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1초들 - 곽재구 산문집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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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을 다투듯 살아 본 적이 있었던가?

세계적인 스프린터들이야 1초를 잘게 나눈 그 시각까지 피를 말리며 살았겠지만

나야 그럴 일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가야 할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 지나가는 초바늘을 붙잡고 싶었을 뿐

그닥 허덕대며 1초까지 아까워하며 사랑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그는 그랬단다.

어떤 1초는 무슨 빛깔의 몸을 지녔는지, 어떤 1초는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1초는 지금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어떤 1초는 왜 깊은 한숨을 쉬는지

다 느끼고 기억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책머리에 밝힌 이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 나도 그랬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아니다, 그가 시인이기 때문이다.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시작한 책읽기는 그러나, 나를 사로잡았다.

2009년 7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라빈드라니드 타고르의 시편을

타고르의 모국어인 벵골어로 읽고 우리글로 옮기고 싶어서 떠난 여행기록인데

생전 보도 듣도 못한 그 사람들이 어느새 내 이웃이 되고 삼촌이 되고

여동생이 되었다.

타고르가 사랑한 챔파꽃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난 것만으로도 반할 지경이었는데

크와이 멜라에서 아이가 만든 종이배를 기꺼이 사들고 돌아오는 그를 보며,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조회시간에 꼬박꼬박 찾아오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평화롭고 따뜻한 시간은 내 생애에 없었다. 이 시간들은 내게 꿈이다.'

라고 말할 줄 아는 이 '다다'(아저씨라는 벵골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9월 어느 날 비내리는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다면서,

세상이 고요한데 빗소리만 들리는 그 풍경을 이야기하면서

쪼로록 빗방울들을 14줄에 걸쳐 그려놓았을 때

나는 이 시인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산티니케탄에 머물며 벵골어를 배우고 사람들과 소박하게 살아가면서

'이 보석같은 행복한 시간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요?'

라고 묻는데 가식이라곤 티끌 한 점만큼도 없는 진정이 느껴져서 나는 웃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해. 밝게 살아야 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이렇게 설교하지 않고도 그런 것이 제일 좋다는 걸 제대로 보여준다.

오랜만에 휴식같은 책 읽기였다.

읽는내내 1초, 1초를 사랑했다.

오래도록 그 1초들이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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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나무 위의 눈동자 동화 보물창고 36
윌로 데이비스 로버츠 지음, 임문성 옮김 / 보물창고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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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가지고 다니는 책을 보고 아이들이 한 마디씩 했다.

"무서워요."

"재미 없을 것 같아요."

"제목이 뭐 그래요?"

어른들은 좀 약은 편이어서 무슨무슨 수상작이거나, 유명 작가가 쓴 책이거나,

알 만한 사람이 추천글을 남기거나,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거나 하면

기꺼이 읽어볼 테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읽어볼 의지를 갖지 않는 이상

이런 책을 잡지는 않는다. 그러니 첫인상으로는 실패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롭이 사는 집과 칼로웨이 부인이 사는 바로 옆집,

그 사이에 교집합처럼 존재하는 체리나무가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숨막히게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큰누나의 결혼식으로 정신이 없는 틈에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는 롭은

자신의 은신처 체리나무에서 엿보게 된 살인사건으로 생명에 위협까지 느끼게 된다.

범인이라고 해봐야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뻔한 인물들인데도

결코 지루하거나 흥미가 떨어지지 않은다는 데 이 책의 매력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루팡이나 셜록 홈즈가 활약하는 추리소설밖에 없어서

어른들이나 느낄 수 있는 많은 감정들을 이해 못하고 대충 넘어간

부분들도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11살짜리 주인공 롭이 범인을 추리해가는 이런 책들이 그때도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추리소설에 빠질 수 있었을 텐데.

요즘을 살고 있는 아이들은 이런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결핍이 없으면 풍요롭다는 걸 인지할 수 없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롭이 사라졌던 그 짧은 순간에 가족들이 느꼈던 결핍도 비슷할 것 같다.

 

롭과 같은 나이인 4학년 아이들이라면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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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책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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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지 않는다.

110쪽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책은 끈질기게도 졸음을 몰고 온다.

어려운 철학책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안 읽힐까?

 

'1998년 봄, 블루마 레논은 소호의 어느  책방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구판본 시집을 사서, 첫 번째 교차로에 이르러 막 두 번째 시를

읽으려는 순간 자동차에 치이고 말았다.'

