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00. 11. 26.

10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은 후에 나는 깨달았다.

내가 왜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지 않았던 것인지.

 

 종이에 손을 베이면 처음에는 생각보다 날카로운 아픔에 놀라게 되고 그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통증에 놀라게 된다. 작가가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도 손가락을 종이에 베이는 아픔과 흡사해보인다. 사람 앞에 나서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가 무슨 말을 할라치면 얼굴이 벌개져서 생각과는 다른 말들을 떠듬떠듬 꺼내는 것과 같이 그녀도 그 시절 이야기를, 현재와 마구 섞어 놓았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무렵. 나는 아버지 걸음을 뒤쫓느라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다. 벌건 흙이 드러난 길을 30분 정도 걸어야 나오는 큰 길 끝에는 장난감 같은 삼층 짜리 붉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학교였다. 시내에서 크고 웅장한, 역사가 깊은 학교에 다니던 나는 쉽사리 전학을 결정하지 못하고  반 년 가까이 버스로 통학을 하다가 멀미에 시달려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드디어 전학을 했는데 한 학년에 달랑 세 반이 전부이던 그곳. 여름이면 나무젓가락을 들고 실습지에 들어가 송충이를 잡아야만 했던 그곳. 고구마를 캐보고 국화를 길러볼 수 있었던 그곳. 청소를 하려면 마을 안에 있는 우물까지 가야만 했던 그곳을 나는 일주일이 못 가 사랑하게 되었다.

 시골 아이가 다 되어 논둑을 뛰어다니며 삘기를 뽑아 질겅질겅 씹어먹다가 돌아온 집에 빨간 딱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사업에 실패해 변두리로 들어왔던 아버지는 끝내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등록금을 제 때 내지 못해 반 아이들 앞에 세워지고 춘추복을 사지 못해 하복바람으로 돌아다녀도, 학교 도서실에서 일하고 근로장학금을 받아야 했기에  함께 몰려다니며 아이들과 떡볶이 사먹는 일조차 하지 못했어도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애써 기억한다. 라고 써야 할 것 같다. 대학합격증을 앨범에 넣으면서 나는 울었다. 술에 취해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버지 앞에서 태연한 척 괜찮다고 했던 나는 또래 아이들이 옆구리에 책만 끼고 걸어가도 눈물이 났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는 내가 보여 자꾸만  제대로 읽지 않고 두 줄 씩 세 줄씩 건너뛰려는 걸 간신히 붙잡아 앉혀야 했다. 작가가 도망가고 싶은 맘으로 쓴 것처럼 나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했던 책 읽기다.

'외딴방'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그곳.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역사가 있는 그 방에 발을 들여놓으면 이렇게 자기 역사가 겹쳐 보이는 모양이다. 작가가 그랬듯, 내가 나의 외딴방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책 덕분이고,'외딴 방'에서 나온 것 역시 문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는 게 떠오른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많은 작품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과감하게 자신의 외딴방을 내보였기 때문에 아직도 검은 도화지로 문을 가리고 숨어 있는 외딴 방 속 아이들은 빛을 두려워하는 손가락 틈새로 작은 햇살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처럼 그 시절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아픈 기억들로부터 치유받는 어른들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을 다시 나에게 물어본다. 내게 책읽기란 무엇인가?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글쎄..잘 모르겠다.

책 앞뒷면을 꽉 채우고 있는 온갖 찬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내게서 호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로드>를 읽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로드>와 <핏빛 자오선>은 둘다 굉장히 암울하다는 것과, <로드>는 미래를,

<핏빛 자오선>은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어두운 면에 집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래를 암울하게 그린 여러 작품들과 궤를 함께 했던 <로드>에서는 희망의 빛이라도

조금 남겨두더니만, 이건 지나간 과거라 그랬을까? 절대로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끝까지 이름을 가지지 못한 '소년'이 길거리에 내팽겨쳐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삶을 사는 동안 인간미라고는 갖추지 못한 사내로 자라는데

온갖 잔인한 죽음 속을 태연히 걸어가는 그를 아주 메마른 어조로 그리고 있다.

'영혼을 압도하는 매혹적인 문체로 빚어낸' 어쩌고 하는 선전문구에 동의할 수 없었던 건

단순히 번역의 문제였을까? 이럴 때마다 정말이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실력이 된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체험이라고 하는 것이 단체적인 체험이 될 리는 없지 않은가?

똑같은 체험이라고 해도 받아들인 당사자의 느낌이 다를 테니

모든 체험은 다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굳이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못박았다.

왜냐? 다른 누군가가 쉽게 접해보지 못할 체험이기 때문이다.




스물 일곱살이 되는 젊은 아기 아빠 . 작고 마른 체형, 부리를 연상시키는 얼굴로 인해

bird라는 별명을 아직도 갖고 있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게 꿈인 학원강사.

