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이 별당아씨와 달아난 후 치수는 사람을 시켜 좇으려면 좇을 수도 있었다. 왜 좇지 않았는지, 치수는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소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증오, 보복,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사실을 구명하고자 하였고 또 구명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62쪽)
-'날이 새고 햇빛이 저 석류나무를 비춰도 소인이야 어디 갈 곳 있습니까? 이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억겁이 가도 소인은 이렇게 꼼짝없이 불사신 아닙니까. 강철로써도 끊을 수 없고 초열지옥의 화염으로써도 태울 수 없고 한빙으로써도 얼어붙게 할 수 없는 영원불멸이오. 아시겠습니까, 소인은 시각이요 세월이외다. 아시겠습니까?' '알다마다, 알다마다! 자넨 세월일세. 자네는 불사신이라 했겄다? 옳아, 헌데 나는 지금 자넬 잡아먹고 있지 않느냐? 일각 일각을 잡아먹고 있다 하겠지? 우리 그러지 말구, 자네는 자네대로 나는 나대로 숨을 쉬지 않겠느냐? 따로따로, 자넨 자네, 나는 나일세.'(194~195쪽)
-산에 와도 사냥꾼이 못 되고 마을에 가도 사내가 못 되고 서원에 들어서도 학자가 못 되고 만석꾼 땅문서는 있되 장자(長者)가 못 되고 어머님이 계셔도 아들이 못 되고 자식이 있어도 아비가 못 되고 계집이 있을 때도 지아비가 못 된 위인이 개화당이 되겠습니까, 수구파가 되겠습니까, 가동들을 거느린 의병대장이 되겠습니까. 신선이 못 되면 허깨비라도 되어야겠습니다만 무엇에 미쳐서 허깨비가 되오리까. 그럼에도 잡사(雜事)를 잊지 못하니…….(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