첫 시작부터 미끼를 잔뜩 풀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죽은 그녀에게 시멘트 부스러기가 덕지덕지 묻은 조셉 콘래드의 <섀도 라인>이

우루과이로부터 배달되면서 동료였던 내가 그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은

조금 심드렁하고 졸립다.

 

서가에 읽지도 않는 책들을 잔뜩 꽂아두고 남들이 탄복하는 것에 뿌듯해하는

같잖은 인물들이 등장할 때는 나도 찔렸다.

한 번 읽고 던져두어 다시는 보지 않았고, 또 볼 것 같지도 않은 많은 책들을 떠올렸다.

계속 책들이 늘어나면 둘 데도 마땅치 않고 뭐가 있는 지도 모르는 채

어느 날 팽 돌아서 나도 시멘트를 짓이겨 책을 벽돌삼아 집을 지으려고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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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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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새로운 것을 만날 거라는 기대를 하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소설을 쓰는 기발한 방법론을 풀어내는 책도 아니다.

그가 수차례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쉽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이야기가 귀에 쏙쏙 박힌다.

책장 한 모서리 살짝 접는 것도 싫어서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발딱 서는 책들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읽는, 어쩌면 지극히 결벽증 증세를 보이던 내가

노란 색연필로 군데군데 밑줄까지 치면서 읽었다.

색연필을 잡은 손에 줄을 매달았는지 줄을 긋는 것과 동시에 고개까지 끄덕여

졸지에 마리오네뜨 인형이 되어버린 행복한 순간들.

 

무엇보다 소설을 (나는 소설만이 아닌 포괄적인 '글'로 읽었지만) 쓰려는 사람은

잘 읽어야 한다고. 느리게, 자세히, 꼼꼼하게 읽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급하게 먹기로 정평이 난 내가 열 번 내지 열서너 번씩 씹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마음을 빼앗기는 책을 쓴 작가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책들을 여러 번 음미하듯 읽고 그 다음에는 과감하게 던지는 일을

다시 한 번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설계도를 그리지 않은 채 집을 지어 창문도, 계단도, 화장실도 없는 엉터리 집을 지어

세입자들을 불편하게 했던 과오도 반성했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중에서

 

나도 분명 읽었던 책인데 왜 그때는 이런 구절도 몰랐을까?

아마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 역할에 치중했던 때문인 것 같은데

뒤늦게 다시 만난 이 구절이 나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따뜻해졌다.

나처럼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예습이든 복습이든 어떤 의미에서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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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한 상자 랜덤 시선 17
성미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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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일기쓰기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글감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는 것이다.

밥먹고 잠자고 꿈꾸고 똥싸고 싸우고 말하고 공부하고 노는 모든 일들이

내 일기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을 가장 먼저 이야기해주는데

성미정의 시집을 보는동안 내가 느낀 건 감동보다도 먼저

시인이 쓴 일기를 보고 있다는 거였다.

물론 많은 시인들이 일상을 노래하지만 일상이 아닌 척 덮어두는 일에 능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들 재경이 육아일기, 남편관찰 일기, 거울속에 비친 시인 일기 등이

따뜻하고 잔잔하게, 혹은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고양이처럼 털을 몽땅 세운 듯

불안하고 날카롭다.

게다가 대부분의 시들에서 의도적인 행바꾸기로 의미전달이 모호해진 것도

몰입을 방해한다.

 

한 차례 쯤은 훌떡 재주를 넘어 쓰고 있는 탈을 벗었으면 좋겠는데

끝까지 고뇌만 하는 시인을 보는 건 차라리 고역이었다.

'나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김치 같은 시를 쓰다 싶다'(그래서 김치는 맛있다)거나

'제대로 된 문장 한 줄을 모아본 적 없는 자의 끝없는 참회와 피로를'(문장을 읽기 전에는)

느끼거나 '아직 어설프기 그지없는 미로이고 생성 중에 있기 때문에 언젠가 성미정과 나는

발견되게 될 것입니다 그나마 알아보기 쉬운 쓰레기 상태로'(허무 명랑한 시인의 미로)

머물러 있다.

내가 가진 병의 증상만으로도 힘이 드는 터에,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어려움.

증세가 호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거나, 신약을 만들었다는 즐거운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이 동병상련보다 더 커서 나는 이 시집을 사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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