술을 마시느라 대학원을 마치지 못해 정상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대학교수인 장인의 힘을 빌어

사설학원 강사가 된 사람, 아직 아기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된 그에게 기형적인 아이가 태어난다.

 

사실 결혼 후, 나는 그 감옥 안에 있는 것이지만 아직 감옥의 뚜껑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어날 아기가 그 뚜껑을 꽝 하고 내리 덮어 버릴 것이다.

 

이렇게 결혼 생활 자체에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갖고 있는 그가

태어날 아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리를 방황하고 급기야는

태어난 아기가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이 빠져 나와 머리에 커다란 혹이 또 하나 달린 듯한

'뇌헤르니아'라는 소릴 듣자 완전히 일상에서건 꿈에서건 탈출하고 싶어서 버둥거린다.

아기를 물건취급하면서 병원 개업한 이래 처음 보는 아이라고 의학적인 사례에만 관심이 있는 의사나

그 아기가 얼른 자기 생활에서 없어져주기를 바라는 버드나 모두 반쯤은 미친 상태이다.

 

병원에 입원한 아내를 장모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대학교 시절 여자친구 집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여성의 벗은 몸에 대한 혐오를 떨쳐버리고 작가식대로 표현하자면 '성의 엑스퍼트'를 만나지만

그런 것들이 위안을 주기에는 버드 내면의 수치심이 만만치 않다.

결국 바닥까지 내려 앉았던 버드는 다시 힘을 낸다.

일본인 여자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다 결국 러시아로 쫓겨간 친구 데르체프 씨는

국제적인 문제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러시아 공사관 측 부탁을 받아 만나러 온 버드에게

자기나라 말을 영어로 찾을 수 있는 사전을 주면서 희망이라는 고국의 낱말 하나를 적어준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있던 모든 것이 다 날아간 뒤 겨우 닫은 상자 안에 남아 있던 희망은

여전히 버드에게도 효력을 발휘한 셈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상을 받은 작가답게 문장이 참으로 유려하고 아름답다.

'저녁 어둠이 짙어가고 지면을 덮고 있는 대기로부터 죽은 거인의 체온처럼 초여름의 훈김이

완전히 걷혀 버린 참이었다. 모든 이들이 살갗에 조금씩 남아 있는 낮 동안의 온기의 기억을

무의식의 어둠 속에 더듬는 듯한 몸짓을 하며 모호한 한숨을 쉬고 있다
.'

역자가 섬세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의'의 남발로 인한 짜증이 마구 솟구쳐 오르는 것도

묘사가 아름다운 걸 완전히 감춰버리지 못했다.

 

문장이 아름다운 것으로 끝났다면 애석했을 테지만 책은 물론 아주 좋다.

펄펄 열이 났다가 열꽃이 피어 딱지가 앉고 슬슬 열이 내리고 얼굴도 다시 제자리를 찾는

홍역을 치루듯 버드가 살아낸 짧은 기간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제 막 성인의 길로 들어서는

젊은이들 모두의 삶을 한꺼번에 뭉뚱그려 본 것만 같다.

버드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해 이제는 전체의 체험으로 번진 것만 같다.

함께 떠나기를 열망하는 히미코를 거절하면서 버드는

"그건 나를 위해서지. 내가 도망만 치는 남자이기를 멈추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터널 한 개를  빠져나와 자신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 선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어떤 개인적인 체험'도 나를 한 단계 끌어올릴 거라고 믿자.

설령, 그것이 너무나 힘든 일일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 역사가 사라져도 좋아? 하루하루가 모여서 역사가 되는 거 알지?"

일기를 쓰지 않으려는 녀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협박이다.

사실 우리가 쓰는 일기처럼 역사란 게 딱히 심오할 것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현재도 후세들에게는 엄청난 사건들로 기록될 테지만

우리는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산을 올라가는 동안에는 돌이 많다거나 이리저리 휜 나무들만 잔뜩 있다거나

청설모는 설치는데 정작 다람쥐는 볼 수 없다든지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는 게 고작이지만  정상에 다다르면 탁 트인 정경을 바라보는 기쁨 외에도

산이 전체적으로 어찌 생겼는지 동서남북 쪽이 각각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속에 파묻혀 있는 셈이다.

시간이 흐른 뒤 사건과 사건들을 정리해보니까 어떻게 시작되었고 중간에 얌체처럼 끼어들어

이익을 본 인물은 누구이며 그래서 누가 감옥엘 갔고 욕을 보았으며

어떤 나라가 경제적인 부를 누렸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문학에서 역사를 읽는다는 것도 비슷하다.

그나마 요새는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역사라고 하면 그저 열심히 외워서 4개 중에 하나의 정답을 

고르느라 머리 아픈 시대에 살았던 우리들에게 재미있게 읽었던 책에서 새롭게 역사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여주니 고맙고 좋은 일이다.

