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이라고 하는 것이 단체적인 체험이 될 리는 없지 않은가? 똑같은 체험이라고 해도 받아들인 당사자의 느낌이 다를 테니 모든 체험은 다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굳이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못박았다. 왜냐? 다른 누군가가 쉽게 접해보지 못할 체험이기 때문이다. 스물 일곱살이 되는 젊은 아기 아빠 . 작고 마른 체형, 부리를 연상시키는 얼굴로 인해 bird라는 별명을 아직도 갖고 있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게 꿈인 학원강사. 술을 마시느라 대학원을 마치지 못해 정상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대학교수인 장인의 힘을 빌어 사설학원 강사가 된 사람, 아직 아기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된 그에게 기형적인 아이가 태어난다. 사실 결혼 후, 나는 그 감옥 안에 있는 것이지만 아직 감옥의 뚜껑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어날 아기가 그 뚜껑을 꽝 하고 내리 덮어 버릴 것이다. 이렇게 결혼 생활 자체에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갖고 있는 그가 태어날 아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리를 방황하고 급기야는 태어난 아기가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이 빠져 나와 머리에 커다란 혹이 또 하나 달린 듯한 '뇌헤르니아'라는 소릴 듣자 완전히 일상에서건 꿈에서건 탈출하고 싶어서 버둥거린다. 아기를 물건취급하면서 병원 개업한 이래 처음 보는 아이라고 의학적인 사례에만 관심이 있는 의사나 그 아기가 얼른 자기 생활에서 없어져주기를 바라는 버드나 모두 반쯤은 미친 상태이다. 병원에 입원한 아내를 장모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대학교 시절 여자친구 집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여성의 벗은 몸에 대한 혐오를 떨쳐버리고 작가식대로 표현하자면 '성의 엑스퍼트'를 만나지만 그런 것들이 위안을 주기에는 버드 내면의 수치심이 만만치 않다. 결국 바닥까지 내려 앉았던 버드는 다시 힘을 낸다. 일본인 여자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다 결국 러시아로 쫓겨간 친구 데르체프 씨는 국제적인 문제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러시아 공사관 측 부탁을 받아 만나러 온 버드에게 자기나라 말을 영어로 찾을 수 있는 사전을 주면서 희망이라는 고국의 낱말 하나를 적어준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있던 모든 것이 다 날아간 뒤 겨우 닫은 상자 안에 남아 있던 희망은 여전히 버드에게도 효력을 발휘한 셈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상을 받은 작가답게 문장이 참으로 유려하고 아름답다. '저녁 어둠이 짙어가고 지면을 덮고 있는 대기로부터 죽은 거인의 체온처럼 초여름의 훈김이 완전히 걷혀 버린 참이었다. 모든 이들이 살갗에 조금씩 남아 있는 낮 동안의 온기의 기억을 무의식의 어둠 속에 더듬는 듯한 몸짓을 하며 모호한 한숨을 쉬고 있다.' 역자가 섬세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의'의 남발로 인한 짜증이 마구 솟구쳐 오르는 것도 묘사가 아름다운 걸 완전히 감춰버리지 못했다. 문장이 아름다운 것으로 끝났다면 애석했을 테지만 책은 물론 아주 좋다. 펄펄 열이 났다가 열꽃이 피어 딱지가 앉고 슬슬 열이 내리고 얼굴도 다시 제자리를 찾는 홍역을 치루듯 버드가 살아낸 짧은 기간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제 막 성인의 길로 들어서는 젊은이들 모두의 삶을 한꺼번에 뭉뚱그려 본 것만 같다. 버드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해 이제는 전체의 체험으로 번진 것만 같다. 함께 떠나기를 열망하는 히미코를 거절하면서 버드는 "그건 나를 위해서지. 내가 도망만 치는 남자이기를 멈추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터널 한 개를 빠져나와 자신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 선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어떤 개인적인 체험'도 나를 한 단계 끌어올릴 거라고 믿자. 설령, 그것이 너무나 힘든 일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