글랜드 해상에 사흘간 부는 노스이스터의 시어머니. 알래스카의 윌리워와 아일랜드의 도이니온의 아저씨. 러시아의 눈雪으로 유고슬라비아의 평원을 강타하는 코샤바, 슈테펜빈트,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스텝 지역에서 불어오는 부란, 크리베츠, 시베리아의 비우가와 푸르가, 북러시아의 먀텔의 이복자매. 프렐리 블리자드와 그냥 노스윈드라고도 불리는 캐나다의 북극풍, 그린란드의 얼음 평원을 달리는 피타라크의 친형제. 이렇듯 어마어마한 세력을 지닌 저 이름 없는 바람은 예리한 금속 날처럼 바위섬을 깎아냈다. (459쪽)

저 바람을 묘사한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문장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작정 아름답게 포장하지만은 않는다. '흰 거품을 물고 기어오르는 만의 파도가 마치 큰 상처 속에서 우굴거리는 구더기떼처럼 보였다.(291쪽)' '밤사이 따스하고 향기로운 대기의 갈라진 혀가 육지에서 바다로 핥아내려가 기어오르는 얼음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녹였다.'(363쪽) '상처에서 흐르는 누런 고름 색깔의 하늘'(420쪽)

등장인물의 기분에 따라 느껴지는 분위기를 그대로 알 수 있게 만든 문장들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튀어오를 것만 같은 생생한 인물 묘사는 물론이고 배를 건조하는 부분이나, 고기잡이 어선에 관한 것들, 신문 기사의 자연스러움은 작가의 이력과 철저한 자료조사 덕분일 텐데, 그리 자연스레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싶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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