대학교에서 진행된 수업을 정리한 책이라 했는데 고등학교에서도 우리 아이들이 역사와 문학을

이렇게 공부할 수 있다면 외우는 기계에 불과했던 아이들 뇌도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 있을 것 같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진 자료들도 각 장에 풍성하게 넣어두어 읽었던 책들은 읽었을 당시를

떠올리며, 안 읽어본 책들은 보고 싶다는 열망을 피워올리기에 충분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은 이미 읽어보기 위해 빌려놓은 상태이고,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푸시킨의 <대위의 딸>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작가가 워낙 정리를 잘 해 놓은 탓에 여기 나오는 26권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책이 어렵다거나 읽는 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가 읽은 책들은 좀더 관심을 갖고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보물섬>을 얘기하는 도중에 나온 글을 보고 나는 무릎을 쳤다.

 

해적들이나 주인공이나 모두 로또와도 같은 보물찾기에 목숨 걸고 달려든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모험심 강한 영특한 소년과 해적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양편을 가르는 결정적 기준은 '국가'이다. 즉, 국가의 편에 서서 해외로 나가 폭력을 휘두르면

해군이나 사업가가 되고, 국가의 명령을 위반하면서 해외로 나가면 해적이 된다.

그밖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중략)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에서 이를 잘 표현하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로잡힌해적에게 왜 바다를 어지럽히면서 도둑질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해적은 오만불손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 각지에 출몰하는 당신과 다를 바 없소이다. 다만 나는 작은 배를 타니까 해적이라 불리는 것이고 

 당신은 막강한 해군을 가지고 있으니 황제라 불릴 뿐이오."

 

세상에,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게 맞다니까!

역사를 배우는 의미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도 있다 배웠거늘

우리는 왜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의 집 비룡소 클래식 21
루머 고든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조안나 자미에슨.캐롤 바커 그림 / 비룡소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제대로 된 인형을 갖고 놀아 본 기억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인형보다는 나무 칼을 가지고 남자 아이들과 한 판 싸움을 벌이거나

낮은 담에서 뛰어내리는 담력훈련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관절이 구부러지거나 구부러지지 않거나

눈을 깜박이거나 그렇지않거나  다 같은 종류의 인형일 뿐 어느 것 하나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당시 인형 옷 갈아입히기에 푹 빠져 인형과 옷이 인쇄된 하얀 도화지

(앞면은 화려한 칼라로 인쇄되었고 뒷 부분은 갱지처럼 누런 도화지)를  정신없이 사나르던

동생들 덕분에 인형이라는 걸 쳐다보게 되었다.

 인형에 걸 수 있도록 어깨 부분과 허리에 뒤로 꺾어 넣을 수 있는 시접 부분이 그려진

공주님 옷들과 신발, 왕관, 모자, 가방들.

처음에는 서툰 가위질에 잘려나간 시접 부분만을 붙여주다가 차츰

몇 번 가지고 놀다보면 구겨지고 찢어지는 동생들 인형을 위해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잔뜩 부풀린 치마에 레이스로 한껏 치장을 하고

내 옷에는 한 번도 달아보지 않은 리본과 구슬 장식을 잔뜩 달고, 반짝이는 보석도 그려넣어주고

화려한 색을 칠해주었다.

그러다보니 그 옷에 어울리는 금발머리 인형도 몇 명 그려주었는데

그리기 솜씨가 그닥 나쁘지 않았던지 동네 아이들의 주문도 이어져서

우리집은 때아닌 화실이 되곤 했다.

 그렇게 인형은 그런 정도로만 내 어린 시절을 침투했기 때문에

<인형의 집>에 나오는 아주 귀한 인형들과 오래된 인형들, 도자기로 된 인형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인형의 집들이 모두 어느 낯선 이국의 풍경을 보듯 신기했지만

내게 딱 달라붙지는 않았다.

장난꾸러기 어린 인형 애플을 위해 촛불에 몸을 던진 버디를 보면서

발레리나를 위해 자기 몸을 던진 다리 하나인 주석병정을 떠올렸을 뿐

그저 이런 소재로 동화를 만들었음에 감탄을 했다.

그러나 뒷편에 있는 <부엌의 성모님>은 작품 자체에 반했다.

성모님이니 성화니 하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만 종교적인 색이 짙은 작품은 결코 아니며

그레고리의 따뜻한 마음을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동화였다.

 남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아홉 살 그레고리가

우크라이나에서 온 가정부 마르타 아줌마를 위해 성화를 만들면서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에서 탈출하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

짧지만 강렬한 느낌을 전해준다.

 굳이 나누자면 <인형의 집>은 여자 아이들에게,

<부엌의 성모님>은 남자아이들에게 읽히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